“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뒤돌아보는 새는 죽은 새다. 모든 과거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날개에 매단 돌과 같아서 지금 이 순간의 여행을 방해한다.”
이 글은 류시화 시인의 산문집에 나오는 글이다. 이 글은 송구영신의 계절을 지나면서 어떤 자세로 내일을 맞이해야 하는지 가르침을 준다.
새해를 맞는 것이 가슴 설레고 두근거려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과거에 매여 살면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긴다. 그 이유는 과거에 메어 살기 때문이다. 새는 가느다란 실에라도 묶여 있으면 날지 못한다. 아픈 상처가 있는 사람도 그 상처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 없기에 괴로워하게 되고, 과거에 머물러 살기에 내일을 볼 수 없다.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아픈 상처는 빠른 치유와 회복이 꼭 필요하다.
인생은 “관광”(Tour)이 아니라 “여행”(Travel)이라고 한다. 이 여행은 고생(travail)과 어원이 같다고 한다. 쉽지 않은 인생을 긴 호흡으로 주어진 우리의 삶을 사랑하며 살면,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더 많은 기쁨과 사랑을 돌려줄 것이다. 상처나 어려움이 없으면 좋지만, 누구에게나 고난은 있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에는 상처받고 고난 중에 있는 이들이 용기를 내어 다시 살아갈 힘을 얻도록 돕는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30대 초반의 하나뿐인 아들을 위암으로 떠나보내고 슬픔 가운데 있는 어머니를 위로하기는 쉽지 않았다. 세상의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가 없다. 심지어 신앙적인 위로도 큰 도움이 안 된다. 그래도 이런 분에게 작은 위로를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이 어머니처럼 얼마 전에 아들을 잃고 오랜 슬픔 가운데 있다가 회복되어 봉사를 온 어머니가 손잡아주며 함께 울어줄 때가 아닌가 싶다.
아팠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 지금 아픔 가운데 있는 사람을 위로할 때, 그 위로가 어떤 위로보다도 효과가 있었고 진정성 있게 받아들여졌다.
상처의 완전한 회복은 있을 수 없다. 원래의 완전한 상태가 될 수는 없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원상에 가까운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회복의 의미일 것이다. 혼자서 상처를 극복하는 데는 매우 긴 시간이 소요된다. 고난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다. 시간이 지나면 빠져나오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 옆에서 조금만 도와준다면 어둠의 긴 터널을 빨리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사회복지기관에서 오랜 시간을 봉사하며 지켜본 바로는, 돈 많은 이들보다 돈이 많지 않은 보통의 사람들이 더 후원을 잘하고, 자원봉사도 몸이 건강한 사람보다도 크게 아파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더 신실하게 봉사를 잘하는 것을 보았다. 어려움 없이 살아온 사람들은 고통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잘 모르지만, 아파본 사람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기에, 어떻게 해서라도 견디고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애쓰는 것을 많이 본다.
“사단법인 해로”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어르신들이 찾아오신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봉지은 대표와 이정미 팀장이 어르신들의 요청을 모두 맡아서 해결해 드렸다. 도울 수 있는 인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2년 동안 해로는 많은 발전을 하였다. 아무런 경제적 뒷받침이 없는데도, 묵묵히 앞장서서 고생한 대표와 호스피스 팀장의 헌신과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된다.
지금은 가정방문을 하면서 어르신들을 돕는 자원봉사자들도 꾸준히 늘고 있어 감사하다. 또한 연방정부 차원에서 자원봉사자를 4명까지 지원해 주어서 다양한 섬김이 가능하도록 해준 것도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있는지 모른다. 이렇게 파독 어르신들을 섬기며 묵묵히 일하는 젊은 자원봉자자들이 모여서 교포사회에 새로운 변화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앞으로 이들이 만들어갈 새로운 세상을 기대해 본다. 역시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분이시다.
지난 12월 19일에는 해로의 자원봉사자들이 모여 송년회를 하였다. 시간 따로 장소 따로 봉사하는 까닭에 다 함께 모이기 어려웠는데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더 나은 봉사를 향해 서로를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다. 모두 수고했지만, 봉사자들 중에서 몇 사람을 뽑아 봉사상과 감사장 그리고 작은 선물도 주며 격려하고 식사와 교제를 하였다. 추워진 날씨와 감기로 모든 분이 다 오지는 못했지만, 작은 사무실을 후끈하게 달구는 송년 모임이 되었다.
성숙한 사회는 자원봉사자들이 많은 곳이다. 우리 자원봉사자들이 있기에 힘들게 지내시는 우리 어르신들이 조금은 힘들지 않고 외롭지 않게 지내실 수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이 분들 덕분에 베를린 교민사회가 더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사회가 되고 있다. 이런 젊은 자원봉사자들을 더 많이 지원하고 격려한다면, 교민사회가 노령화되어 일할 사람이 없다는 고민도 해결하고, 세대간의 소통도 좋아지리라 기대한다.
한 해 동안 수고하신 자원봉사자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내년에도 더욱 열심히 봉사해 주시리라 기대한다. 이 분들의 노고를 하늘에서도 기억해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원봉사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게 되고 싶은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가복음 10:43-44)
박희명 선교사 (호스피스 Seelsorger)
1296호 면, 2022년 12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