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이해하자

또 다른 명품, 독일 총리들(6)

명품 왕국 독일에는 제품·인프라·시스템뿐만 아니라 인물에도 명품이 많다.
경제적으로 ‘라인강의 기적’과 정치적으로 ‘베를린의 기적’을 이끌어온 ‘서독과 통일독일의 연방총리들’이야 말로 나치 정권의 혹독한 시련을 겪은 독일이 길러낸 최고 명장들이며 독일 국민이 만들어낸 최고의 명품이다.
독일의 연방총리를 보면 자유민주주의와 강력한 서독(아데나워)- 시장경제와 경제기적(에르하르트)- 동방정책(빌리 브란트)-동서 데탕트 시대(슈미트)- 유럽 통합과 독일 통일(헬무트 콜)- 노동개혁과 독일병 처방(슈뢰더)- 독일병 치유와 EU 대주주(메르켈) 그리고 현재 올라프 숄츠로 이어지며, 제2차 세계대전 후 건국-분단-냉전-성장-통일-통합에 이르기까지 마치 한 편의 대하드라마처럼 잘 짜여진 시나리오로 구성되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시대적 흐름을 선도했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동방정책 ‘나침반’ 들고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로 독일을 이끌다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는 2차 대전으로 갈등과 적대의식에 점철된 독일과 유럽 국가들 사이에 화해를 도모하며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다진 정치가이다. 그는 베를린 시장과 서독 총리(1969~1974)를 역임했고, 신동방정책을 임기 초인 1969년에 발표했다. 이 틀 안에서 경제공동체를 통해 서유럽 협력 강화와 소련을 포함하여 동유럽을 화해의 길로 이끌어갔다. 이 공로로 1971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이룩한 자유와 풍요를 바탕으로 시대의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번듯한 민주공화국을 이룩한 윗세대의 희생에 감사하기보다는 히틀러 정권에 굴종하고, 그 유산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을 성토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노인장’ 아데나워는 “실험은 안 된다”고 외쳤지만, 많은 국민은 ‘이제 실험을 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민당·기사당과 사민당의 대연정은 그 실험을 위한 실험이었다.

한편 1959년 ‘바트 고데스부르크 강령’ 이후 정강정책에서 계급주의적 요소들을 포기하고, 아데나워 정권의 외교·안보정책을 수용하면서 우(右)클릭을 계속해온 사민당은 대연정을 거치면서 자신들에게 국정운영 능력이 있음을 과시했다. 그 중심에는 빌리 브란트가 있었다.

총리가 되기까지

사생아로 태어난 브란트는 어려서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17세에 사민당원이 됐고, 사민당지에 수시로 기고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마르크스의 [자본론] 한 권과 100마르크만 지니고 독일을 떠났다. 그는 12년간의 망명 시절 내내 프리랜서 기자로서 수많은 기고문과 글을 썼다. 독일의 상황뿐만 아니라 스페인 내전도 취재해 보도했고,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현장도 취재했다. 이후 브란트는 정치인으로서 자기 생각을 스스로 적고 발표했으며, 총리직을 사임한 이후 세 권의 두툼한 책으로 자신이 걸어온 삶을 회고했다.

브란트는 죽음을 각오하고 나치의 통치에 반대했던 반(反)나치 운동가였다. 그는 망명 기간 중 노르웨이·스웨덴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유럽 각지를 다니면서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심지어 나치의 검문검색이 날이 갈수록 철저해지고 전쟁 준비로 치닫던 1936년 베를린에 잠입해 활동했다.

그가 나치의 정황을 파악할 목적으로 위장 입국해 근거지를 잡은 곳은 베를린의 가장 중심 거리인 쿠담 거리 인근, 히틀러 사무실이 있던 빌헬름 거리와는 불과 20여 분 거리에 있었다. 우리로 비유하자면 일제 총독부가 위치한 중앙청과 가까운 서울 종로 거리 부근에 머물면서 일본 동향을 파악해 전달하는 소식통 역할을 한 셈이다.

그의 행적은 결국 나치에 발각됐다. 1938년에는 독일 국적이 박탈되고, 심지어 1940년 노르웨이에서 나치 경찰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당시 그는 노르웨이 국적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까스로 풀려났으며, 이후 스웨덴으로 피난해 반나치 투쟁을 지속해나갔다.

2차 대전이 끝난 이후 브란트는 1947년 베를린 주재 노르웨이 군사위원회 언론담당관 신분으로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그는 1948년 국적을 다시 취득하고 사민당 당원으로 등록한 이후 정치에 적극 관여했다. 베를린 시의회 의원, 사민당 베를린 지부장 등의 경력을 거쳐 1957년 43세의 젊은 나이에 베를린 시장에 당선됐다.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는 젊고 잘생긴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미국인은 물론 독일인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1963년 6월 서(西)베를린을 방문한 케네디가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고 외칠 때, 그의 옆에는 케네디만큼이나 젊은 서베를린 시장이 서 있었다. 바로 빌리 브란트였다.

그의 정치 일생의 전환점은 베를린 장벽이었다. 브란트는 장벽이 서는 것을 막기 위해 아데나워 총리, 케네디 미국 대통령에게 호소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베를린장벽 구축에 분노하면서도, 그것을 기존에 형성되어 있는 분단구조를 추인(追認)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빌리 브란트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보기로 결심했다. 브란트의 측근 에곤 바르가 ‘접근을 통한 평화’라는 개념을 개발해냈고, 이것은 후일 동방정책으로 이어졌다.

키징거와의 대연정 정부에서 부총리 겸 외무부 장관으로 동방정책을 실험하기 시작한 빌리 브란트는 1969년 9월 총리가 된 후 이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 잇달아 관계를 정상화했다. 1972년 12월 바르샤바를 방문했을 때 바르샤바 게토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은 그 절정이었다. 1972년 11월에는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됐다.

다음 회에서는 총리로서의 빌리 브란트를 살펴보도록 한다

1314호 29면, 2023년 5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