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pl.-Ing. WONKYO 연구소장
세계 최대 미툴라 (Mitula) 유조선 좌초
미툴라는 네델란드 로터담 쉘 (Rotterdam Shell) 오일 소속으로 1968년에 제작되어 네델란드 국기를 달고 전세계를 무대로 원유를 실어 나르던 유조선 이름이다.
미툴라 유조선은 소위 VLCC (Very Large Crude Carrier) 라는 초대형 원유운반선에 속해있던 배로서 길이만 325m였으니 유조선중에서도 제일 큰 원유운반선이었다.
필자가 기술 전문 통역사로 노이스(Neuss) 소재 야겐베르크 (Jagenberg) 종이 롤러공장(Roller Werk)에서 근무할 때 공장 전체 길이가 220m나 되는 엄청난 건물이었다.
공장 앞쪽에서 뒷부분으로 가려면 걸어서 3-4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기에 주로 자전거로 이동을 했었는데 이보다 더 긴 길이의 미툴라 유조선이었으니 그 크기가 가늠해본다
1974년에 칠레 국유업체인 ENAP는 선조된지 6년이 된 이 미툴라 유조선을 쉘(Shell)사로부터 임대해서 매번 20만톤 정도의 원유를 싣고 중동의 산유국에서 칠레까지 원유 운반하는 데에 투입해 왔다.
유조선에 채워져 있던 원유를 목적지 항구에 있는 원유탱크에 모두 옮겨 실은 후에 조금이라도 유조선에 남아 있는 원유를 어떻게 처리할까 ?
대부분이 원유 운반선의 안전을 위해서 바닷물을 채우고 산유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도중에 바다에 씻어 버리고 나서 원유를 다시 받아 오고 있다. 원유선에 남아 있는 원유를 100% 완전히 비울 수는 없다만 보통 0,1% 정도는 남아 있는 것으로 계산하고 있다.
원유선에 남아 있는 이 잔존물을 알오비(ROB)라 하고, 힐(Hill)은 철도나 일부 해상운송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며, 슬러지 (Sludge) 또는 스읠(Swil) 이라는 용어로 불리우고 있다.
1974년 미툴라 유조선은 중동에서부터의 긴 항해를 뒤로하고 칠레와 가까운 마젤란 (Magelan) 항로를 통과하고 있었다. 마젤란 항로는 위치에 따라서는 협소한 뱃길이어서 위험이 따르기도 했지만 그 항로가 중동에서 칠레로 가는 가장 짧은 거리였기에 항상 이용되어 오던 뱃길이었다.
중동에서 원유를 싣고 칠레로 오려면 파나마운하를 거칠 필요 없이 바로 남미의 최남단이 되는 티에라 델 후에고(Tierra del Fuego)로 오는 것이 최단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제3제국의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사람이지만 독일로 귀화한 사람이기 때문에 독일사람이라 하지 오스트리아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토마스 만 (Thomas Mann) 노벨 문학상 수상자나 상대성 원리를 밝히고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알버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같은 사람도 미국으로 귀화했기에 미국인이지 독일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세계 2차 대전에 패망한 후 엄청난 독일 사람들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성공을 이루는데 보잉 항공사, 존 스타인웨이 피아노, 싱어 미싱, 하인쯔 토마토케첩, 청바지 리바이스 등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이다.
페르디난드 마젤란 (Ferdinand Magellan)도 포르투갈 사람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스페인으로 귀화했기에 스페인 사람이 맞으며 인류 최초로 세계 항로일주에 성공한 사람이다.
엄밀히 말하면 마젤란은 칠레의 최남단 항로 (마젤란 해협) 인 티에라 델 후에고 (Tierra
Del Fuego) 거쳐 필리핀에 도착한 지 한 달 뒤에 그곳에서 죽었으니 그가 세계 항로일주를 한 것은 아니다.
단지 그가 인솔했던 함대가 다시 필리핀을 떠나 계속해서 서진해 나아간 후 스페인에 귀환함으로써 세계 항로일주에 성공한 선단의 선장이 된 것이지 마젤란 자신이 세계항로 일주를 한 것은 아니다.
누구는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겠다.
1509년 마젤란은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지나서 필리핀에 도착한 경험이 있었기에 비록 두 번으로 나누어 필리핀으로 가긴했지만 한 번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두 번 째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돌아서 필리핀으로 갔으니 마젤란이 세계 항로일주를 한 것이 맞다고.
그렇다면 이런 주장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
정작 스페인에서는 마젤란 함대와 같이 서진개척에 나섰다가 죽지 않고 돌아 온 부선장 후안 세바스챤 데 엘카노 (Juan Sebastian De Elcano)를 진정한 세계일주 항로가라고 인정 하고 있는 현실을.
1974년 8월의 어느 어두운 밤, 이 마젤란 항로를 따라 항해하던 미툴라 유조선은 암초에 부딪쳐 좌초하면서 칠레에 엄청난 환경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미툴라호의 좌초로 약 53000톤에 달하는 검은 원유가 바다로 흘러들어 갔다.
마젤란항로에 시커멓고 끈적거리는 원유 유출로 바다에서 서식하는 각종 해초류와 동식물 그리고 연안에 살고 있는 주민에게 되돌릴 수 없는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검은 원유가 바다를 뒤덮게 되자 이런 대형 사고처리 경험이 전혀 없던 칠레정부는 미국에 긴급 구조요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정부에서도 즉각적인 구호팀을 구성해서 바다에 떠다는 원유를 걷어 들이기에 바빴고 허우적거리는 오리와 물개 등을 씻어주고 닦아 준다고 해도 헛수고인 경우가 더 많았다.
이 미툴라 유조선 사고는 마젤란 항로에서 발생한 사고 중에서 가장 큰 사고로 알려져 있으며 또한 세계 유조선 사고 중에서도 사상 두 번째로 큰 사고로 기록되어 있다.
사고현장에는 다시는 이런 대재앙을 맞지 않게 하기 위한 경각심을 주기 위해 해앙박물관을 세웠다.
주로 유조선이 좌초되거나 침몰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연구하고 있지만 바다로 흘러들어 온 검은 원유를 최소한의 환경피해 속에서 처리할 수 있는 방법 찿기는 아직도 진행 중에 있다.
교포신문은 6월부터 1년간 정원교선생의 “천 년을 가라 한들 멀다 했으랴” 글을 연재합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인문학적 지평을 넓혀줄 것을 확신하며 독자들의 많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1415호 22면, 2025년 6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