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뤼네스 반트(Grünes Band)에서 DMZ까지

독일 통일의 길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걷다

유승석 (민주평통자문위원, 재독대한태권도협회 회장)

정전협정 73주년, 독일에서 평화를 걷다

2026년 7월 26일,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73주년을 하루 앞두고 독일 뫼들라로이트 (Mödlareuth)에서 ‘평화 걷기(Peace Walk) 2026’이 열렸다.

한국과 독일을 비롯한 다양한 국적과 문화적 배경을 지닌 참가자들은 독일 분단의 현장을 함께 걸으며 통일의 경험을 배우고,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행사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프랑크푸르트협의회(지회장 이정환)가 독일 통일의 경험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함께 고민하기 위해 마련한 시민 평화교류 프로그램이다.

왜 평화걷기(Peace Walk)인가?

이번 행사를 기획한 이정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프랑크푸르트협의회장은 독일 통일이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기적이 아니라, 오랜 대화와 신뢰, 시민들의 교류가 축적된 결과라면서, 이번 행사의 취지를 다음 한 문장으로 설명했다.

“경계는 다리가 되고, 정전은 평화로 이어집니다.”

이번 평화걷기는 독일 통일의 역사를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분단의 기억을 미래 세대와 공유하며,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시민 공공외교의 장을 만들기 위해 기획되었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같은 길을 나란히 걸으며 서로의 경험을 듣고, 과거의 흔적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는 가장 인간적인 평화의 방식이기도 하다.

지난 25년 동안 독일에서 태권도를 지도하며 독일인 수련생들과 함께 DMZ와 제3땅굴을 방문 해온 필자 역시, 독일 통일의 경험을 한반도의 미래와 연결하는 일이 재외동포가 실천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평화 활동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베를린보다 뫼들라로이트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독일 접경지역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전)DMZ 평화연구소 황성한소장은 “독일 통일을 이해하려면 베를린보다 뫼들라로이트를 가봐야 한다”고 조언하며 그뤼네스 반트(Grünes Band)를 소개했다.

현장을 직접 찾은 뒤 그 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뫼들라로이트는 독일 바이에른주와 튀링겐주의 경계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주민은 50여 명에 불과하지만, 독일 분단의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라는 점에서 ‘리틀 베를린(Little Berlin)’이라 불린다.

베를린 장벽이 냉전과 독일 분단의 거대한 정치적 상징이라면, 뫼들라로이트는 분단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 가족, 이웃 관계를 어떻게 갈라놓았는지를 가까운 거리에서 보여주는 살아 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이다.

작은 시냇물이 가른 두 세계

마을을 가로지르는 탄바흐(Tannbach)는 폭이 불과 30cm 남짓한 작은 시냇물이다. 그러나 냉전 시기 이 시냇물은 동독과 서독을 나누는 국경이 되었다. 장벽과 철책, 감시초소가 설치되면서 주민들은 가족과 이웃을 눈앞에 두고도 자유롭게 만날 수 없었다. 오늘날에도 당시의 장벽과 국경시설 일부가 보존되어 있어 분단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분단의 국경에서 평화와 생명의 길로

독일 통일 이후 옛 동•서독 국경 약 1,400km는 그뤼네스 반트라는 생태•평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과거 사람들의 이동을 막았던 국경은 이제 지역과 사람, 자연을 연결하는 길이 되었고, 희귀 동식물이 살아가는 유럽 최대의 생태축으로 보존되고 있다. 이는 언젠가 한반도의 DMZ 역시 평화와 생명의 공간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독일 현장이 전한 평화의 메시지

행사에 참여한 여러 전문가는 독일 통일과 그뤼네스 반트가 지닌 의미를 참가자들과 공유했다.

– 독독박물관장 로베르트 레베게른(Robert Lebegern)은 참가자들을 직접 안내하며 뫼들라로이트의 분단 역사와 당시 주민들의 삶을 설명했다. 그는 분단의 흔적을 보존하는 이유는 미래 세대에게 평화의 가치를 전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하였다.

– 바이에른주 대한민국 명예영사 토마스 엘스터(Thomas Elster)는 1980년대 후반까지도 대부분의 독일인은 통일이 그렇게 빨리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평화와 통일은 예기치 않은 순간 찾아올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오랜 시간 쌓아 온 대화와 신뢰가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 그뤼네스 반트의 현장 전문가 토마스 핀다이스(Thomas Findeis)는 당시의 항공사진과 현재의 현장을 비교하며 뫼들라로이트의 분단 역사를 설명했다. 그는 참가자들과 함께 옛 국경을 걸으며 장벽과 철책, 감시초소가 주민들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소개했고, 통일은 정치적 사건을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회복해 가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 독일의 대표적인 환경운동가이자 환경정책 전문가이며, 그뤼네스 반트의 명예회장인 후베르트 바이거(Dr. Hubert Weiger) 교수는 독일이 옛 국경을 자연과 역사가 공존하는 그뤼네스 반트로 보존하기로 한 것은 독일 사회의 중요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분단의 상처를 단순히 지우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보존함으로써, 평화와 생명의 공간으로 새롭게 만들어 가는 과정이 독일 통일이 남긴 가장 소중한 유산이라고 강조했다.

– 독한협회(Deutsch-Koreanische Gesellschaft e.V.) 부회장 율리아나 바론(Juliana Baron, 한국명: 양경아)은 60여 년간 독일과 한국를 잇는 교류를 이어온 독한협회의 역할을 소개하며, 그뤼네스 반트는 분단을 극복한 역사의 상징을 넘어 경계가 만남과 이해의 공간으로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장소라고 설명했다. 그는 서로 다른 문화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대화와 교류를 통해 새로운 신뢰를 쌓아 갈 때 평화도 함께 만들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 바이에른방송(Bayerischer Rundfunk, BR) 기자 프랑크 홀만(Frank Hollmann)은 옛 동•서독 국경에서 불과 50km 떨어진 바이에른 밤베르크에서 성장해 어린 시절부터 분단을 가까이에서 경험했다. 1990년 독일 통일 당시에는 기자로서 국경 개방의 현장을 취재하며 동•서독 주민들의 이야기를 기록했고, 이후에도 지뢰 제거와 철책 철거, 그뤼네스 반트의 조성 과정을 꾸준히 취재해 왔다. 그는 “역사를 기억하는 일이야말로 평화를 지키는 첫걸음”이라며, 분단의 흔적을 보존하는 것은 미래 세대에게 평화의 가치를 전하는 중요한 역사교육이라고 강조했다.

– 한국계 입양인 팀 한슈타인-이(Tim Hanstein-Lee, 한국명 김정빈)는 옛 동독 출신 양부를 통해 독일 분단과 통일의 역사를 가까이에서 접하며 성장했다. 그는 “독일 통일은 1990년에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과정”이라며, 제도적 통일 이후에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해와 신뢰를 쌓아 가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는 통일은 국경을 하나로 만드는 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이어 가는 긴 여정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미래 세대가 함께 걸은 길

참가자들의 소감은 이번 행사의 의미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한국인 2세 청소년 유재상 군은 “평화는 누군가가 대신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는 스포츠 공동체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에서 온 18세 소피아(Sofiya Gemeva)양은 과거의 국경이 자연과 사람을 잇는 공간으로 변한 모습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전했다.

독일과 스페인 문화 속에서 성장한 청소년 호나이(Jonay Jahn Valenzuela)군은 “국적과 성장 배경은 달라도 평화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 같다”고 말했다.

이들의 목소리는 평화가 특정 국가나 세대만의 과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과거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분단의 현장을 함께 걷고 질문을 나눌 때, 기억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평화는 현재의 과제가 된다.

그뤼네스 반트에서 DMZ까지

독일은 분단의 상징이었던 국경을 그뤼네스 반트라는 평화와 생명의 공간으로 바꾸어 냈다. 이는 국경이 저절로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독일 사회가 분단의 흔적을 기억하고 자연과 함께 보존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번 평화걷기 2026은 그 길을 직접 걸으며 독일 통일의 경험을 배우고, 한반도의 평화를 함께 고민한 뜻깊은 여정이었다. 그뤼네스 반트가 분단의 현장을 평화와 생명의 길로 바꾸었듯이, 언젠가 한반도의 DMZ도 평화와 공존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이번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필자는 평화는 누군가가 만들어 주는 결과가 아니라, 함께 걷고, 함께 기억하며, 함께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달았다. 독일이 보여 준 화해와 공존의 경험은 한반도의 미래를 향한 작은 희망이 되었다. 그뤼네스 반트에서 시작된 작은 발걸음이 언젠가 DMZ까지 이어져, 한반도에도 화해와 공존의 길이 열리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그날을 향한 우리의 걸음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감사의 말씀

이번 행사를 함께 준비하고 지원해 주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프랑크푸르트협의회, 주프랑크푸르트대한민국총영사관, 독일 환경•자연보호연맹(Bund für Umwelt und Naturschutz Deutschland e.V. BUND), 독독박물관 뫼들라로이트(Deutsch-Deutsches Museum Mödlareuth), 독한협회(Deutsch-Koreanische Gesellschaft e.V.), 그리고 그뤼네스 반트(Grünes Band) 관계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특히 행사 준비 과정에서 아낌없는 협조와 지원을 보내주신 주프랑크푸르트대한민국총영사관 차순우 영사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아울러 행사가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심한 준비와 따뜻한 환대로 함께해 준 독일 환경•자연보호연맹(Bund)의 크로이트츠 여사(Melanie Kreutz)와 가이펠 여사(Laura Geipel)의 헌신에도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한다.

무엇보다도 이번 평화겉기에 함께하며 평화의 의미를 나누고 독일 통일의 경험을 한반도의 미래와 연결해 준 모든 참가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1469호 14면, 2026년 8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