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김정애 마리에따 장례미사 엄숙히 거행

프랑크푸르트. 프랑크푸르트한국학교(교장 심은주)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인 고(故)김정애 마리에따 장례미사가 8월 7일(금) 12시 45분 프랑크푸르트 보켄하임 공원묘지(Bockenheim Friedhof)에서 프랑크푸르트한인천주교회 김준한 빈첸시오 주임신부의 주례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장례미사 후에는, 보켄하임 공원묘지 내 묘역으로 이동하여 안장예식이 거행되었다.

고인은 서울 진명여고를 마친 1963년 간호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독일로 건너왔다. 이후 1966년 에쎈에 있는 사회사업대학에서 사회사업과 상담 교육과정을 마치고 상담에 입문했다.

같은 해 독일 주교회의의 위탁으로 정식 한국인 상담소가 프라이부르크에서 문을 열게 됐으며 이는 독일 사회복지회(카리타스) 산하 독일 청소년사회복지회가 주선했다. 그 후 프랑크푸르트를 비롯해 쾰른, 베를린, 아헨, 에쎈, 뮌헨, 하노버, 슈투트가르트, 함부르크, 마인츠 등의 도시에 차례로 한국인 상담소가 문을 열었다.

상담을 처음 맡은 것은 1970년 10월. 트렁크 하나 들고 독일에 도착한 교포 1세대가 하나, 둘 저 세상으로 떠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들을 저세상에 편안히 갈 수 있게 해주는 사후처리도 그녀 업무 중 하나가 됐다. 이렇게 체류연장, 노동허가연장, 구직, 결혼, 애정문제, 정신질환 문제 등 교민들의 애환을 함께하며 밤낮으로 많은 일을 했다.

고인은 독일에서 사회복지사로 40년 가까이 궂은일과 기쁜일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일처럼 열정을 바쳐왔다.

한편 고인은 이국땅에서 어려움에 빠진 한국교포를 상대로 ‘한국의 집’이란 상담소를 운영하며, 많은 어려움에 처한 동포들의 딱한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내 형제나 자매의 일처럼 성심을 다해 해결사 역할을 했다.

2005년 9월 프랑크푸르트 카리타스를 정년퇴임한 고인은 이후에도 열정적으로 사회사업을 펼치며 프랑크푸르트 시와 사회복지재단인 카리타스 협회에서 위촉받아 명예사회복지사로서 천직의 끈을 놓지 않았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동포들과 함께하며, 타국에서 세상을 떠난 분들의 장례와 사후 절차를 정성껏 도우며 마지막 길까지 외롭지 않도록 함께하였다. 고인은 밤늦은 시간에도, 새벽에도 도움이 필요하다는 연락이 오면 언제든 달려갔다. 그렇게 정년퇴작 이후에도 동포들의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을 함께하며 진정한 이웃으로 살아왔다.

고인은 또한 부모들이 일하는 동안 아이들이 우리말과 우리 문화를 잊지 않기를 바라며 1976년 프랑크푸르트한국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역임하며 오늘날의 프랑크푸르트한국학교 발전의 주춧돌을 놓았다.

고인은 지난 7월 16일(목) 오후 7시 34분, 향년 83세로 소천하였다.

가족으로는 월드옥타 프랑크푸르트 지회장을 역임한 부군 곽문환씨와 딸 진영, 아들 준영씨가 있다. (편집실)


사랑하는 엄마께

엄마,
엄마에게 편지를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그런데 이렇게 첫 편지가 엄마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지.
오늘은 엄마를 보내드리는 날이지만, 엄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용기를 내어 이 편지를 읽어 보려고 해.
엄마를 생각하면 가장 많이 그리워 하는게 엄마의 품이야. 세상에서 엄마 품만큼 따뜻하고 편안한 곳은 없었던 것 같아.
엄마를 생각하면 환하게 웃던 모습과 노래 부르던 목소리가 떠올라.
엄마는 우리에게 사랑을 말 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줬지.
항상 사람의 좋은 모습을 먼저 보려고 했고, 누구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어.
힘든 사람, 아픈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고.
사랑과 포용, 따뜻한 마음.
아빠가 엄격하실 때도 엄마는 늘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 주셨고, 아빠를 이해하라고 말씀해 주셨어.
엄마 덕분에 나는 사람을 쉽게 판단하기보다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어.
나이가 들수록 엄마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점점 더 알게 돼.
젊은 나이에 독일에 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교민들을 위해 평생 일하면서도 우리를 키우고, 아빠의 사업까지 함께 도왔잖아.
솔직히 지금도 ‘엄마가 그걸 어떻게 다 해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엄마가 너무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워.
그런데도 엄마는 늘 겸손했어.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하지 않았고, 인정받으려고 하지도 않았지.
엄마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었는지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아.
엄마 덕분에 나는 일이 성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걸 배우게 되었어.
마음을 다해 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엄마를 보며 배웠고. 그래서 엄마는 평생 내 인생의 가장 큰 Vorbild이야.
엄마는 병이 찾아온 뒤에도 끝까지 엄마다웠어. 불평하기보다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했고, 우리에게 짐이 되고 싶어 하지 않았지.
오히려 우리를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어.
엄마는 어떤 어려움이 와도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어.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담담하게 받아들였지. 그런 엄마의 믿음은 나에게도 큰 힘이 되었고, 지금도 나를 붙잡아 주고 있어.
엄마는 끝까지 참 강한 사람이었어.
세 달 전 내 결혼식 때 엄마가 함께 있어 준 것은 가장 큰 축복이었어.
그날 내가 “엄마, 나 결혼했어.“ 라고 말했을 때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으셨지.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정말이야?’라고 하신 것 같기도 해.
하지만 나는 알고 있어.
희정이도 친 딸처럼 예뻐 했고 아껴 주셨다는 것을.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너무 큰 행복이야.
엄마,
엄마에 대해 이런 마음을 가진 건 나뿐만이 아니야. 준영이도 분명히 같은 마음일 거야.
엄마가 우리를 그렇게 키워 주셨으니까.
사람을 따뜻하게 대하는 마음도,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마음도,
힘든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마음도,
모두 엄마에게서 배운 것이야.
엄마가 내 엄마라는 것이 정말 자랑스러워.
그리고 엄마를 생각하면 절대 잊지 못할 것이 하나 더 있어.
엄마는 마지막까지도 “sowieso…“라는 독일말을 정말 자주 썼지.
앞으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날 것 같아.
아마 웃으면서도 많이 그리워할 거야.
많은 사람들은 엄마를 훌륭한 사회복지사로, 교민 사회를 위해 헌신한 사람으로 기억할 거야. Caritas 에서 같이
일했던 Kollegin이 그저께 그러더라: „Sie war nicht nur für die koreanische Gemeinde, sondern auch für uns eine Pionierin.“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엄마를 나의 엄마였다는 이유만으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해.
엄마,
정말 많이 사랑해.
정말 많이 고마워.
엄마가 우리에게 보여 준 사랑과 포용, 따뜻한 마음은 앞으로도 우리 안에서 계속 살아갈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하늘에서 아빠도 잘 지켜봐 줘세요.
이제는 아프지 말고, 하느님 품에서 편히 쉬세요.
사랑해요, 엄마.
Wir sehen uns „sowieso“.

딸 곽진영

1470호 12면, 2026년 8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