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본(Bonn): 로마에서 독일연방공화국까지, 2천년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도시

1989년, 본(Bonn)은 도시 창립 2000주년을 기념했다. 이는 기원전 12년에 라인강에 최초의 로마 군사 요새가 세워진 것을 기념한 것이다.
서독의 수도로 잘 알려진 라인강변의 도시 본(Bonn).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2천년 가까운 역사의 자취들이 살아 숨 쉬는 본의 참 모습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본은 쾰른처럼 거대한 대성당이 도시를 압도하는 것도 아니고, 프랑크푸르트처럼 현대적인 고층빌딩이 도시의 이미지를 규정하는 것도 아니다. 베를린처럼 독일 역사의 거대한 사건들이 한눈에 펼쳐지는 도시도 아니다.
그러나 본은 로마제국의 흔적과 중세 교회의 종소리, 쾰른 선제후의 화려한 궁정문화, 베토벤의 음악,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의 수도로서, 민주주의를 만들어간 정치사의 흔적이 서로 다른 시대의 지층처럼 포개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번 역사산책에서는 서독 수소 이전의 본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한다

왜 본(Bonn)인가?

작은 도시처럼 보이지만, 본은 결코 작은 역사를 가진 도시가 아니다.

오히려 본은 독일의 역사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고대 로마에서 시작해 중세의 종교도시를 거쳐 근대의 문화도시로 성장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뜻밖에도 새로운 독일 국가의 임시 수도가 되었다. 그리고 통일 이후 수도의 지위를 베를린에 넘겨주었지만, 오늘날에도 국제적인 정치·문화·학술도시로서 독특한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본의 역사를 걷는다는 것은 한 도시의 역사를 걷는 것이면서 동시에 독일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해왔는지를 살펴보는 일이기도 하다.

로마군의 주둔지에서 시작된 도시

본의 역사를 이야기하려면 먼저 로마제국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라인강은 고대 유럽에서 단순한 강이 아니었다. 로마제국에게 라인강은 제국의 경계를 이루는 중요한 전략선이었다. 로마군은 라인강을 따라 군사기지를 건설했고, 본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본의 이름은 ‘Castra Bonnensia’였다.

오늘날 본의 중심부에서 볼 수 있는 평화로운 도시 풍경만 보면 이곳이 한때 거대한 로마 군사기지였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은 본의 땅 아래에 로마시대의 도시와 군사시설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본의 북쪽 지역에는 로마군의 대규모 군사기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군인과 상인, 장인과 가족들이 모여들면서 군사기지는 점차 하나의 생활공간으로 발전했다.

이처럼 본의 도시적 출발에는 로마제국의 군사적 필요가 자리하고 있었다. 라인강이라는 자연적 경계와 로마제국의 군사전략이 만나면서 만들어진 도시였던 것이다.

본은 라인강과 함께 성장했고, 라인강은 오랫동안 이 도시의 경제와 정치, 문화적 방향을 결정했다.

중세, 종교가 도시의 중심이 되다

로마제국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게르만 부족들이 라인강 주변에서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면서 본 역시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

중세에 들어서면서 본의 성격을 결정한 것은 군사력보다 종교였다. 특히 본은 쾰른 대주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했다. 중세 독일에서 교회는 단순한 종교기관이 아니었다. 정치와 행정, 교육과 문화의 중심이기도 했다.

본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 바로 오늘날의 본 대성당(Bonner Münster)이다.

본 대성당은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건축물로, 도시의 종교적 중심이자 역사적 상징이었다. 성당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시장이 형성되면서 본의 도시 구조도 점차 모습을 갖추어갔다.

본 구시가지를 걷다 보면 유난히 많은 교회와 성당, 수도원 관련 흔적을 만나게 된다. 오랫동안 이 도시의 삶 자체가 기독교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중세의 본에서는 교회의 종소리가 하루의 시간을 알렸고, 종교행렬은 도시의 중요한 행사가 되었으며, 성인과 순교자에 대한 숭배는 시민들의 생활 속에 자리했다.

그중에서도 본 대성당의 터를 지키고 있는 성 카시우스(St. Cassius)와 성 플로렌티우스(St. Florentius) 에 석상에는 본의 기독교 역사에서 관한 중요한 전승을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에 본 대성당과 주변의 역사적 건물들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중세 본의 시민들이 세상을 바라보던 방식과 그들의 신앙, 사회질서를 보여주는 역사적 공간인 것ㅇ이다.

쾰른 선제후의 도시가 되다

본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근세에 찾아왔다.

1288년 보링겐(Worringen) 전투의 결과는 도시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쾰른의 선제후(Kurfürsten)들은 브뤼엘(Brühl), 포펠스도르프(Poppelsdorf)와 함께 본을 거처로 삼았고, 결국 1597년 본을 공식 거주지로 지정했다. 17세기와 18세기에 이들이 건축한 화려한 궁전은 도시에 바로크 시대의 화려함을 더했다.

이 시기에 본의 도시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다. 군사적 도시와 종교도시의 성격 위에 궁정문화가 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18세기에 이르러 본은 화려한 궁정도시로 변모했다. 쾰른 선제후들은 본에 궁전과 정원을 조성하고 음악가와 예술가, 학자들을 불러들였다. 오늘날 본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바로크 건축물과 궁정 정원은 바로 이 시기의 유산이다.

그 대표적인 건축물이 선제후궁(Kurfürstliches Schloss)이다. 오늘날 이 건물은 본대학교의 중심 공간 가운데 하나로 사용되고 있다. 과거 선제후의 권력을 상징했던 건물이 시간이 흐른 뒤 대학이라는 학문의 공간으로 변한 것이다.

베토벤을 낳은 도시

본의 문화적 위상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이다. 1770년 본에서 태어난 베토벤은 어린 시절을 이 도시에서 보냈고, 훗날 빈으로 떠나 유럽 음악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베토벤은 본에서 생애 대부분을 보낸 인물은 아니다. 그의 음악적 전성기는 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본은 오늘날까지 자신을 ‘베토벤의 도시’로 기억하고 있다.

그 이유는 베토벤에게 본이 단순한 출생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본은 베토벤이 음악가로 성장하기 시작한 장소였으며, 그의 어린 시절과 가족, 음악교육의 기억이 남아 있는 공간이다.

오늘날 본을 찾는 방문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 가운데 하나가 베토벤하우스다. 베토벤이 태어난 집은 음악가의 개인사를 넘어 본이라는 도시가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어떻게 만들어왔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본의 거리에서 베토벤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공연장과 음악제, 박물관과 기념공간이 베토벤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본은 단순히 위대한 작곡가가 태어난 도시가 아니라, 베토벤이라는 인물을 통해 음악과 문화의 도시라는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만들어온 도시다.

프랑스 혁명과 새로운 시대

그러나 본의 역사가 언제나 평화롭고 우아했던 것은 아니다.

18세기 말 유럽을 뒤흔든 프랑스 혁명의 파도는 라인강까지 밀려왔다.

1794년 10월 8일, 프랑스군이 본을 점령하면서 이 시기는 막을 내렸다. 이어진 약 20년간은 나폴레옹 휘하 프랑스군의 점령 시기였다. 식량, 의복, 숙소에 대한 군수 징발과 선제후국 정부 기능의 상실은 인구의 약 20% 감소를 초래했고, 시민들의 삶은 궁핍해졌다. 프랑스는 시민법전과 지방자치 제도를 도입했으며, 직물 산업을 중심으로 한 중대형 산업체들이 본에 정착했다. 또한 체계적인 세속화 정책을 추진하여, 선제후가 소유한 종교적 재산은 국가 소유로 이전되었다. 현재 본의 동부 지역인 빌리히(Vilich)는 나사우-우징겐(Nassau-Usingen) 공에게, 오버카셀은 프랑스 위성국인 베르크 공국에 속했다. 1801년 2월 9일 뤼네빌(Lunéville) 조약에 따라 라인강은 프랑스의 동부 국경이 되었고, 본은 신설된 라인-모젤(Rhein-Mosel) 주의 하위 행정청으로 지정되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고,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1814년 1월, 프랑스는 본을 철수했다.

1815년 빈 회의 결정에 따라 본은 프로이센령이 되었다. 이후 수십 년간 본은 1818년 10월 18일,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재설립된 대학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 대학의 설립자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였으며, 프랑스 점령 당시 폐쇄된 본의 이전 대학과는 다른 새로운 기관이었다.

베를린과 브레슬라우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과 함께 체계적으로 설립된 이 대학은 “라인대학교(Rheinische Universität)”라는 명칭을 통해 자매 대학으로 간주되었다. 이후 100년 동안, 이 대학은 호엔촐레른 왕가의 왕자들이 선호하는 대학이 되었고, ‘왕자들의 대학(Prinzenuniversität)’이라 불렸다.

본 공화국이라는 이름

1949년부터 1990년까지의 서독 시대를 독일에서는 흔히 ‘본 공화국(Bonner Republik)’이라고 부른다.

이 표현에는 단순히 정부가 본에 있었다는 의미 이상의 역사적 기억이 담겨 있다.

본에서 서독은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의 틀을 만들어갔다. 나치 독재라는 참혹한 경험을 뒤로하고 기본법(Grundgesetz)에 기초한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의회민주주의와 연방주의, 헌법재판제도, 정당정치와 언론의 자유 등이 새로운 국가의 틀을 이루었다. 본은 이 모든 과정의 배경이 된 도시였다.

1990년 독일 통일은 본의 운명을 다시 바꾸었다.

통일된 독일의 수도는 결국 베를린으로 결정되었다. 1991년 연방의회는 수도와 정부 소재지를 베를린으로 이전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 정부기관과 정치인들이 점차 베를린으로 이동하면서 본은 더 이상 독일의 정치적 수도가 아니게 되었다.

본은 새로운 역할을 찾아 나섰다. 연방정부의 일부 기관이 본에 계속 남았고, 국제기구와 기업, 대학과 연구기관이 자리 잡았다. 특히 유엔 관련 기관들이 본에 들어서면서 도시는 국제협력과 환경, 지속가능한 발전을 상징하는 도시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1475호 22면, 2026년 9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