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선택한 여성들

“60년 전 그날, 달빛이 환하게 비추던 고향의 그 밤을 기억합니다. 달빛 아래 청춘이었던 저는 계절의 끝을 지나 노년이 되었습니다.내가 이 글을 남기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잊지 말아 달라는 마음을 조용히 공책에 남겨두고 싶어서입니다.”

-극 중 일숙의 대사-

60년 전, 고국을 떠났던 파독 간호사들의 삶과 꿈을 그린 연극 [베를린 천사의 일기]가 9월 8일 독일 베를린 무대에 올랐다. 이 연극은 총 5막으로 이루어진 다큐멘터리물이다. 하지만 사실적 내러티브에 그치지 않고 몽환적 분위기에 퍼포먼스적 요소를 가미했다.

평소 책을 좋아하고 일기를 쓰는 일숙을 중심으로, 다섯 명의 파독 간호사들이 청춘의 꿈을 이야기한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모두 자신의 꿈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노래로 환자를 위로하는 착한 선자, 아름다운 사랑을 갈구한 애경, 열심히 공부해 의사가 된 학심, 무용수를 꿈꾼 흥 많은 흥자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에 동서독 분단 당시 동독을 탈출해 발레리나를 꿈꿨던 독일 간호사 카타리나의 서사가 더해진다. 다소 딱딱하고 거만한 독일 간호사는 한인 간호사들에게 또다른‘낯섬’으로 다가오지만 결국 여성과 노동이라는 현장에서 하나가 된다.

고향에서 독일로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의 이야기도 아릿한 향수를 불러온다. 하지만 작품은 이별의 아픔에만 머물진 않는다. 병동에서 독일 환자들과 겪는 에피소드, 파독광부 창수와의 로맨스, 병동 기숙사의 고사리 해프닝 등 일상 속 해학을 유쾌하게 풀어냈다.

고향, 향수가 담긴 일기의 마지막은 우리 모두에게 떠나왔던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과거의 자신 혹은 어떤 꿈일 수도 있다.

파독 간호사 애경과 파독광부 애경의 결혼식에 주례로 즉흥연기한 주독일대사관 박영서 총영사는 연극에 대한 소회를 SNS에 남겼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한 반세기 이전에 우리 모두가 함께 공유한 고된 삶과 희망에 대한 서사인데, 연극에 몰입하게 되면 그분들이 바로 나의 부모님, 누님, 형님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진한 애틋함이 느껴집니다.”

독일인들에게 ‘코리안 엔젤’로 불린 파독 간호사들은 전쟁 후 피폐해진 독일병동에서 훈훈한 온기를 주는 존재였지만 개인적 삶에서는 주체적이고 전사적인 여성들이었다.

이번 공연은 한독문학공간 주최로, 독일 베를린에서 활동 중인 파독간호사 연극단 <빨간구두>와 충북 옥천의, 극단 <향수>의 협력공연으로 진행되었다.

이 작품을 쓰고 연출한 박경란 작가는 “평균 80세의 파독 간호사들이 열연해, 그들이 육성으로 남긴 역사기록입니다. 살아왔고, 살고, 살아가고, 사라질 이들에 대한 기억의 전승과 계보죠. 이 연극 <베를린 천사의 일기>의 존재 이유입니다”라고 언급했다.

공연 입장권은 올리기 일 주일 전부터 매진이었다. 공연홀은 30분 전부터 북적였고 막바지 무더위로 사우나를 방불케 했다. 그럼에도 울고 웃느라 70분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고 후일담이 전해졌다. 특히 젊은 2세대와 독일인들의 관심도 뜨거워 객석은 세대와 국가간 벽이 허물어지는 소통의 기회였다.

이 연극은 그 시절 가난과 궁핍으로 떠나왔다는 명제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파독 간호사 역사는 자신의 꿈을 향해 용기있게 낯선 땅을 향했던 능동적인 여성들의 이야기로 기록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번 연극에 관심과 응원을 아끼지 않으신 관객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한편 이 작품은 옥천 전국연극제에 초대되어 10월 3일 내한공연으로 이어진다.

출연배우: 김금선, 조송자, 박화자, 이묵순, 최복님, 김헌숙, 정유선, 김진복, 우베 뮌쇼, 신수연, 김초순, 김은경, 김준용

기사 제공: 한독문학공간

1475호 12면, 2026년 9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