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
1989년, 본(Bonn)은 도시 창립 2000주년을 기념했다. 이는 기원전 12년에 라인강에 최초의 로마 군사 요새가 세워진 것을 기념한 것이다.
서독의 수도로 잘 알려진 라인강변의 도시 본(Bonn).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2천년 가까운 역사의 자취들이 살아 숨 쉬는 본의 참 모습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본은 쾰른처럼 거대한 대성당이 도시를 압도하는 것도 아니고, 프랑크푸르트처럼 현대적인 고층빌딩이 도시의 이미지를 규정하는 것도 아니다. 베를린처럼 독일 역사의 거대한 사건들이 한눈에 펼쳐지는 도시도 아니다.
그러나 본은 로마제국의 흔적과 중세 교회의 종소리, 쾰른 선제후의 화려한 궁정문화, 베토벤의 음악,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의 수도로서, 민주주의를 만들어간 정치사의 흔적이 서로 다른 시대의 지층처럼 포개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 시장광장(Marktplatz)에서
본의 시장광장(Marktplatz)은 11세기 무렵부터 형성된 상업 취락을 바탕으로 발전했다. 당시 본은 라인강을 따라 이어지는 교통망과 지역 간 이동로에 자리해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시장은 이러한 입지적 이점을 바탕으로 도시의 경제와 사회생활이 만나는 중심지가 되었다.
중세 유럽에서 시장광장은 도시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장소였다. 농민들은 주변 지역에서 생산한 곡물과 농산물을 가져왔고, 수공업자와 상인들은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팔았다. 시민들은 장을 보는 동시에 소식을 나누고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과 교류했다. 시장은 경제활동의 공간이면서 정보가 오가고 공동체의 관계가 형성되는 사회적 무대이기도 했다.
본의 시장광장도 이러한 전통 속에서 성장했다. 광장 주변에는 상점과 여관, 주거 건물들이 들어섰고, 시민 행정과 관련된 활동도 이곳에 집중되었다. 시장광장은 단순히 상품을 거래하는 장소를 넘어 도시의 공적인 삶이 펼쳐지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광장의 형태는 대체로 삼각형에 가깝다. 한쪽 끝에는 화려한 바로크·로코코 양식의 구시청사가 자리하고, 중앙부에는 오벨리스크를 닮은 시장 분수가 서 있다. 주변 건물들은 시대마다 증축과 개조를 거쳤지만, 광장이라는 도시 공간의 기본적인 역할은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구시청사(Altes Rathaus) — 권력과 시민을 연결한 계단
시장광장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건물은 단연 본 구시청사다. 연한 분홍빛 외벽과 대칭적인 창문, 우아한 장식, 넓은 외부 계단이 어우러져 광장에 독특한 분위기를 만든다. 이 건물은 본의 행정사뿐 아니라 도시의 정치적·문화적 역사를 상징하는 장소다.
현재의 구시청사가 세워진 배경에는 17세기 말의 파괴가 있었다. 본은 팔츠왕위계승 전쟁시기인 1689년 포위전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전 시청사도 포격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기존 건물을 충분히 복구하지 못한 상황에서 새로운 시청사 건립의 필요성이 커졌다.
새 시청사의 초석은 1737년 4월 24일, 쾰른 선제후 클레멘스 아우구스트(Clemens August)의 주관으로 놓였다. 설계는 선제후 궁정 건축가 미셸 르빌리(Michel Leveilly)가 맡았다. 건축은 1737~1738년에 진행되었지만, 재정 문제로 외관의 완성은 1779년까지 늦어졌다. 건물의 설계에는 브륄의 아우구스투스부르크 궁전에서 볼 수 있는 궁정 건축의 미적 취향이 반영되었다.
– 로코코 양식이 보여주는 도시의 위상
로코코는 바로크의 장중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섬세한 장식과 우아한 비례, 세련된 외관을 강조한 양식이다. 본 구시청사의 외관은 이러한 시대적 취향을 잘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이 건물이 궁전이 아니라 시민 행정의 중심인 시청사였다는 사실이다. 당시 본은 쾰른 선제후의 거점 도시였고, 선제후의 정치적 위상은 도시의 건축과 의례에도 영향을 미쳤다. 시청사는 행정기관인 동시에 도시의 격식과 위신을 외부에 드러내는 상징적 건축물이었다.
건물의 정면을 바라보면 넓은 계단이 시선을 끈다. 이 계단은 단순히 건물 안팎을 연결하는 통로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이 광장에 모인 시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연설했던 공적인 무대 역할도 하였다.
한편 구청사 앞 광장은 자유에 대한 열망이 표출된 장소이기도 하다.
1794년 프랑스 혁명군이 본을 점령한 뒤에는 시청사 앞에 자유의 나무(Freiheitsbaum)가 세워졌다. 자유의 나무는 당시 유럽에서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표식이었다. 일반적으로 나무를 세우고 그 위에 깃발이나 혁명 모자를 장식했으며, 때로는 시민들이 그 주위에 모여 노래하고 춤추는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본의 자유의 나무에도 이러한 상징이 담겨 있었다. 나무에는 혁명기의 삼색기와 자코뱅 모자가 장식되었다. 자유의 나무는 단순한 조경물이 아니라 기존의 통치 질서가 끝나고 새로운 정치적 원칙이 등장했음을 알리는 공개적인 선언이었다.
1848년 3월혁명 당시에도 시청사 계단은 정치적 열망이 표출되는 무대가 되었다. 당시 독일의 자유와 통일을 상징하던 흑·적·금색 깃발이 이곳에서 등장했다.
또한 구시청사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도 남아 있다. 1944년 10월 공습으로 구시청사는 외벽만 남을 정도로 불탔고, 전후 복구를 거쳐 1950년에 재건되었다. 2010~2011년에는 대대적인 보수공사도 진행되었다.
본이 1949년 서독의 수도가 되면서 구시청사는 새로운 역사적 역할을 맡았다. 테오도어 호이스 초대 연방대통령은 1949년 9월 12일 이곳에서 시민들 앞에 섰다.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1962)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1963),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1965),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1989) 등 세계의 주요 인사들도 본을 방문했을 때 이곳에서 시민들에게 인사했다.
오늘날 구시청사는 과거의 행정 중심지라는 역할을 넘어 본의 역사와 시민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이곳의 계단은 선제후 시대의 권위, 혁명기의 자유에 대한 열망, 전후 민주주의 국가의 외교적 상징성을 차례로 품어 왔다.
오벨리스크라 불리는 시장 분수(Marktfontaine)
광장 한가운데로 시선을 돌리면 가늘고 길게 솟아오른 기념비적 구조물을 발견하게 된다. 시장 분수(Marktfontaine)로 불리는 이 시설은 오벨리스크를 연상시키는 형태 때문에 현지인들에게 흔히 ‘오벨리스크’라고도 불린다.
이 분수는 1777년 쾰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Maximilian Friedrich)의 명령으로 세워졌다. 시민들이 건립 비용을 부담했으며, 분수에는 통치자를 기리는 문구가 새겨졌다. 과거 꼭대기에는 쾰른 선제후의 지위를 상징하는 선제후 모자가 장식되어 있었지만, 프랑스 점령기에 훼손된 뒤 다시 설치되지 않았다.
이 작은 분수는 당시의 정치적 질서를 생각하게 한다. 물을 공급하고 광장의 경관을 꾸미는 시설이면서 동시에 통치자의 권위를 드러내는 기념물이기도 했다. 특히 시민들이 건립 비용을 부담했다는 사실은 공공시설의 편익과 통치 권력의 상징성이 한데 얽혀 있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분수는 과거의 정치적 상징을 그대로 전달하기보다 광장의 역사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요소로 남아 있다. 구시청사의 화려한 외관과 오벨리스크의 수직적인 형태가 서로 마주하면서, 시장광장은 건축과 기념물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 된다.
책을 태운 광장에서 책을 기억하는 광장으로
시장광장을 탐방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 바로 구시청사 앞 광장 바닥에 설치된 나치 시대 분서(焚書) 추모기념물이다. 화려한 시청사와 분수에 시선을 빼앗기기 쉽지만, 광장 바닥을 자세히 살펴보면 작은 청동 책들이 곳곳에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기념물은 1933년 5월 10일 나치 정권의 사상 탄압 과정에서 벌어진 책 소각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당시 독일 여러 대학 도시에서는 나치 이념에 맞지 않는다고 규정된 작가와 지식인들의 책이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본에서도 학생들과 나치 지지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책 소각이 이루어졌다.
오늘날 광장 바닥에 설치된 청동 책들은 이러한 역사적 폭력을 되새기게 한다. 기념물은 2013년 5월 10일, 분서 사건 80주년을 맞아 공개되었다. 예술가 안드레아스 크니츠(Andreas Knitz)와 호르스트 호이젤(Horst Hoheisel)이 참여한 기념물에는 모두 60개의 청동 책이 사용되었다. 책의 등 부분에는 당시 불태워진 책들의 제목과 작가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청동 책들은 광장 바닥에 흩어져 있다가 구시청사 계단 앞쪽으로 갈수록 한곳에 모이는 형태를 취한다. 바로 그곳이 과거 책들이 불태워졌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기념물에는 땅속에 설치된 책 보관함도 있다. 매년 5월 10일을 전후해 추모행사가 열리면 보관함을 열어 박해받았던 작가들의 작품을 낭독하고, 책을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행사가 진행된다. 책을 불태웠던 장소에서 다시 책을 읽고 나누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시장광장은 이제 상품이 거래되는 장소인 동시에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되새기는 공간이 되었다.
엠 회트헨(Em Höttche)과 슈테른호텔(Sternhotel)
광장 주변을 둘러보다 보면 오래된 여관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역사적인 음식점으로 알려진 엠 회트헨(Em Höttche)이다.
이곳은 14세기 말인 138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역사를 지닌 여관으로 알려져 있다. 시장광장이 상업과 교류의 중심지였던 만큼, 여관은 여행자와 상인, 지역 주민이 만나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였다.
중세와 근세의 여관은 오늘날의 식당과는 다른 역할도 했다. 먼 길을 이동한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지역의 소식을 전달하며, 상업과 정치에 관한 정보가 오가는 공간이었다. 시장과 여관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도시의 경제적 활력을 뒷받침했다.
엠 회트헨과 관련해 특히 주목할 만한 사건은 1583년 2월 2일이다. 당시 쾰른 선제후 게브하르트 트루흐제스 폰 발트부르크(Gebhard Truchsess von Waldburg)가 아그네스 폰 만스펠트(Agnes von Mansfeld)와 결혼식을 올린 장소로 전해진다. 이 결혼은 종교와 권력의 갈등이 얽힌 쾰른 전쟁의 발발 배경 가운데 하나로 거론된다.
당시 쾰른 선제후는 세속적인 통치권뿐 아니라 가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로서의 지위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선제후의 혼인과 종교적 선택은 개인적인 문제에 머물지 않았다. 종교개혁 이후 신앙과 정치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대에 통치자의 종교적 입장은 영토의 정치적 운명과도 연결되었다.
한편 구 시청사 맞은편 근처에 위치한 슈테른호텔(Sternhotel)은 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적 숙박시설 중 하나입니다. 젊은 시절의 베토벤이 음악적 교류를 나누거나 연회를 즐겼던 장소이며, 1853년 클라라 슈만과 연주자들이 로베르트 슈만의 작품을 처음 선보였던 문화적 연원의 깊은 곳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광장 주변의 여관 하나에도 유럽 종교와 문화 등의 복잡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역사적인 건물을 마주할 때 외관과 연식만 살펴보는 대신, 그곳에서 어떤 사람들이 만났으며 어떤 사건들이 논의되었는지를 상상해 보면 도시 산책탐방의 깊이가 달라진다.
1480호 22면, 2026년 10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