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해로(HeRo) 특별 연재 – 위기 속 꽃피는 힘

해로 (Kultursensible Altenhilfe HeRo e.V)

2015년에 시작된 HeRo(해로)는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늙어가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코멘트에서 출발했다. 해답은 늘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이국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도움활동의 필요성으로 귀결되었다. <해로>의 입술로 연재를 시작하지만,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재독 동포들의 목소리를 그릇에 담으려 한다. 이 글이 고단한 삶의 여정을 걷는 이들에게 도움의 입구가 되길 바란다(필자 주)

3회 /위기 속 꽃피는 힘

밤새 안녕하셨어요?

다소 고전적인 인사법이 요즘 상황에 잘 어울린다. 집안의 빗장을 잠그고 동면에 들어간 것처럼 고요하다. 벗과 함께 차 한 잔을 마주하던 소담스러움도 지금은 사치다. 밤새 무고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의든 타의든 불가항력적인 소통의 차단 속에서, 이웃간 일상의 평범한 안부 조차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햇빛 한 줌도 양보하지 않고 웃통을 벗어제꼈던 독일인들의 모습은 추억의 한 장면 속으로 사라졌다. 마트에 들어선 시민들은 경계의 눈빛으로 자신의 구입품목을 체크하며 서둘러 공간을 빠져나간다. 거리에 행인들은, 사람이 지뢰라도 된 양 이리저리 피해다닌다. 전 세계를 순식간에 삼켜버린 코로나의 모습이다. 지금껏 어느 테마로도 세계가 하나의 공감대와 통일을 이루어내지 못했건만, 코로나가 단번에 이루어낸 웃지못할 사건이다. 세계의 관심은 코로나 예방과 대책에 혈안이 되어 있다. 여기엔 강대국과 약소국의 차별도 없다. 재앙이 내려진 곳은 어김없이 생명을 담보로 내놓아야 한다. 현대사회의 거대 축이었던 자본과 경제질서도 속수무책이다. 의료업계가 내놓은 확진자의 숫자도, 늘어가는 사망자의 숫자를 듣는 것도 이젠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코로나 전쟁터에서 죽어간 병사를 두고 무참히 떠나야 하는 현실도 개탄스럽다. 누구나 한 번 가는 죽음의 길이라지만 떠나는 길이 참 허망하고 허허롭다.

독일은 연속 확진자와 사망자가 증가하고 있다. 선진 의료기술을 자랑하는 독일이지만 사선을 관장하는 하나님의 의지 속에선 인간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다. 특히 면역성이 낮거나 기저질환자 혹은 노령인구 등에 전염률이 강하다는 점은 인간을 더 나약함의 동굴로 밀어넣는다.

독일인구의 60%가 코로나에 감염될 것이라는 의료계의 예측은 부풀린 풍선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하지만 증가속도를 보자 가능성에 대해 고개가 끄덕여진다. 결국 단순 공포심에서 탈피해 살아 있는 현실세계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게 했다. 지금 이 순간도 홀로 울고 있는 연약한 자들에 대한 마음 시선 때문이다.

사단법인 <해로/ 봉지은 대표>도 활동의 제약을 받았다. 코로나로 인해 환우 방문이 제한되었고, 봉사자 스스로의 안위도 소홀해선 안되었다. 모두가 확률적으로 코로나의 불화살을 맞을 가능성은 농후했다. 호스피스 환우봉사는 물론, 일상생활 자원봉사 또한 코로나 앞에서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위기의 순간에 발휘되는 것이 도움의 힘이라는 것을 해로팀들은 알고 있었다. 찬서리를 맞고 피운 꽃들은 더 화사하고 아름다운 법이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바람에 흩날리는 동안 절정을 이루는 매화처럼 과정 속에서 누군가의 꽃이 된다면 좋을 것 같았다.

독일은 통상 요양급여 해당자들의 경우 매달 40유로에 달하는 보조용품(Pflegehilfsmittel)을 지급받을 권리가 있다. <해로>는 봉지은 대표를 중심으로, 이러한 환우들을 위해 대신 신청 서류를 도와드리고 코로나 예방에 필요한 손세정제와 바닥세정제 등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와 함께 별도로 세정제와 티슈 등을 지원받아 필요한 어르신들에게 직접 나눠드리는 일을 하고 있다. 특히 지원한 자원봉사를 통해 어르신 장보기 도움활동을 연계했다. 거동이 불편해 집밖으로 나서기 힘든 이들에게 장보기 도움은 가장 실질적인 체감활동이다.

그간 해로에서는 일상생활 자원봉사자 수요 증가로 인해 자원봉사자 지속교육을 계획했다. 3월 말부터 진행하려 했던 일상생활 자원봉사자 2기 교육도 자연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도 교육 커리큘럼 기획과 강의, 강사 섭외 등 숙제들이 남아 있었다. 효율적인 자원봉사자 관리와 교육내용도 연구해야 할 부분이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재앙과도 같은 위기 앞에 의기소침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잠시 멈추어 보니 코로나는 우리 인생에 잠시 시간의 속도를 조절하는 브레이크라는 생각이 든다. 주춤거리며 해로의 지난 5년을 뒤돌아보아 반추의 시간을 가져야 할 때라는 것도 잊지 않게 했다. 다음 전진을 위한 호흡 가다듬기의 시간이라는 것도.

새삼 고난의 그림자 속에 빛이 있음을 알게 된다. 빛은 그림자 속에서 힘을 확장하고 종국에는 그림자를 밀어낸다. 외롭고 연약한 이들에겐 작은 희망을, 위기의 시간을 걷는 이들에겐 잠깐 쉼을 통해 새로운 뷰포인트가 열리길 기대한다. 그리고 제발 이 재난이 잠깐이길 바라면서 간절함에 두 손을 모은다.

박경란/ 사단법인 <해로> 일반 자원봉사팀장(후원문의:info@heroberlin.de)

2020년 4월 10일, 1166호 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