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공항의 눈물(1)

정안야( 재독한국문인회 제 8대 회장)

1973년 일행을 독일로 실어 나를 비행기가 활주로에 떡하니 서 있었다. 김포공항 로비 한쪽에서 그들은 작별의 슬픔과 기회의 땅이 될지도 모른다는 설렘이 뒤범벅되어 뒤숭숭하기만 했다. 그들 틈에 현순도 끼어 있었다.

현순은 거센 현실에 부딪혀 살아가야만 하기에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져 손에든 23킬로그램짜리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짐 모으는 곳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뒤를 돌아보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눈물인지 콧물인지 범벅이 되어 돌아서야만 했다. 많은 사람의 곡성이 울려 퍼졌다.

현순은 메는 가슴을 부둥켜안고 힘없는 발걸음으로 여권심사를 거쳐 출국장 안 복도를 걸어 들어갔다. 복도에서 밖으로 내려다볼 수 있기에 창밖 아래로 눈을 돌려보았다. 아래에는 비행장 직원이 양쪽으로 펼쳐진 날개 앞에 서서 빨리 오라고 손짓하며 안내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탑승할 수 있도록 비행기에 계단을 달아놓았다. 현순은 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이제는 정말 가족과 고국을 떠나가야만 하는 것인가, 하고 실감하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일자리를 찾아 선진국인 독일로 간다는 꿈을 안고 기쁜 맘으로 선택했으나 막상 가족을 떠나려는 이별은 가혹했다.

일행은 훌쩍거리며 가득 비행기 탑에 올랐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왜 떠나가야만 하는 것일까? 누군가 엄마, 하고 부르는 소리에 모두 울음보가 터져 나왔다. 비행하는 동안 기내는 시끌벅적했다.

현순은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제각기 남모를 사연들을 얼마나 안고 있을까, 궁금증이 났다. 대부분 처녀인데 제법 나이가 든 기혼녀도 몇 사람 볼 수 있었다. 나이 든 분 중에도 애 띄게 보이는 30대 초반인 사람도 있었다.

제각기 사연이 있었겠지, 24시간 비행하는 긴 시간 동안 같이 앉아 서로가 독일로 오게 된 각자의 동기를 처음 인사를 나눈다.

“저는 현순입니다.”

“네, 그러세요. 저는 계순이예요. 집은 서울이고 종합병원에 근무하다가 외국 가는 기회가 생겼으니 돈도 벌고 공부도 좀 할까 해서 갑니다.”

“저도 광주에서 살고 종합병원에서 근무했으나 동생들 세 명 학비와 부모님들 고생하시는데 보탬이 되어야 하기에 갑니다.”

현순은 말을 하면서 목이 메 얘기를 끊어야 했다.

계속 우는 사람도 있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독일까지 비행시간은 24시간이 걸렸다. 비행 도중 기름을 넣기 위해 알래스카에서 착륙하는 동안 간호요원들은 내려서 한 시간 기다려야만 했다.

현순은 처음 타 보는 비행기 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먹은 음식들이 속이 니글니글하였는데 다행히도 알래스카 비행장 안에서 한 시간 머물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마침 공항 안에 우동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멸칫국물 냄새가 멀리서부터 코에 솔솔 들어왔다. 사람이 많아 한참 줄을 서야 했다. 현순 차례가 돌아오기까지 15분 정도 걸렸다. 우동 면은 철사 망에 넣어 끓는 물에 잠시 넣었다가 들어내 뜨거운 멸치국물을 부어서 채소 몇 가지를 얹어주는데 꿀맛 같았다.

“아이, 속 시원한 맛! 너무 좋아!”

누군가 말하자 입에서 군침이 돌아 빨리 먹고 싶은데 줄이 길어 차례가 빨리 돌아오지 않아 초조했다. 마침 현순 차례가 되어 한 그릇 받아들고 국물부터 후루룩 마시고 면을 건져 먹었다. 정말 맛있게 먹었다.

모두 한 그릇씩 뚝 딱 먹어 치우고 나니깐 혈색들이 돌아왔다. 채소를 데쳐놓은 것처럼 맥없이 처진 것 같았는데 니글니글 한 속을 채우고 난 후 모두 기운이 나서 남은 시간 공항 안을 돌아다니며 구경하였다.

호화찬란했다. 사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가난한 나라에서 살다가 멋있는 것을 보니까 기가 막혀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

비행기에 기름을 넣고 난 후 시간이 되어 다시 탑승하였다. 오랜 시간을 비행하는 동안 멀미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구 끝에서 끝인 독일까지는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독일 쾰른에 도착하니 다음 날 늦은 오후였다. 비행장에서 내려 검문을 마치고 나오니까 병원 간호원장과 한국 간호요원 노 여사가 함께 마중을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장에서부터 각처로 보낼 명단을 가지고 이름을 부르며 여러 버스로 갈라서 태웠다. 제각기 모두 해당하는 버스를 타고 다섯 시간 동안 달려오면서 기혼자였든 한국 간호요원 노 여사가 김밥을 한 줄씩 나누어 주었다. 노 여사는 자그마한 체구에 나이가 꾀 많은 보조간호요원이었다. 노 여사는 우리에게 인사소개를 하였다. 오랜 시간 동안 비행 중에 한식을 못 먹어 속이 니글거렸지요? 하면서 정성 들여 만들어 온 김밥을 나누어 주었다. 뜻밖에 김밥을 받으니 너무나 고마웠다. 꿀맛이었다.

버스 안 다음 옆자리에 같이 앉았던 사람들에게도 서로 어느 도시에서 왔는지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가 처음으로 이름을 교환하고 반가워하며 마치 전부터 아는 사람처럼 친근감을 느꼈다. 버스를 타고 계속 북쪽으로 오면서 군데군데 작은 도시에 몇 사람씩 내려주면 기다리고 있던 독일 간호요원이 데려가고 계순이도 중도에 배치되어 내렸다. 나머지 열세 명은 마지막으로 함부르크 인근 병원으로 들어갔다. 버스가 들어가는 병원 안은 숲이 우거지고 잔디로 가지런히 깔려있었으며 걸어갈 수 있는 잔디밭 좁은 옆길을 걸을 수 있도록 질서정연한 모습이 아름다웠다. 주위에 서 있는 나무들은 세찬 바람을 막아주듯 나무 사이로 꽃봉오리 맺혀 피어날 듯 싱싱하게 보였다. 현순 일행은 촌닭처럼 눈이 어리둥절해져 기쁨에 찬 모습들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제법 쌀쌀함을 느끼며 뭐 이른 날씨가 있어? 하고 중얼거렸다. 약간 비를 맞고 기숙사 문 앞에 다가와 간호원장과 함께 기숙사 이 층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너무나 질서정연하고 아름답고 멋있는 나라구나, 바로 여기가 파라다이스구나. 현순은 그 시절 상상도 할 수 없던 곳이다. 삭막했던 한국의 모습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요, 그러네요, 모두 흐뭇함을 느꼈다.

간호원장은 한국 International 간호사가 온다고 좋아하며 기숙사에 새로운 가구까지 넣어 모두 독방을 주었다. 간호원장은 대략 주의할 것과 급히 알아야 할 사항 몇 가지의 말을 남기고 방 배치를 하고 난 후 잘 쉬어요, 하고 밖으로 사라졌다. 각자 방으로 가 짐을 풀었다.

짐을 풀은 후 부엌으로 모여들었다. 많은 사람이 앉아 식사하도록 큰 식탁과 의자들이 있고 깨끗하고 아주 넓은 공간이었다. 서로 자기소개를 하고 금방 친구처럼 가족처럼 되어버렸다. 떠들썩하게 얘기를 펼쳐놓고 웃기도 울기도 하였다. 꽃다운 이십 대 봉오리들이 겪어야 하는 타향살이의 길을 왜 선택해야만 했든가, 하고 하소연했다. 기혼녀들이 두고 온 자식들을 생각하며 울자 모두 따라 울었다.

기혼녀는 나이순으로 숙자, 애숙, 미정, 세 사람이었다. 애숙은 부부가 공무원으로 가정을 꾸렸는데 남편이 사업을 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 애숙이 빚 얻어 준 것을 남편이 사기를 당했다. 남편은 무기력하고 빚 갚을 일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또 두 자식을 쳐다보면서 삼 년만 고생하면 일어설 수 있다면서 결심을 다지고 이곳에 왔다. 숙자는 입을 꽉 다물고 훌쩍거리기만 했다.

울음이 가라앉자 이곳에 오게 된 동기를 한 마디씩 늘어놓았다. 처녀들은 가지각색의 관심으로 외국의 환상도 갖고 돈도 벌어 가정에 보탬이 되고 형제들 대학공부 시키는데 부모님들 고생도 면해주고픈 심정으로 왔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호기심에 차서 모두 밖의 모습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궁금했다. 간호사들이 모두 밖의 정원으로 함께 걸어 나갔다. 맑은 공기에 주위는 큰 나무들과 색색 가지 봄의 아름다운 미모를 제각기 자랑하듯 눈길을 끌었다. 언제 비가 왔을까 할 정도로 하늘은 말끔히 파랗고 제법 흰 구름이 둥둥 떠 있었다. 주위에는 짙푸른 녹음이 우거져 있는 넓은 벌판 같았다. 잔디 위는 가지런히 잘 정리되었다.

기혼녀 셋을 제외하고 나머지 열 명 중 한 사람인 경희는 친언니 경숙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간호조무사로 이곳 병원에 일 년 전에 와 있었다. 경희도 이곳에 오게 되면서 자매가 같은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둘의 근무처는 달랐다. 경숙과 네 살 터울 아래인 경희는 간호전문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사가 되었다. 둘은 자매지만 얼굴이 너무나 닮지 않았고 성격도 너무 달랐다.

“너희는 자매인데 어찌 그리 안 닮았니?”

숙자가 농담처럼 말했다. 자매는 빙그레 웃기만 했다. 두 사람은 조용한 편이었다. 경희는 말수가 적었는데 무언지 모르게 남다른 표정을 지었다.

매일 근무 후 기숙사로 모여들었다. 파김치가 되어 캡을 벗어 옆에 놓아두고 병원에서 당했던 일 들을 욕설과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현순은 그네들과 같이 휴식을 하는 방에서 커피를 잔에 담아 식탁 위에 얹어놓고 담배를 끄집어내 뻐끔뻐끔 피우기 시작했다. 환자 방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꼼작 안 하고 앉아 있으니 독일 간호사가 현순이 를 쳐다보았다. 현순도 쳐다보면서 그냥 있으니까 할 수 없이 독일 간호사가 눈을 흘기며 일어나 환자 방으로 갔다. 현순은 마음속으로 그래, 너희들이 그러면 나도 같이해볼게 하는 마음으로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나는 절대 못하지.”

경희가 말하자 숙자가 나무랐다.

“너는 그러니까 당하는 거야, 현순처럼 그렇게 해봐. 매일 고된 일을 반복하는 것이 얼마나 힘드니?”

새벽 6시부터 시작하여 오후 1시에 기숙사로 돌아와 쉬다가 다시 오후 4시부터 8시까지 일을 했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 시간을 한 시간씩 빼고도 하루 10시간씩 일을 하고 나면 아무리 젊다고 하나 다리가 퉁퉁 부었다. 나이가 든 사람들은 더욱 힘들어 한탄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국에서 삼 개월 동안 독일어 교육을 취득하고 온 덕분에 겨우 인사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언어가 부족한 관계로 많은 고충과 자존심에 상처를 무척 받게 되었다. 좋은 수간호사를 만난 병동은 심하지가 않을 뿐 비슷했다. 언어로 인해 무시당할 때마다 하루빨리 계약 끝나면 돌아가야지 하는 마음뿐이었다. 현순은 빨리 날짜가 지나가고 자유가 될 수 있는 삼 년을 기다리기만 했다. 부지런히 저축해 가며 아껴서 살았다.

하필 경희의 근무처가 다른 병동보다 유달리 심했는지, 경희 자체가 약간 이상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근무 후 유독 불만을 많이 쏟아냈다. 욕을 실컷 하고 난 후 속이 다소 후련해지면 음악도 틀고 음식도 만들었다.

대부분 이십 대 초반의 나이였다. 부모 슬하에서 따뜻한 보살핌과 애지중지 속에서 자란 딸들이 세상 물정이 어떻게 돌아가며 얼마나 야박한 세상인지를 어찌 알 것인가.

부모 아래에서도 힘들게 지내왔지만, 경희는 가족이 보고파 괴로워하며 우는 날도 많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외롭고 쓸쓸할 때는 산책을 나섰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가슴을 펴고 걷노라면 짙푸른 잎 새들이 바람에 팔랑팔랑 흔들거리며 반겨주었다.

경희가 일하는 병실의 수간호사가 전쟁미망인인지 결혼도 못 했는지 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였다. 얼굴은 주먹만 하고 몸 덩치는 컸다. 기분파인지 시시때때로 웃거나 소리 지르거나 한다. 히스테리 같이 보였다.

어느 날 경희에게 물통과 솔, 아타 비누를 주면서 말했다.

“두 사람이 환자 침대도 갈아주고 환자 방에 있는 세면대를 씻어.”

“왜 간호사가 청소해야 하는가?”

경희는 간호사로서 이럴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못 하겠다고 대들었다.

수간호사는 발을 방방 뛰며 복도가 떠내려가듯이 경희, 하고 불렀다. 파랗고 큰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가서 빨리 일을 시작해.”

경희는 병동에서 나와 분노를 참지 못해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버릴까 하는 마음도 가졌다. 그러나 삼 년 계약이 되어있는데 맘대로 갈 수도 없었다. 돌아갈 비행기 비도 없고 이런 시련을 극복해야만 한다 하고 생각하지만, 한국 간호사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경희는 사전 약속도 없이 마구잡이로 간호원장을 찾아갔다. 경희는 들어가면서 가슴이 두근거림을 참고 손짓 발짓하며 울면서 설명을 했다. 수간호사와 같이 일 할 수가 없다, 이렇게 사람을 무시하는 수간호사를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말했다.

간호원장이 말했다.

“그 수간호사가 병원 전체 안에서도 이름난 별난 여자라고 소문이 자자하며 독일 간호 요원들도 못 견디어 병동도 바꾸곤 해. 자리를 바꿔줄게 걱정하지 마.”

경희는 너무 고마웠다. 이후로도 독일 간호사들과 충돌이 생기면 간호원장을 찾아가 어려움을 표현했다. 간호원장은 말을 이해한 것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잘 알았다는 듯이 위로해 주었다.

그 이후 병동의 수간호사는 간호원장으로부터 몇 마디 쓴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표정이 약간 달라지며 조금 친절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두 달 뒤 다른 병동으로 옮겨 준다고 한 간호원장의 약속은 한 달 미뤄지기는 했지만, 삼 개월 후 경희는 병동을 옮기게 되었다. 가슴에 맺힌 화가 어느새 수그러졌다. 근무처가 다행히 기숙사 옆에 있어서 편리하고 좋았다.

일을 하면서 환자들에게서 듣고 대충 간단히 말을 배웠다. 에피소드가 많이 생겼다. 독일어를 터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근무 중 일 주에 2시간씩 독일어 수업이 있었다. 근무가 힘드니까 수업 간다면서 병동을 나와 기숙사로 들어오는 사람도 생겼다. 두 시간 동안 방에서 쉬고 수업하고 돌아온 것처럼 했다. 수간호사를 속였던 것이다. 마음속으로 삼 년 지나면 집으로 돌아갈 것인데 독일어를 배워서 뭘 해! 하고 배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일하면서 환자들로부터 겨우 듣고 배운 말이 오죽했겠는가. 그래도 눈치가 빠르고 재치가 있는 한국 사람들이 아닌가.

경희와 현순은 시간이 나면 병원을 빠져 나와 언덕을 끼고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요리조리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맑은 시냇물은 유유히 흐르고 유리알처럼 비치는 흐르는 물길을 바라본다. 잔잔한 미꾸라지들이 꼬리를 흔들며 제각기 즐기고 동료들과 헤엄치고 놀고 있다. 그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오면 상쾌하고 하루의 스트레스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기숙사로 돌아오면 공동 식당의 큰 공간이 있었다. 들어와 캡을 벗어놓고 가운도 갈아입지 않은 채 모여앉아 병동에서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예! 너는 오늘 어때서야? 괜찮았니? 하고 묻고 대답했다. 얘기하면서 깔깔거리고 웃기도 하는가 하면 울기도 했다. 한동안 야단법석이 난 것처럼 소동을 부리고 많은 것을 가슴에 삭히고 있어 신경성으로 위궤양도 생기고 밤중에 위경련이 일어나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했다. 일터는 꽤 외지에 있는 병원이었다.

2020년 4월 17일, 1167호 14-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