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바람 찬바람에 (2)

유완숙

(지난호에서 이어집니다.)

나는 한국을 오가며 옛날 친구들을 만난다. 우리가 머무는 언니 집에서 가까운 강남대로에 있는 파리 빵집이나 근사한 친구 아파트에서 옛날처럼 떠들고 웃으면 우리는 모두 옛날로 돌아가 즐겁기만 하다. 언제나 꿈같이 그리워하는 나의 젊은 날의 별 같은 친구이다.

함부르크에는 우리가 이곳으로 이사 오자마자 대사관에 물어 한국사회단체에서 알게 된 친구들이 있다. 그리운 한국 이야기를 한국말로 할 수 있어 제일 반가웠다. 애들이 어렸을 땐 애들을 데리고, 지금같이 애들이 집에 없으면 우리끼리 만난다. 40년 동안 알고 지나면 서로 잘 알고 이제 정이 많이 들었다. 이중에는 간호보조원으로 온 사람도 꽤 있었는데 일을 하면서 독일간호학교를 다녀 정식 간호사가 된 사람도 많고,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해서 의사나 심리학자가 된 사람도 있다. 이들은 집사정이 어려워 한국에서 공부를 못한 것뿐이지 여러모로 똑똑하기는 대학 나온 사람과 별로 다를 게 없는 것을 나는 날이 갈수록 느꼈다. 이들은 또 모두 한독 부부라 우리하고 화학이 잘 맞는다.

대부분의 독일주부들은 부지런하기가 개미 같다. 집안을 깨끗이 정리하고 꽃밭을 가꾸고 주말이면 식구들을 위해서 케이크를 굽고 하는 반면 사이사이 운동을 하고 밤에도 Volksschule 라는 학교에 가서 무얼 배우기도 하며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내말은 한국 주부들이 게으르다는 말이 아니라 나는 한국에서 이런 일을 배우지 않고 학교공부만 하다가 이곳으로 오게 되어 큰집을 깨끗이 정리하고 정원까지 손질 하는 것이 무척 힘이 들었다. 나는 그 사람들과 사귀며 곁눈으로 보고 묻기도 하며 시어머니한테 다 못 배운 젊은 사람들의 생활습관과 운동을 통해 건강유지를 하는 것 집안을 멋있게 꾸미는 것 등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이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겨 Volksschule 에 가서 맛있는 한국음식 잡채, 불고기, 김치, 갈비찜, 만두, 가지나물, 호박전 등등 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고 동시에 사람들 앞에 서서 떳떳이 이야기 하는 것도 배웠다. 그때도 마침 엄마가 우리 집에 와 계셔 한국 요리에 대해 여러 가지 많이 물어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이젠 우리 집도 정리가 잘되어 있고 누가와도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다.

우리아이들이 딴 도시에 작장을 얻어 집을 나가서 살고 있을 때 나는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중국전통의학을 공부했다. 독일에서는 중국의학을 배워서 인정을 받으려면 자연요법사가 되어야 했고 자연요법사가 되려면 서양 전통의학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내 나이가 오십여섯 이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중국 전통의학과 서양 전통의학을 밑바침하는 자연요법도 같이 배웠다. 3년 반이 걸려 전통중국의학 침술의 Diplom을 받고 자연요법사(Heilpraktiker)가 되어 이제는 아이들이 두고 간 이층 방에 침방을 채려 놓고 10년이 넘게 환자를 보고 있다. 어디 통증이 있거나 고질병이 있는 사람이 진통제만 복용하다가 침을 맞으면 점점 나아지는 경우가 생각 외로 많다. 거의 대부분이 낫는다고 할 수 있다. 한사람을 낮게 해주면 두 세 사람이 소문을 듣고 왔다. 간호사였던 나는 중국 의학의 이론이 상상외로 재미있었고 그 오랜 옛날에 이런 것을 연구한 중국 의사들을 깊이 감탄한다.

자연요법사 시험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남편과 이곳 친구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나를 격려해 주었다. 너무 어려울 땐 괜히 시작했다는 생각도 몇 번 했다.

제일 어려웠던 것은 25장을 써야하는 논문이나 나이가 들은 탓에 외웠던 것을 자꾸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시험마다 따르는 한국에서 해보지 않은 구두시험 이었다. 구두시험에는 맞은 대답을 조리 있게 병의 해설, 원인, 치료방법, 간호 합병증 그 외 주의사항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때 나는 이 세상에 있는 병이라는 병은 다 배운 것 같다. 간호과를 다닌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안경을 낀 무섭게 생긴 의사 시험관이 마치 나를 떨어뜨릴려고 하는 것 같이 많은 질문을 했다. 그래도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달달 떨리는 손을 책상 밑에 숨기고 질문의 80%를 달성해 시험에 합격했다. 논문은 한국에 나가 수지침 개인교수를 받으며 수지침에 대해 썼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내 인생에 마지막 시험이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합격한 날 시내에서 남편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가 같이 저녁을 먹고 못 마시는 술도 한잔 마시고 희희낙락해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기뻐서 동네친구들을 초대해서 잔치도 하고 음양 과 오행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7년 전에 함부르크에 살던 딸 식구도 우리 동네에 집을 지어 이사를 왔다. 직장도 가깝고 문화시설이 많은 도시가 좋다고 하더니 아이가 생기자마자 우리 동네에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독일에서는 저축한 돈이 조금만 있으면 집짓는 돈을 은행에서 빌리고 오래오래 빚을 갚으며 자기 집에서 살 수 있다. 우리도 그렇게 해서 집을 샀고 이제는 완전히 우리 집이 되었다. 딸 내외는 자기들이 클 때처럼 아이가 동네 애들과 넓은 곳에서 마음대로 놀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손자애가 벌써 두 살 때, 다니던 직장에 다시 나가기 위해 유아원과 회사를 뱅뱅 돌며 씩씩하게 일을 다니고, 사위도 밥하기, 장보기, 설거지, 다림질 등 가리지 않고 둘이서 척척 해가더니 인제 둘 다 제법 높은 자리에 앉아 일하고 있고. 우리 손자도 벌써 초등학생이 되었다. 가까이 살다보니 아기가 어릴 때는 도와줄 일이 많았다. 남편은 우리가 무슨 계획이 있어 시간이 잘 안 맞게 되면 인정사정없이 않된다고 한다. 나는 딸이 가까이 사는게 좋아 뭐든지 다 해주고 싶어 하면 남편은 그러지 말라고 한다. 자식과 부모라도 너무 서로 부담을 주면 좋지 않다는 것이 남편의 주장이다.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우리가 늙어도 너무 바라지 않아야 한다고 한다.

치과의사인 아들은 우리가 사는 곳에서 약 750 Km 떨어진 뮌헨에 살고 있는데 얼마 전에 손자가 두 살이 되었지만 코로나 때문에 가지 못한다. 3월초에 코로나가 시작 할 때 아들집에 가본 후 지금까지 만나지 못해 예쁘게 자라는 아기를 두 달이 넘게 보지 못했다. 그러나 큰 회사가 무너지고 많은 실업자가 생기는데 비하면 이건 문제도 아니다.

화상통화로 아침을 같이 먹으며 해피 버어스데이를 부르고 우편으로 보낸 선물도 펴보고 생일잔치를 했다. 이렇게 서로 볼 수 있고 생일잔치를 할 수 있게 하는 현대 기술 진보에 찬사를 보낸다. 빠이빠이를 하기 전에 아기가“ 아치바암 아치바암“하고 소리쳤다 아침바람이라는 소리다.

이 노래는 내가 어릴 때 엄마와 언니 오빠들이 무용을 하면서 나와 즐겁게 불렀던 노래이다.

아침바람은 내 가슴에 아득한 향수가 가득 차게 한다.

아침바람 찬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우리엄마 계신 곳에

엽서 한 장 써가지고

두리두리 말아서

우편국에 넣자!

우리 애들이 어릴 때 즐겨 불렀고 외손자도 얼마 전까지 이 노래를 좋아했다. 인제는 두 살이 된 친손자도 페이스 타임을 할 때 마다 나와 같이 이 노래를 부르며 무용을 한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 할 때 처음으로 우리 동네에 전기가 들어왔다. 약 65년 전인 것 같다. 저녁이면 석유 등잔불이나 호롱불을 키고 살던 우리에겐 큰 변화였다. 벽에 못을 치고 걸어 논 전구가 할머니의 안방을 눈부시게 빛나게 했다. 처음엔 너무 눈이 부셔 문종이로 싸보기도 했지만 너무 뜨거워져 종이가 타고 불이 날 뻔 하기도 했다. 저녁에 불을 켜고 국어책을 큰소리로 읽으면 할머니는 학교 들어 간지 일주일 만에 빨리 글자를 배웠다고 자랑스럽게 나를 칭찬 하시던 것이 생각난다. 그때를 생각 하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기술진보가 어디까지 가게 될지 궁금한 생각이 든다.

이제 독일도 코로나가 웬만큼 죽어 가는 것 같다고 하지만 아직 여기는 딸 식구가 와도 테라세에 앉아 거리를 두고 이야기를 하다 간다 가까이 사니 볼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시간이 많아 져서 지금 까지 우리정원을 이렇게 정성껏 가꾼 적이 없었다. 다행이 정부에서 철물점은 문을 열게 했다. 마치 사람들이 집에서 무엇을 수리 하거나 손일이라도 할 수 있게 한 것 같다. 여러 가지 필요한 물건을 사온 우리남편은 오래전부터 한다한다 하던 것을 정말로 했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스위치 하나만 눌려 우리정원의 나무들에게 지하에서 나오는 물을 뿌려주는 장식이다 우리 남편은 엔지니어라 그런 일을 잘한다. 비가 않 오면 물뿌리개나 호수를 들고 목마른 꽃나무에 물주는 일이 줄어 편안해 졌다.

인제 동백꽃도 져버리고 별같이 하얗게 빛나던 별목련 꽃잎도 하나 둘 떨어져 나무 밑에 쌓여있다 우리 정원에는 물망초 참꽃 작약 라일락 장미 수국 코스모스 국화 등 이름 모르는 꽃들이 서리가 내릴 때까지 피고진다.

정원 일을 할 때는 자주 할머니와 엄마가 정성껏 가꾸던 옛날 우리 집의 꽃밭과 채소밭을 생각한다 할머니는 주로 꽃밭을 가꾸었고 엄마는 채소밭을 가꾸었다.

우리가 뛰어놀던 사랑청 마당과 텃밭은 도장나무로 경계 되어 있었고 채소밭과 꽃밭 사이에 있는 조그만 길을 통해 화장실을 갔다. 그때는 우습게도 화장실을 통시라고 불렀다.

봉선화 꽃이 피면 나는 손톱에 물을 들이고 보라는 듯 손을 흔들었고 저녁에 엄마가 만든 향긋한 참기름 냄새가 나는 가지나물이 밥상에 오르면 우리는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먹어댔다. 여기서 그 생각이 나서 내가 아무리 애를 쓰도 그때 그 가지나물 맛이 나지 않는다.

우리 고향집에도 봄이 오는 듯 따듯한 햇살이 마루에 가득 찬다. 연분홍빛 살구꽃 이파리가 봄바람을 타고 눈처럼 내려와 앉는 우물가 작은 마당이 눈에 선하다.

봄이 가고 찌는 듯한 더위가 서서히 식으며 여름도 간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나뭇잎에 숨었던 파란 감이 하나 둘 불긋불긋 물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주홍색 빛나는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휘청하게 늘어진 감나무는 할머니의 자랑 이었다. 이때부터 할머니는 머슴을 시켜 감나무에 있는 감을 조심스럽게 따게 하셨다. 언제나 우리가 즐겨 세어보는 감나무는 12그루였고 감은 너무 많아 셀 수가 없었다. 하나같이 예쁘게 깎여 넓은 소쿠리에 진열된 감들은 아침엔 지붕 위나 장독대위로 올라가고 저녁엔 시원한 광으로 넣어졌다. 많고 많은 감들이 마르기 시작하고 하얀 분이 입혀지면 딱딱하고 떫던 감은 맛있는 곶감이 된다. 그때까지 감들은 몇날 며칠을 지붕이나 장독대위에서 광으로 오르락내리락 했다. 할머니가 계시던 위채 뒷마루에 있는 뒤주에 저장된 곶감은 제사 때나 수정과에도 쓰이지만 겨울이 되어 과일이 귀해지고 밤이 길어 우리가 뭘 먹고 싶어 하면 할머니는 언제나 곶감을 내어 주셨다.

마루에 앉아 정성 드려 감을 깎고 세고 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그립게 생각난다.

우리를 다독거려 주시고 엄마가 야단을 치면 언제나 우리 편이 되어 주시던 할머니는 우리형제와 엄마가 둘러싼 자리에서 아직도 우리 걱정을 하시며 엄마 손을 잡고 돌아가셨다.

할머니도 불쌍했다 아들을 잃은 그 슬픔이야 말할 수 있겠는가! 할머니도 역시 엄마처럼 아버지 없는 우리에 대한 의무감을 무겁게 어깨에 지고 사셨다. 엄마는 할머니가 큰언니와 작은 언니가 시집가는 것을 보시고 가셔서 참 다행이라고 했다.

어릴 때 나는 할머니와 엄마가 아버지 없이 힘들게 사시는 것은 알았지만 집안의 경제적인 문제는 잘 모르고 오빠들과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추수철이면 사랑 마당에 산더미같이 쌓여진 나락더미나 짚더미 위에서 저녁 먹으러 오라는 순이의 목소리가 커질 때까지 놀았고, 머슴들이 밭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우리도 소 구루마 위에 앉아 털걱거리는 구루마 장단에 마쳐 노래를 불렀다. 콩 불살이를 해먹어 시커먼 얼굴이 딴 애들 같아 보여 대문에 들어서는 우리에게 할머니는 „야가 누고“ 하시며 우리를 못 알아본 척 하시고 같이 웃었던 일도 생각이 난다. 그때는 우리보다 더 어려운 사람도 많아 할머니에게 딸을 맡기며 밥을 먹여주고 심부름이나 설거지를 시키라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부엌에서 일하는 순이가 그렇게 해서 우리 집에 있게 되었고 순이가 오기 전에 있었던 순자는 할머니가 옆 동네에 사는 농부 집에 중매하여 우리 집 앞마당에서 결혼식을 하던 것도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 우리 집 문간방에 아들과 사는 판수엄마도 방세를 내지 않고 우리집일을 도맡아 하면서 밥도 언제나 우리 집에서 먹었다. 농삿집이라 먹을 것은 그런대로 있었던 것 같다.

엄마는 우리가 국민학교를 졸업 하는 대로 곧장 대구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시험을 보게 해서 우리는 한명씩 창녕을 떠났다. 방학이 되면 불이 나게 집으로 몰려들어 집안은 시끄럽게 북석 거렸지만 학교가 시작하면: „집이 고만 적막강산 이다“ 하시며 할머니가 우리를 그리워 하셨다. 그때 큰언니는 벌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제일모직 여사원 시험에 합격해 회사 사택에서 다른 두 여사원과 살고 있었다. 주말에 우리 자취방을 찾아 올 때는 페티코트가 달린 치마 와 하이힐을 신은 깔끔하고 날씬한 모습이 마치 일류 배우같이 보여 언니와 길을 가면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혼자서 아름다운 백조가 된 미운오리새끼를 생각했다. 그때 언니는 경제적으로 열심히 엄마를 도왔다. 엄마가 농사철에 우리한테 못 오게 되면 주말에 와서 반찬도 해주고 우리용돈도 주었다. 가끔 우리가 옛날이야기를 하면 큰 오빠가 처음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언니가 운동화를 사줄 때까지 까만 교복에다 흰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다녔다는 말을 하고 우리는 배가 아프도록 웃을 때도 있고 내가 회사로 언니를 만나러 갔다가 수세식 화장실을 처음 보고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 그 위에 올라가 쪼그리고 앉아서 일을 보던 그런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를 웃고 웃고 또 웃게 한다. 언니는 내가 대학을 다닐 때도 애들과 시어머니를 모시고 빠듯하게 살았지만 나를 보기만 하면 파란 백원짜리를 주머니에 찔러 주었다.

(다음호에서 이어집니다.)

1193호 14-15면, 2020년 11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