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월아
반백년 또는 50년이란 세월이 감조차 잡히지 않고 닿지 못할 먼 세월로만 느껴지던 젊었던 시절이 엊그제 같건만 어느새 그보다 더 멀리 훌쩍 건너왔다. 서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센 물살에라도 떠내려 온 듯 어떨 떨 하다.
53년 전 고국의 모든 것이 몸에 배여 버린 가정과 학교교육을 모두 마치고 사회인이 되면서 고국을 등지고 멀리 멀리 여기로 왔다. 그러다 원치 않던 서양인이 된 삶은 몸에 밴 동양의 고국정서와 수시로 충돌 중이다.
전쟁 후에 일던 한국의 소용돌이, 거의 부족함을 모르고 지내오던 우리가족에게도 시련은 비켜가 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이 어느 날 풍비박산이 났다. 사춘기의 나이였기에 방황이 없지만은 않았지만 그럼에도 왠지 크게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근심 많던 부모님을 위해 형제자매들은 적응을 하는 척 했지 싶다. 적응을 안 할 도리도 없었다. 꼬여있던 가정형편에 등록금 등에 대한 자신이 없었기에 진학을 포기하려 했고 입시에서의 낙방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었다.
이때 늘 나를 챙겨주시던 고3 담임선생님이 추천한 국비장학 간호학생 모집에 지원했다. 누가 알았을까? 이 결정에 나의 운명이 웅크리고 있던 줄을.
나처럼, 대부분 3년을 기약하고 파독했던 재독한인 일세들은 운명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평생 고국을 등진 채 80세 전후의 나이에도 계획에 없던 재외동포로 살다 이국땅에 묻힌다.
삶은 늘 밝은 보름달도 가을에 주렁주렁 달린 보기 좋은 과일 같지만은 않다. 특히 재독한인 일세들의 순탄치 않던 낯선 환경은 심신에 멍이 들었던지 백세시대를 무색하게 서둘러 영원한 안식을 찾아 가신다.
올 여름, 영원한 이별을 해야 하는 슬픔이 연이어 있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내내는 영결식은 언제나 울음바다다. 고인들의 나이와 성격, 종교, 지나 온 삶의 발자취와 가정환경에 따라 조금은 다른 분위기. 가신 분들의 유언도 참작 되었을 줄 안다.
올해는 유난한 El Nino 현상의 영향과 기후재앙으로 인한 살인적 폭염과 난장판적 날씨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독일 역시 이상기후가 피해가지 않았고 햇살 찬란하던 초여름, 아끼는 후배의 딸이 하늘나라로 갔다. 젊었던 관계로 남녀노소 수많은 조객들이 작은 마을의 장례식장 안팎으로 매 꾸었다.
어린 아들이 피아노 연주곡에 울음 섞어 떠나는 엄마를 배웅 했다. 작별기도 식 후 영정사진을 들고, 공원묘지의 안장지로 가는 백골이 된 엄마 뒤를 따르는 아들 옆에는 두 철부지 여동생과 아빠가 함께했다. 고인의 엄마와 오빠가 남들의 병을 고쳐주는 의사이고 떠난 본인도 의사인데 정작 자신의 병은 치료하지 못한 설움과 어린 자녀들을 지켜보는 가족들과 조객들은 통곡했다.
8월 한여름,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여러 동문들 중에서도 유난히 파독 초창기부터 친동생이나 친구처럼 가까이 지내던 한해 아래 후배가 투병을 하다 기어이 떠났다.
좀은 독한 면이 있는 한인간호사들. 웬만큼 아파도 참고 대수롭지 않게 자가진단을 하며 가족들에게 아프단 말도 잘 안한다. 가능한 혼자 이겨내면서 어떻게든 가정을 위해 헌신한다.
이 동생도 남편과 딸 넷의 가정을 두루두루 거두는 일에 끝까지 진심을 다했다. 죽음은 늘 갑자기인 듯 당혹스럽기 마련이다. 후배도 처음 수술결과가 호전적이라 나름 민간요법 등으로 잘 완치되는 듯했는데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이방인의 외로움을 안고 갑작스레 가버려 아직도 멍하다. 역시 이 후배의 남편과 딸 넷 중, 두 딸이 의사인데 말이다.
하늘나라로 가기 이틀 전 심한통증으로 입원했고 온 가족이 병실에 모두 모였다. 후배는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모든 가족에게 일일이 당부와 작별인사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졸지에 뜨겁던 날 공원묘지예배당에서 작별을 고했다. 제단에 관을 모셔놓고 사위와 딸들이 차례로 단상에 올랐다. 장모님과 엄마의 일생 그리고 고인과의 얽힌 에피소드를 울며 웃으며, 중간 중간 고인이 좋아하던 노래에 버무려, 조객들에게 전해 주었다. 듣고 있던 조객들 역시 미소와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조객들은 제단 위 관속에 누워있는 고인과 개별적 작별인사를 했다.
고인은 평소에 본인의 죽음을 가능한 떠벌리지 말고 조용히 간소하게 치러주기를 바랐다. 따라서 자진해 찾아 온 고인의 많은 이웃들은 작별 후 조용히 헤어졌다. 멀리서 온 몇몇 친지와 친구들만 고인의 집으로 갔다. 후배는 늘 베풀며 살아왔고 언제든 누구든 아무리 많은 인원이라도 집으로 초대했었다.
NMC 동문들도 여러 번 그 집에서 며칠씩 먹고 자고 놀며 시끌벅적한 동문회를 치렀다. 집과 정원이 크기도 했지만 가능한 한 직접 장만한 음식을 대접하며 분위기를 띄우는 장인이었다.
딸들도 엄마의 본을 받아 집에서 준비한 커피와 쿠켄으로 조객을 맞이하여 고인에 대한 훈훈한 뒷담을 나누게 했다. 얼마 후 백골이 되어 되돌아 온 후배는 조용한 숲속묘지에서 가족들의 슬픔과 사랑을 받으며 마지막 작별을 하고 안장되었다.
후배의 영결식이 있던 날, 재독한인사회의 큰 어른신이 떠나신 소식을 접했다. 고인은 독일사회와 한인사회에서 두루 존경을 받으시던 분이셨다. 마을성당의 크기에 비해 명성만큼이나 조객들이 많았다.
고인은 63년간 독일에 사신 재독한인사회의 역사이시다. 실력자이시며 인격자이신 고인은 일생을 영예와 영웅적 멋진 삶을 사시며 누구에게서나 존경과 환영을 받으셨다. 독일 체육계뿐 아니라 한인사회에도 언제 어디서든 든든한 힘이 되어 주셨기 때문일 거다.
필자 또한 여러 해를 모시고 대외활동을 하며 존경심을 배제할 수 없었다. 고인만큼 말없이 묵묵히 명예 인으로써 여기저기 가리지 않고 힘이 되어주시던 분이 재독한인사회에는 드물다. 고인을 잃은 재독한인사회는 분명히 큰 상실감이 앞서지만 가시는 길이 평화롭고 행복하고 가신 곳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는 마음 담아 “안녕히~” 라고 인사드린다.
이 모든 남은 가족들의 슬픔은 시간이 치유해 주기를 바란다. 스쳐가는 시간 속에는 분명히 고인의 덕망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있을 줄 믿는다.
이렇게 몇 장례식을 연이어 다녀오니 나 또한 ‘언제가 될지는 알 수는 없지만 멀지 않아 다가 올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한다는 준비는 고작 대학노트 한권을 구입해서 숨을 거두면 황망해 할 가족들이 알면 도움이 될 것들을 생각 날 때마다 수시로 적어 놓는 거다. 중요한 서류는 어디에 있고, 핸드폰이나 컴퓨터, 은행계좌 등의 비밀번호와 죽음을 알려야 할 몇 군데의 전화번호와 주소 등을 적어 놓는다.
부부가 동시에 사고를 당했을 경우에 대비해 자녀들을 위해 손 글씨로 작성한 유언장도 있지만 하도 오래되어 새로 작성해야지 하면서 벼루고만 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의사 결정을 할 수 없어졌을 상황에 대비해 독일 법에 따른 의료 위임장과(Gesetzliche Betreuung und Vorsorgevollmacht) 사전 의료지시서(Patientenverfuegung)에 자녀들과 함께 서명을 해 두었다. 주위에서 갑자기 의식상태가 온전하지 못한 경우를 보아 온 탓일 터이다. 딸들에게도 만약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적어놓은 이 노트가 어디에 있으니 만약에라도 당황하지 말고 참고 하라고 일러두었다.
가끔 농담 반 진담 반 “내가 죽으면 이러 쿵 저러 쿵~~~” 하고 말을 하면 딸들도 농담 섞어 “모두 적어 놓으라.” 며 웃는다. 그리고 “나는 장례식 절차를 이러저러 하게 하면 좋을 것 같다만 살아 있는 사람들 마음편한 것이 더 중요하니 마지막 결정은 너희들이 하라‘ 고 하면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우리들 마음을 젤 편하게 하는 게 아닌감!‘ 라고 딸들은 능청을 떤다.
1475호 16면, 2026년 9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