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에 대하여

손병원

오늘 일정은 늦게 시작되기에 낮잠을 한숨 잔만큼이나 기운을 더해 팔팔하게 다닐 것 같다.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의 하루 평균 승객 이용률은 대략 50여만 명으로 추산한다. 승하차의 분주한 이동은 약간의 긴장감과 설렘임이 겹치면서 여행이 시작된다. 플랫폼에 줄줄이 길게 늘어선 열차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담은 승객들을 기다린다. 직장인들 학생들 여행객들이 물고기 헤엄치듯 총총걸음으로 빠져 걷는다.

누구에게는 반가운 만남이고 누구에게는 가슴 저린 이별일 수도 있다. 반가움은 환한 기쁨으로 나누고 이별의 슬픔은 님의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한 줄기 바람인 양 지나치고 머무는 시간은 추억이 된다. 무릇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만큼만 보고 자기 그릇만큼만 세상을 본다. 담을 수 있고 갈무리할 수 있는 능력으로 여행의 질은 달라진다.

어느 여행지에선 갑자기 어떤 감성이 일어나 첫눈처럼 마음이 부푼다. 높은 산에 오르면 신선 같은 객기로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뭔가 도움 되는 길을 열어준다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나. 야생화 만개한 넓은 벌판 앞에 선 화가가 되어 화폭 속에 변치 않는 내 말을 그려 놓아야 하는데. 파도치는 바닷가를 거닐며 수평선 너머의 얘기도 해야지. 음악당 연주회의 지휘자라면 나는 예술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감동을 쏟아부어야지.

나의 욕심은 끝이 없으나 행복한 고민이다. 나 스스로 배우고 깨치는 즐거움이 덤이기도 하다. 내가 한 평생 잘살았다는 화두가 분명하면 남들에게 직간접으로 도움 되는 일이어서 이는 세상살이에 연결된다. 너와 내가 함께 우리가 된다.

서로 사랑하나 그것이 이웃에 대한 사랑인 줄 모르고, 남을 속이지 아니했으니 스스로가 정직한 사람으로 착각하고, 성실하게 사나 성실한 데 대하여 아는 바 없고, 서로 주고받으나 그것이 베푸는 삶인 줄 모르고 살면 세상이 헛헛하다. 비 오고 찬바람 불면 짜증난다. 우주가 사람 위해 있는 건 아니다. 눈 오고 비 오기는 우주 입장으로는 우주 현상이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주의 창조에 자연스럽게 동참하는 것이 삶이니 창조는 인간에 의해 계속되어야 한다.

창조주의 도구는 남을 위한 도구로 간다. 서로 다른 것이 창조의 의미이니 기복적으로 기도하는 게 아니라 역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노력 여하에 따라 하늘에서 이뤄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이뤄진다면 주기도문이 멋지다. 창조주가 나에게 생명을 준 것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나?

그 이상은 자기 욕심이다. 바다를 메워도 사람 욕심은 다 못 채운다. 믿는다고 하면서 행치 아니하면 그건 말씀 도둑놈이다. 종교는 인간이 만든 정의 도덕이나 윤리관을 인정하나? 말로 제사 지내면 온 동네가 먹고 남는다.

고로 나는 항상 뭉게구름 같은 꿈을 내 나름대로 키운다. 꿈은 늙지 않는다. 우람한 나무나 다소곳한 화초라도 때에 따라 피우는 꽃이나 잎새는 항상 향기롭고 싱싱하다. “이 나이에….” 하며 현실을 핑계 대며 스스로 쪼그라든다. 인생에 도움이 되는 여러 분야를 배우고 알게 되면 그동안의 나의 부족을 부끄러워하여 절로 겸손을 배운다. 배운 것들을 남들에게 선사할 수도 있다.

나는 책을 든 사람을 제일 무서워한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것은 미리 깨친 이들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 내용은 후세 사람들에게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 보다 일찍 각성시켜준다. 독서는 지식의 재료이다. 나는 청소년 시절 단 카스터의 ’정신력의 기적’을 읽고 큰 힘을 얻었다. 작가는 20대 시절 불의의 사고로 휠체어를 타면서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쏟아냈다.

무덥던 한여름의 흔적은 점차 지워지고 성큼 가을이 다가와 가을바람으로 머문다. 공기가 일렁이면 바람이 되고 마음이 생기면 뜻 의지가 되어 행동으로 나타난다. 인생은 자기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젊을 때는 지식으로 살고, 나이 들면 지혜로 살아야 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에서 구슬은 지식이고 꿰는 방법은 지혜이다. 말하는 것은 지식이요 듣는 것은 지혜이다. ‘김 안 나는 숭늉이 더 뜨거운 것’처럼 몰라서 듣기만 한다고 무시하면 자기 오만이다.

나이 들면 곳곳에서 병이 기다리고 있어 불안감과 초조함에 밀려 자기도 모르게 실수를 자주 하게 된다. 칼은 몸을 베이지만 말은 마음을 벤다. 나이 들수록 말수를 줄이고 귀를 열어야 한다. 누구나 나이 들면 자기가 살아온 삶에 애착이 강해 남 얘기는 안 듣고 자기 말만 계속하고 변화를 두려워한다.

편안함은 늪과 같다. 푸른 산은 푸른빛을 내듯이 친구도 잘 가려야 한다. 담는 그릇이 나쁘면 술에서 냄새가 난다. 그 사람이 누군가를 알고 싶으면 어울리는 친구를 보면 된다. 대체로 친구는 길동무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친구라면 그늘에서 지적해주고 남 앞에서는 칭찬해줘야 한다.

자신이 옳다고 믿으니 거리낌이 없다는 게 더 무섭다. 힘이 있으면 명분이 따라오고 명분이 있으면 어떤 짓도 정당화되는 현실이 한국에서 자행된다. 정통(보수)은 믿는 나름의 정의를 위해 진보(좌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뛴다. 가치가 값으로 환치된다. 악마는 세부 사항에서 드러난다. 말 언어는 이치의 표현 수단이지 꼭 맞는 게 아니다. 불입문자도 있다.

사람은 급할 때이나 배고프면 무엇이라도 하고 바탕이 드러난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 몸에 편하게 뱄다고 쉽게 넘어가면 자충수에 걸린다. 인생이란 불충분한 전제로부터 충분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기술이다. 천리마도 뛰어야 천리마이다. 의심함으로써 진리에 도달한다. 이루게 된다. 성공이란 원하는 것을 얻은 것이고 행복이란 얻은 것을 즐기는 것이다.

가난하지만 행복하다는 얘긴 답답하다. 굳이 정신적 행복감이라 해 줄까? 가난해도 행복할 수는 있으나 가난하기에 행복할 수는 없다. 우물이 마르기 전까지는 물의 가치를 모르듯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업신여기면 안된다. 철저히 이용해야 한다.

물은 수증기로 얼음으로 변한다. 사물의 본체를 못 보고 자기 이익을 기준 삼아 그 현상만 본다. 변한 것은 원래 성질로 돌아온다. 바탕과 원칙의 중요성을 항상 기준 삼아야 한다.

진리가 생산되는 절차에서 도전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뜻 세움이 높지 않으면 배운 것은 낮은 데로 간다. ‘누굴 돕겠다’ 보다 ‘혼자만 갖지 않겠다’로 생각하면 남 돕기가 쉽다. 사랑은 삶으로 실천으로 되는 것이지 이론이 아니다.

일은 중요한 것보다 급한 것부터 처리해야 한다. 나이는 시간적 늙음으로 건강 수준의 생물학적 나이로 지위 서열의 사회적 나이로 대화로 알 수 있는 정신적 나이로 지력을 재는 지성의 나이로 분별할 수도 있으니 철딱서니 없는 어른이 있고 애 늙은이 소리를 듣는 젊은이가 있다. 나이란 결국 세월 살이가 아니라 늙게 살수도 젊게 살 수도 있다. 살아온 세월보다 삶의 값어치가 중요하다. 세상은 나이로 사는 게 아니다. 나이는 상것들의 계급일 뿐. 60대까지는 지식의 차이이고 70대까지는 부의 차이로 억지 구분되나, 80대는 이승과 저승의 구분이 없어진다. 잠버릇으로 연령대를 구분하면 20대 – 포개자고, 30대 – 마주 껴안고, 40대 – 천장 보고, 50대는 – 등 돌리고, 60대는 – 각 방 쓰고, 70대는 – 어디서 자는지 모르고, 80대는 – 산에서 잔다.

지지 않는 꽃은 없다. 쇠도 삭는다. 꿈결처럼 아름다웠던 시절, 늘 푸른 자유, 항상 움직임은 날갯짓 희망이었다. 달빛 미소로 환한 세월의 되돌림은 단연 음악이 최고이다. 추억은 늙지 않는다. 좋아했던 음악이나 즐겨 부른 노래를 타고 그 옛날로 되돌아갈 수 있다.

노래는 시대를 관통한다. 혼자였을 때나 친구와 함께 그리고 연인과 함께 한 노래를 상기하면 그때의 나이와 분위기로 잠시나마 풍덩 빠져 작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풀꽃 엮어 반지 만들며 부른 노래가 정겹고 호기 있게 군가를 한 번 부르는 것에 애국심이 절로 나온다. 동네 노래자랑 마당에서 부른 노래가 스스럼없이 불린다. 학교 수학 여행때 별빛 쏟아지는 모닥불 앞에서 돌려 부른 노래로 친구들을 모은다.

과거를 현실로 끌어내는 힘은 음악이 절대적이다. 즐거울 때나 슬플 때에는 음악이 나를 대신한다. 나이 들어 위로 받기로는 음악이나 책이 자연스럽고 흡수력이 빠르다.

노인에겐 오직 과거만 있기에 과거로 돌아가길 즐겨한다. 자식들에겐 늙어가는 게 눈에 띄지 않게끔 말은 반듯하고 행동이 깔끔해야 서로 편하다. 오늘 아침은 또 다시 행복의 시작이다.

1478호 14면, 2026년 10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