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이해하자(37)
독일의 정당(7) – CSU

독일은 ‘정당국가’라고 칭해질 정도로 정당의 법적·정치적 위상이 높은 국가이다. 이러한 정당의 높은 위상은 독일 민주주의와 나치즘의 역사, 그리고 선거와 국가체제 등 제도적 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낳은 결과이다. 세계에서 정당정치의 모범으로 칭송받는 독일정당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먼저 독일 기본법상의 정당과 정당의 역사를 살펴보았고, 연방의회에 진출한 각 정당을 창당 순서로 살펴본다.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Christlich-Soziale Union in Bayern CSU)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Christlich-Soziale Union in Bayern CSU, 약칭 기사련)은 기독교 민주주의와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독일의 정당이다. 이 정당은 오직 바이에른주에서만 활동하며, 전국정당으로 활동하는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 기독교 민주연합, 기민련)dmf 자매정당으로 하고 있다.

기사련 창당

1945년 여름, 바이에른 주의 여러 지역에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시민을 위한 기독교 정당을 창당하기 위해 모였다. 그 정당의 이름은 기독교 사회 연합이었다. 뷔르츠부르크와 뮌헨이 기독교 사회 연합이 창당되었던 주요 거점이었다. 같은 해 9월 12일 뮌헨의 시청에서 그들은 정당의 이름을 바이에른 기독교 사회 연합(CSU)으로 결정하였다. 1945년 9월 12일은 바이에른 기독교 사회 연합당의 공식적인 창당 회의였던 것이다.

요세프 뮐러가 12월에 정당 준비위원회 임시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넌 5월 17일 첫 번째 기독교 사회연합당의 당 모임에서 요세프 뮐러(Josef Müller)가 당수로 당원들의 승인을 받아 선출되었고 그를 중심으로 정당의 광범위한 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5월 28일 미군정은 추기경 파울하버스의 추천으로 프리츠 셰퍼(Fritz Schäffer)를 바이에른 지방의 총리로 임명하였다. 그는 바이에른 주의 총리였지만 동시에 미군정의 통제 아래에서의 총리였다.

1946년 12월 바이에른 지방선거가 자유선거와 비밀선거의 기치 아래 이루어졌다. 기사련은 52.3%의 지지율로 바이에른 지방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정당으로 등장했으며 한스 에르하르트(Hans Ehard)가 첫 번째 바이에른 주 총리로 선출되었다. 1947년 1월 11일과 12일에 걸쳐 바이에른 주에서 청년 연합이 창설되었다.

1949년 가을에 독일의 첫 번째 연방 정부 선거에서 기민련(CDU)의 자매정당으로 참가,

연방의회에서 24개의 의석을. 콘라드 아데나우어 정부하에 3명의 기사련 출신의 정치인이 연방 정부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정책

기민련의 정책은 세 가지 기본 가치, 즉 “보수적 태도, 기독교 지향 및 연방주의 강조”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 국내 정치에서는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해야하는 강력한 국가”를 주장하고 있으며, 사회적 자유화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러나 가족을 중시하는 정책으로 사회복지를 강조하고 있다.

기민련(CDU)과의 차이점은 주로 기민련이 국내, 법률 및 사회 정책에서 더 보수적이며 경제 및 사회 정책에서는 복지 국가 지향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2007년에는 “모두에게 열린 기회!, 자유와 책임감속에서 미래를 함께 형성하기”를 강령으로 채택했으며, 2016년 당대회에서 Markus Blume의 지도하에 새론운 강령으로 ‘질서(Die Ordnung)을 채택하였다. 새로운 강령은 기사련의 기독교-사회적, 보수적, 자유 주의적 지향을 강조하고 “무질서한 세계에서의 질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사련은 기민련(CDU)보다 더 보수적이라고 평가받는다. 기민련보다 보수적인 성향이 2015년 시리아 난민 사태에서도 나타나 기사련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무제한적인 난민 수용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아예 당내에서 바이에른 독립도 검토해야 한다는 식의 발언까지 튀어나올 정도였다.

사회적으로는 독일을 위한 대안(AfD) 바로 다음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기민련보다 다소 보수적이라고 평가받는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보수색이 조금 더 두드러지는 편이다.

흔들리는 위상

기사련은 1949년에 정계에 등장한 이래 바이에른주에서 늘 집권당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1966년부터 2008년까지, 기사련은 주의회의 ‘만년 다수당’이었다.

그러나 바이에른 주에서의 독보적인 위상은 점점 흔들려, 19대 독일 연방의회선거(2017년)에서 바이에른에서 지지율이 38%에 그치며 전국 득표율 7.0%까지 내려앉았다. 독일 비례대표 저지선 5%를 아슬아슬하게 상회한 셈이다.

또한 지난 주의회 선거(2018년)에서는 37.2%를 기록해, 총 205석의 의석가운데 85석만을 차지하였다. 제1당 지위는 유지했지만 자유시민단(Freier Wähler, 27석)과 연립정부를 꾸려야만 했다.

1950년대부터 바이에른주에서 60년 넘게 단독 과반을 확보해 주정부를 이끌어왔던 기사련에게는 상상하지 못한 참담한 결과였다. 더욱이 그 직전 주의회 선거에서의 47,7%의 둑표율도 기민련에게는 큰 충격이었는데, 이보다 10%나 떨어진 득표율이었던 것이다.

한편 메르켈 독일 연방총리의 후임과 관련 여론조사에서 현재 바이에른 주 마르쿠스 죄더(Markus Söder) 총리가 선두를 달리고 있어 기사련은 이에 큰 희망을 걸고 있다.

기사련은 1980년 프란츠 요세프 슈트라우스(Franz Josef Strauß)가 CDU/CSU 총리후보로 나섰으며, 2002년에는 에드문트 슈토이버(Edmund Stoiber)가 CDU/CSU 총리후보로 나섰다 각각 슈미트(H. Schmidt)와 슈뢰더(G. Schröder)에 패한 바 있다.


교포신문사는 독자들의 독일이해를 돕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 교육 등에 관해 ‘독일을 이해하자’라는 연재란을 신설하였습니다. 독자들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편집자주

1209호 29면, 2021년 3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