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연재] 해로 (Kultursensible Altenhilfe HeRo e.V)

2015년에 시작된 HeRo(해로)는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늙어가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코멘트에서 출발했다. 해답은 늘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이국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도움활동의 필요성으로 귀결되었다. <해로>의 입술로 연재를 시작하지만,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재독 동포들의 목소리를 그릇에 담으려 한다. 이 글이 고단한 삶의 여정을 걷는 이들에게 도움의 입구가 되길 바란다(필자 주)

4회/ 엄마를 부탁해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다.“

깊은 울림을 안겨주었던 드라마 <눈이 부시게> 대사 중 하나다. 살아서 좋았다는 말은 후회가 있는 삶에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긴 긍정의 여운을 남긴다. 작중 어머니의 독백이자 방백이다. 비록 삶이 고달프고 미래를 알 수 없지만 눈이 부시게 하루를 살아라,고 남아 있는 우리에게 말하는 것 같다. 치매를 소재로 감동적인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가족 중에 치매라는 착잡한 주제를 만날 때면 방향을 잃어버린다. 어느 날 문득 내 부모가 치매를 앓게 된다면. 그리고 그 오랜 기억을 복원시키는 노력도 무가치하다면. 실종과 부재에 대한 충격에서 가족들의 통증은 커지게 마련이다. 실제 삶에서의 치매는 드라마에서처럼 감상적이고 우수에 찬 설정이 아니다. 그것은 가혹한 현실이다. 망각된 존재성을 회복시키기엔 너무 처절한 시간이다.

치매로 인해 요양시설에 있던 한인 어르신 P를 기억한다. 첫 방문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그를 만났다. 그는 무심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찾아와주는 이를 위한 가벼운 의식이었다. ‚고향의 봄‘을 불러주자 흩날리는 바람처럼 무언가 그의 귓가를 스쳤나 보다. 내면세계의 그 어디메쯤 내장된 그리움의 소리였다. 그의 코 끝에서 혀 끝에서 음률이 터졌다.

“흠흠흠……음음음……”

소리는 고왔다. 엄숙하고 우울함을 넘어 밝고 환한 결이 묻어난 소리였다. 잠시 먼 곳의 고향을 기억해낸 것 같았다. 오랜 기억의 우물에서 퍼올린 고된 작업이 아닌, 마치 늘 습관처럼 입안에 담겨 있었던 것 같다. 그의 하나밖에 없는 딸은 어머니 앞에서 흐느꼈다. 딸은 어머니의 귀환을 염원했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세계 속으로 이미 여행을 떠난 지 오래였다. 딸에게는 슬픈 시련이었다. 어머니는 모성애적 감성으로 그저 지그시 딸의 얼굴을 감싸 안는 것으로 자신의 의식을 다한 듯 했다.

치매는 암보다 무섭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자기 인식을 동반하는 여타 질환과 다르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치매는 환우 스스로 존재에 대한 상실의 시간이다. 인간의 존엄 위에서 삶에 대해 고해성사할 시간이라도 있는 다른 질환과는 달리, 치매는 기억의 망각 속에서 헤매다 삶을 마감한다. 가족은 부재의 자리에서 솟구치는 어머니와의 기억과 고통스럽게 대면한다. 그래서 가족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러한 가족의 짐을 덜기 위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이유다. 베를린에 있는 한인 치매환우들을 돌아보는 것도 사단법인 <해로>의 역할이다. 가족도 감당할 수 없는 현실적인 상황에서 한국어로의 소통은 늘 필요한 도구다. 2세 자녀의 경우 한국어 구사능력 부족 탓에 치매로 독일어를 잃어버린 부모를 돌볼 여력이 없다.

해로는 매년 치매예방의 날을 정해, 치매에 대한 경각심을 강조하고 있다. 외국땅에서의 치매는 환우 본인은 물론 가족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자원봉사 교육 때 빠지지 않는 중요 교육 내용 중 하나다. 그만큼 1세대 어르신들에게 치매는 잔인한 운명의 상징이다. 특히 가족이 없는 경우는 더 쓸쓸한 마지막을 예고하는 것이다.

2016년부터 열린 해로 ‚치매예방의 날‘은 해를 거듭할수록 관심 또한 증가하고 있다. 주독 한국 문화원에서 열린 1회 행사를 시작, 매년 한인사회와의 협력으로 진행되고 있다. 참석한 1세대 어르신들의 마음을 여는 것은 음악이다. 음악은 마음을 터치하고 끝내는 위로와 힘을 제공한다. 악기 연주와 한인 젊은 음악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도 감동적이다.

특별강의도 흥미롭다. 해로의 자문교수로 활동하는 베를린 샤리테의 치매전문의 Dr. Oliver Peters의 ‘치매와 예방’ 강의는 꾹꾹 눌러 듣게 된다. 피터스 박사는 치매 예방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적 활동이라고 말한다. 스포츠댄스와 같은 사교춤이 효과가 있고 운동을 꾸준히 하는 이들이 치매 발병활률 또한 적다고 강조한다.

현재 의학계의 여러 노력으로 치매 악화를 늦추는 것이 가능하고 치매 예방에 도움을 주는 의약품들 또한 시판되고 있다고 한다. 이 행사의 추가 프로그램인 사진촬영도 약방에 감초 역할이다. 해로의 자원봉사자인 전문 사진촬영사의 ‘어르신 행복사진’ 촬영 서비스와 치매에 도움되는 운동강좌 등도 시선을 끈다. 행사의 꽃인 음식 만찬은 또 어떤가. 나누는 음식 속에서 따뜻한 회복이 일어난다.

치매예방 행사는 짧은 시간이지만 아직 늦지 않은 이들에겐 정보를, 이미 늦어버린 이들에겐 위로가 되는 자리다. 우리의 세계로 귀환할 수 없는 이미 늦어버린 치매환우를 위한 꾸준한 도움활동이 절실하다. 치매 환우, 그들의 세계 속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

“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박경란/ 사단법인 <해로> 일반 자원봉사팀장(후원문의:info@heroberlin.de)

2020년 4월 24일, 1168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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