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연재] 해로 –
92회: “눈 내린 들판에서도 똑바로 걸어갈게요”

갑진년(甲辰年) 새해를 맞아, 올 한 해가 교포신문 독자 여러분에게 더없이 “값진”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새해를 맞으며 여러 가지 기대와 소원을 가지고 올해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를 묵상하다가, 백범 김구 선생님이 좋아하셨고 친필을 남겼던 말을 생각하게 되었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이 말의 뜻은 “눈 내리는 들판 한가운데를 걸을 때라도, 발걸음을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말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들이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되리라”라는 말이다. 이 시는 조선시대 문인이었던 임연당 이양연(1771~1853)이 쓴 시로, 며칠 전 전 탄생 100주년을 맞은 김대중 대통령께서도 매우 좋아했던 시라고 한다.

이 시에는 자신은 길도 없는 벌판을 힘들게 걸어갈지라도, 다른 이들에게 길이 되는 삶을 살겠다는 마음이 담겨있다. 또한 인생을 살아갈 때, 자기의 야망만을 생각하며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는 다른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올해 우리 모두 그런 삶을 살아내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 사회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남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많은 이들이 우리 주위에서 훈훈한 사랑과 온정을 베풀고 있어서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고통이 왜 있는지 그 이유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만약 고통이 없다면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조금도 알 수 없었을 것 같다. 어려운 이들을 도우려는 사랑의 마음이 이 세상을 지탱하는 힘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난 12월 21~27일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선교병원인 ‘안양샘병원’의 봉사팀이 파독 1세대 어르신들을 섬기기 위해 베를린에 와서 의료봉사를 하였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파독 근로자들의 노고를 잊지 않고, 감사와 위로의 마음을 전하면서 의료봉사도 하려고 멀리 베를린까지 찾아온 것이다. 57년의 역사를 가진 안양샘병원은 매년 여러 차례 아프리카를 비롯한 어려운 나라에 가서 많은 봉사를 하고 있는데, 2023년의 마지막 봉사로 우리 파독 어르신들을 섬기러 베를린에 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의료선진국인 독일에서의 의료봉사가 잘 될까 하는 의문도 있었지만, 자신들의 귀중한 휴가와 경비를 들여 가면서까지 파독 어르신들을 섬기려는 사랑의 마음이 너무도 고마워서 봉사를 함께 하기로 하였다.

봉사팀은 베를린의 어르신들을 섬기기 위해 많은 기도로 준비하였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반찬과 여러 가지 선물도 정성껏 준비해 왔다. 성탄절에는 어르신들에게 따끈하고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불고기를 굽고 생선전도 직접 부치며 온갖 정성을 기울였고, 한국에서 가져온 젓갈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반찬으로 잔칫집과 같은 분위기에서 맛있게 식사를 드시도록 섬겨드렸다.

또한 여러 가지 선물도 한국에서 공수해 와서 어르신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드렸다. 이들이 가져온 선물에는 경옥고, 한방 파스, 한방소화제, 칫솔, 색동 동전지갑, 이태리타월, 수면양말, 무릎담요 등 어르신들에게 필요하고 좋아하실 만한 것들을 가져와서 골고루 나누어 드렸다.

내과 의료상담에 이어 재활의학과 전문의가 어깨와 무릎, 팔과 다리, 허리 등을 침으로 치료를 해드렸는데, 치료가 효과가 있었다며 여러 어르신이 좋아하셨고 매년 와서 봉사를 해주면 좋겠다고 하셨다. 원래 함께 오려고 했던 두 분의 한의사가 갑작스런 사정이 생겨 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다음 기회에 또 봉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서로 기도하였다.

며칠 안 되는 짧은 봉사 기간이었지만, 멀리 한국에서 우리 파독 어르신들을 섬기기 위해 달려온 샘병원 봉사팀의 사랑의 마음이 너무도 고마웠고, 그런 마음이 우리 파독 어르신들에게 잘 전해졌으리라 믿는다.

“길”, “꿈”과 같은 말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에 너무 좋아한다. 지금은 비록 척박하고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을지라도, 미래에는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사이비도 많아서 거짓 꿈과 길을 보여주며 사람들을 현혹하여 교주와 이단들의 욕망을 채운다.

우리 해로가 꿈꾸며 걸어가는 길은 이런 부류들의 길과는 분명히 다르다. 우리는 이단 종교단체가 아니다. 우리 해로를 돕는 목사들은 베를린의 정통교회에서 초청받아 설교도 하고 인정을 받는 정통 장로교 목사들이며, 앞으로도 사명을 잊지 않고 오직 봉사와 섬김을 위한 일에만 매진할 것이다.

해로가 발전하고 성장하여 도움을 받고 유익을 얻는 분들은 우리나라를 위해 수고한 우리 파독 근로자들과 교포들이다. 우리 해로는 우리 단체의 성장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해로는 우리 어르신들, 특별히 질병과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분들을 잘 섬길 때 그 존재의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아직도 많이 작고 부족하지만, 어르신들을 더 잘 섬기기 위한 발전적인 일을 계속 추진할 것이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 눈이 오는 들판과 같을지라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파독 어르신들을 섬기는 사명을 다하기 위해, 오늘도 내일도 흐트러짐 없이 똑바로 걸어가, 뒤에 오는 이들에게 길이 되려고 한다.

해로 파이팅! 파독 어르신들 파이팅!

“형제들아 나는 오직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립보 3:14)

박희명 선교사 (호스피스 Seelsorger)

1346호 16면, 2024년 1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