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17)

바우하우스(Das Bauhaus und seine Stätten in Weimar, Dessau und Bernau)

교포신문사에서는 2022년 특집 기획으로 “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매주 연재한다.

독일은 서독 시절이던 1976년 8월 23일 유네스코 조약에 비준한 이래, 48건의 문화유산과, 3건의 자연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와 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한편 아픈 역사도 갖고 있는데, 2009년 현대적 교량 건설로 인해 자연 경관이 훼손됨을 이유로 드레스덴 엘베 계곡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서 제명된 것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제명된 첫 번째 사례였다.

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등재일 기준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바이마르에서 시작하여 데사우로 이동하며 활동한 독일의 바우하우스 학파는 1919년~1933년에 건축과 미학적 개념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킨 조형 예술 경향이다. 이 시기에 바우하우스 조형 학교 교수들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한네스 마이어(Hannes Meyer)·라슬로 모호이너지(Laszlo Moholy-Nagy)·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등이 설계·건축·장식한 건축물들은 20세기 건축의 상당한 영향을 끼친 모더니즘 운동을 일으켰다.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선정위원회는 “20세기 예술과 건축의 사상, 관행을 혁신한 모더니즘 운동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바우하우스 건축학파의 독창적인 작업으로 이루어진 이들 건축물들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그 등재 기준을 밝혔다.

바우하우스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20세기 건축 사고와 실천에 혁명적인 영향을 준 운동인 바우하우스 운동이 보여준 소박한 디자인, 기능주의, 사회 개혁적 성격에 대한 건축 분야의 기여를 반영한 것이다.

바우하우스(Bauhaus) 의 역사

1차 세계대전 직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성립된 이듬해인 1919년, 아르누보(신예술)의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가 만든 ‘바이마르 공예학교’와 ‘바이마르 미술학교’가 합병되어 바우하우스가 설립되고, 초대 교장으로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hius)가 취임하였다.

미술과 공예, 사진, 건축 등과 관련된 종합적인 내용을 교육하는 종합조형학교로 바이마르에서 시작된 이 ‘국립 바우하우스’(Staatliches Bauhaus)는, 1925년 데사우로 옮겨지고, 1933년 나치의 정치적 압박으로 폐교되었다.

14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 존속한 바우하우스는, 그러나 당대 유럽의 창조적인 예술운동과 세계 디자인 활동의 최고 중심지가 되면서 현대 건축과 디자인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세대에 출현하는 그래픽 디자인, 내부 디자인, 공업 디자인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바우하우스는 새로운 교육이념으로 운영되었는데, ‘사회 지향적 체계’를 바탕으로 ‘예술가들의 사회적 책임’을 중요시 하였다. 이러한 교육 이념을 바탕으로 건축과 산업에 있어서 보다 창의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제품 또는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교육이념에 의해 바우하우스의 건축물과 공예작품들은 청교도주의적인 단순하고 검소한 제품을 선호하게 되고 값싸게 대량생산을 할 수 있는 사각형 형태의 디자인 제품들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바우하우스의 역사를 시대적인 특성에 따라 4기로 구분한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시대로서 수공예가를 양성하기 위한 일반적인 공예학교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데사우로 이전한 이후 1925년부터 1927년 까지는 산업 전반에 디자인적 관점과 해결 방식을 적용할 수 있는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현대의 디자인 대학 형태를 갖추었다. 사회민주주의적 좌익성향의 한네스 마이어(Hannes Meyer)가 교장으로 있던, 1928년부터 1929년까지의 기간 동안은 정치적 이데올로기 투쟁의 장에 놓이게 되고, 그는 결국 시 정부에 의해 해임된다. 마지막 시기는, 건축가인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Ludwig Mies van der Rohe)의 시대로 건축공과대학 정도로 그 규모와 역할이 축소되어 다시 탄생되는데 1930년부터 1933년까지가 이 기간에 해당한다.

바이마르에서 출발한 바우하우스에서는 요하네스 이텐 (Johannes Itten), 라이오넬 파이닝거 (Lyonel Feininger), 파울 클레 (Paul Klee), 오스카 슐레머 (Oskar Schlemmer),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등 신예 예술가들이 초빙되어, 공업과 예술을 결합시켜 새로운 건축과 새로운 공예를 만드는 연구가 시도되었다.

초기에는 공예학교 성격을 띠다가 1923년에 이르러서야 예술과 기술의 통일이라는 연구 성과를 평가받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비로소 교육방침이 정착되어 바우하우스의 특색으로 자리 잡았다.

1925년에는 경제적 불황과 우파의 출현, 정부의 압박 등으로 폐쇄 위기에 처했으나 데사우시(市)의 주선으로 시립 바우하우스로 재출발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데사우 시기로 부른다.

이 시기부터는 이미 종합적 안목을 갖춘 인재를 육성하였기 때문에 각 공방에서 3년의 과정을 마친 다음에는 모든 것을 통괄하는 건축과정으로 넘어갔다. 바이마르 시절의 졸업생들이 교수진으로 참여하면서 바우하우스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생산방식에 따른 디자인 방식의 도입은 물론, 공업화를 추구해 실제로 산업계와 제휴하기도 하였다.

1928년 그로피우스가 떠난 뒤에는 스위스 건축가 한네스 마이어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 바우하우스는 다시 한 번 그 성격을 바꾸게 된다. 마이어는 바우하우스의 형식주의적인 면을 공격하고, 일반인에 대한 봉사야말로 디자인의 역할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건축이 모든 의미의 미적 과정이라고 역설하였다.

1930년 미스 반 데어 로에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1932년 나치의 탄압으로 데사우에서 쫓겨나면서도 베를린에 사립 바우하우스를 설립하였으나 1933년 나치정부는 이마저도 완전히 폐쇄하였다.

1265호 31면, 2022년 5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