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재가 일본 국보로 지정되다
고대에는 ‘요청자’에서, 중세 이후 ‘약탈자’로 바뀐 일본
일본의 교토, 오사카, 나라에 있는 문화유산을 볼 때마다 그 그림자를 통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마주하게 된다. 지금은 문화재의 서열화 문제로 등록번호제가 폐지되었지만 일본 국보 1호의 지위를 오랫동안 유지했던 교토 교류지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대표적인 예이다. 나라현의 호류지(아스카시대를 상징하는 불교 사찰)에는 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린 금당벽화와 백제 관음상이 있다.
일본은 고대 이래로 한반도에서 전래된 문명을 바탕으로 ‘아스카시대’를 열고 자신들의 문화를 일구어왔다. 그러나 문명의 전달 과정은 늘 협력적이진 않았다. 그 분기점은 7세기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맞선 백제와 일본과의 연합군이 전투에서 패한 이후라 할 수 있다.
백제와의 연합 전투에서 패한 일본은 신라의 침공을 방어할 목적으로 대마도에 금전성(金田城)을 축조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양식의 성을 짓는다. 이후 1274년 여몽연합군의 침공을 겪은 후 일본에게 한반도는 두려움과 긴장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겪으면서 일본도 더 이상 요청하는 지위에만 머물지 않게 된다.
1350년경을 기점으로 왜구들의 한반도 침략이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1400년대까지 50여 년간 530여 회에 이르는 침략으로 이 땅의 수많은 인명이 살상, 납치되고 곡물은 물론 문화재들이 약탈당했다. 심지어 고려의 왕도인 개성까지 침입한 왜군은 왕의 사찰인 흥천사에서 ‘쇠북(金鼓)’과 ‘수월관음도’까지 약탈해 갔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는 약탈의 수준이 더욱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을 침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문화재 약탈 특수부대까지 편성해 도자기, 서적, 금속공예품, 보물 등을 집중적으로 약탈해 갔다. 이런 이유로 당시의 전쟁을 ‘문화재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보물들은 도요토미가 죽자 뒤를 이어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거쳐 일본 왕실과 신사와 사찰 등에 배분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은 조선 침략과 약탈을 위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고분과 사적, 사찰 등지에서의 유물조사가 ‘고적 조사’라는 명분으로 진행되었고, 이는 후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약탈품 목록의 기초가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을 실질적으로 접수한 통감부는 고려청자 수집광인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이어 고문서 수집광으로 알려진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까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총독부 통치3 5년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양의 문화재를 약탈하고 훼손, 파괴했다.
약 30만 점의 한반도 문화재, 그중 150여 점이 일본 정부 지정 문화재
지금 일본에는 한반도에서 반입된 문화재가 정부 공식 발표로 7만 4천여 점, 일본 학계의 보고에 따르면 30만 점 이상이 있다. 또한 그 수준은 최상, 최고이며 일본을 통해 유럽과 미국 등으로 팔려 나간 것도 부지기수라 한다.
일본 문화청은 홈페이지를 통해 일본 정부가 자국의 중요문화재로 공식 지정한 한국 문화재를 소개하고 있다. 2020년 기준으로 모두 112건에 이른다.
이를 시대별로 나눠보면 삼국시대 17건, 고려 75건, 조선 20건이다. 시대 표기 중에 임나(任那)와 이조(李朝)는 역사를 왜곡한 표기로 바로잡아야 한다. 고려시대 유물이 75건으로 가장 많은 것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집중되었던 왜구의 침략과 임진왜란을 연관해 살펴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일본의 중요문화재 중 대표적인 한국 문화재로 일본의 국보인 ‘이도다완(井戶茶碗)’과 임진왜란 때 약탈해 간 ‘신라 연지사종’이 있다. 이외에도 고려 유산으로 불화가 30점, 도자기가 21점, 동종이 27점이다.
팔찌, 금은장환두대도병, 팔가리개 등 고고자료로 분류한 10점은 고대 유물로 고분 등에서 발굴한 것이고, 『대장경』 등 불경 관련 서적 15점은 임진왜란 때 서적 약탈부대인 ‘종군문사참모부’와 관련해 살펴봐야 한다. 불상 중에는 2012년 대마도 가이진신사에서 한국으로 반입되었다가 돌아간 신라 여래불상(동조여래입상) 등 신라 불상 4점도 있다.
일본 정부가 한국의 문화재를 자국의 중요문화재로 지정한 시기도 잘 살펴봐야 한다. 가장 많은 42건을 지정한 1900~1920년대는 고적 조사 등을 이유로 한국의 고분 등지에서 약탈한 수많은 문화재가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경천사지 십층석탑, 지광국사탑이 일본으로 무단 반출되었다가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으로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이 시기 일본 정부는 자국의 문화재 보호를 위해 법률 정비를 서둘렀고, 1919년 「사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법」을 제정했다. 특히 반입된 문화재의 재반출을 막기 위해 1965년 한일문화재협정을 맺기에 앞서 서둘러 한국에서 반입된 문화재의 3분의 2 이상을 자국의 중요문화재로 지정하는 꼼수를 부렸다.
누락된 문화재 파악을 위한 전수조사가 꼭 필요하다
일본 덴리시의 이소노카미신궁에 있는 백제의 ‘칠지도’는 1953년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다. 목조미륵반가사유상, 백제 관음상 등은 한국 기원 문화재 목록에서 빠져 있다. 1907년 부여군 규암면의 옛 절터에서 농부가 발견한 후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백제 금동관음보살입상’의 경우 소장자가 문화재 지정 절차를 밟지 않았기에 목록에도 없다.
이처럼 일본이 지정한 한국 문화재의 경우 전수조사를 통해 정확한 문화재 현황과 왜곡된 표기를 바로잡아야 한다. 일본 정부는 지정 사유와 취득 경위를 밝혀 국제사회에서 요구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자격을 갖추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과거에는 고미술품의 소유가 자랑이 되었지만 지금은 윤리적 도덕성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비난을 받게 된다는 시대의 흐름을 일본 정부는 알아야 할 것이다.
1265호 30면, 2022년 5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