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교의 귀띔: 천 년을 가라 한들 멀다 했으랴
Dipl.-Ing.WONKYO Institute
제3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성지 탈환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교황 우르바노 3세 (Uebano III)가 사망하자 제173대 교황에 오른 그레고리 8세(Gregory VIII)는 유럽의 왕들에게 예루살렘을 탈환해 줄 것을 촉구했다.
1187년에 있은 히틴(Hytin) 전투에서 살라딘이 승리하여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유럽 천주교 신자들의 순례 길을 막고 있어 하루라도 빨리 이 순례 길을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게 하고 싶은 마음에서 십자군의 원정을 독촉한 것이다.
교황 그레고리 8세는 재임 기간이 고작 2개월(21.10-17.12.1187)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다. 그레고리 8세 교황의 독촉으로 독일과 불란서 그리고 영국과 같은 강대국의 왕들이 움직여 직접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한 역량 있는 교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시민들은 그레고리 8세가 바티칸에 들어오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던 관계로 눈앞에 있는 도시 피사(Pisa)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레고리 8세 교황은 로마시민들의 인식이 달라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사이에 사망하게 되니 바티칸의 교황 자리에 한 번 앉아 보지도 못한 교황이 되고 말았다
당시 예루살렘은 1187년 아이유브왕조의 술탄 살라딘(Ayyubiden Sultan Sladin) 에 의해 점령되어 있었고, 유럽의 가톨릭 신자들이 찾아오는 순례의 길을 통제하고 있었다.
살라딘은 뛰어난 리더십으로 분열된 이슬람 세력을 통합하고 1187년에 히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십자군을 물리치고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한 후 이슬람의 구원자로 칭송받고 있었다.
아이유브 왕조(Salahaddin Eyyubi) 는 이집트-시리아, 예멘, 이라크, 메타, 헤자드 등의 지역을 다스리던 쿠르트계 수니파 왕조이다.
서양에서는 예루살렘 순례길을 막고 있는 술탄을 살라딘으로 부르고 있지만 모슬렘 국가에서 부르는 그의 이름은 유스프(Yousuf) 이다.
그가 유럽에서 살라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렇다. 유럽인들이 성지탈환이라는 이름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십자군은 마을을 지날 때마다 겁탈과 약탈행위를 일삼는 행위를 저질렀다. 천주교 신자들에게 순례의 길을 열어주기 위한 원정인지 아니면 노략질을 하기 위해 행군을 하는 것인지 헷갈리 정도로 무질서 노략질이었다.
하지만 살라딘(유세프)은 침입해 들어 온 십자군과 싸우더라도 무자비했던 유럽인들과는 달리 덕목을 갖춘 지도자로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그가 십자군 포로들에게 보여준 자비심으로 유럽에서는 좋은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는 붙잡힌 포로들을 굶기지 않았으며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는 최대한의 배려를 해주었음은 물론 감옥소에 갇혀 있게 되더라도 가능한 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의 뛰어난 군사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인격-교양-관대함으로 이슬람 세계에서는 물론 유럽 전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된 것이다.
또한 십자군이 고국으로 돌아 갈 때는 길을 막고 공격하는 것을 삼가 했고 오히려 국경을 벗어 날 때까지 식료품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살라딘이라 불렀는데 이는 아랍어로 “정의의 신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다.
실리딘은 십자군으로 구성된 유럽의 국가 일부를 자신의 통솔 하에 두고 있을 때, 십자군은 안티오키아(Antiocia), 티로스(Tyros), 트리폴리스(Tripolis)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서로가 뺏고 빼앗긴 지역들이다.
1189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릭히 1세 (friedrich I) 바바로사 (Babarossa) 는 십자군 전쟁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전쟁 길에 나섰다. 독일 수바벤 왕국(Schwaben Reich) 에서 태어난 프리드릭히 1세는 부왕들과는 다르게 붉은 수염을 가지고 있었다. 그후 그의 별명으로 지어진 이름이 바바로사이다. 바바로사는 이탈리아어로 “붉은 수염”이라는 뜻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십자군 전쟁에도 참가했던 프리드릭히 1세는 프로이센 왕과 동명 이인인 프리드릭히 1세와 헷갈리지 않기 위해 바바로사로만 부르고 있다.
바바로사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왕국을 신설했고 폴란드 왕국과 헝가리 왕국 그리고 크로아티아 왕국을 정복하고 부르군트(Burgundi) 왕위를 획득하여 전유럽에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부르군트족은 게르만족의 일파이다.
부르고뉴라고도 하는 서로마 제국 말기인 5세기 때, 게르만 민족 대이동 시기에는 지금의 불란서 지역과 스위스 제네바 지역으로 넘어 와서 부르군트 왕국을 세운 종족이다. 첫 부르군트 왕국은 잘 알려진 바그너의 “니벨룽엔의 노래”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바바로사는 그의 용맹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성지인 예루살렘에 입성해 보지 못했다. 그는 1190년 현재 투르키에 (터키) 의 괵수(Goeksu)에 속하는 살레프(Saaleph) 라는 강을 건너다가 익사했기 때문이다.
전 유럽의 위세를 떨칠 정도로 용감하고 권위를 자랑하던 바바로사가 강물을 건너다가 익사했다는 것은 당시 왕으로서 전쟁에 출전할 때면 철가면과 철의를 입는데다가 무거운 칼과 방패까지 든 상태로 자신을 보호했을 것이니 그 무게만 60-70kg이 넘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왕이 타는 말의 얼굴과 몸체에도 보호망을 입히지 않았겠는가 ! 그런 무게로 강을 건너다가 말이 삐끗해서 미끄러져 넘어졌을 때를 생각해 보면 빨리 일어 설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철갑으로 둘렀고 양 손에도 무기를 들었을 것이며 만약 말에서 내려 걸어 보리고 했으면 한 발짝도 내디디지 못했을 것이다. 행여 넘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서너 명이 달려 들어야 일으킬 수 있었을 몸이 아니었겠는가.
바바로사는 자신을 보호하려고 입었던 무거운 갑옷이 오히려 죽음을 자초케 한 경우이다.
1190년에는 프랑스의 필립 2세와 영국의 사자왕 리차드 1세(Richard I)도 십자군에 참가해 있었다.
1191년 이들은 봄과 여름철을 맞아 현재의 레바논인 티로스(Tyros)에 도착해 아카레( Akkon) )를 점령하고 있었다. 이때 일어난 십자군 내부의 갈등으로 불란서 필립 2세는 고국으로 돌아갔고 리차드 1세가 십자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리차드 1새는 그가 지금껏 치룬 전쟁 중에 보여준 용맹함으로 사자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뛰어난 담력과 전술을 겸비한 전략가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용맹함에서 붙여진 별명은 유럽 내에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모슬렘 족에서는 사탄이라고 불렀다.
십자군에서의 내분이라는 것은 바바로사의 독일 (신성 로마제국은 독일 아헨(Aachen)이 본부)과 필립의 불란서 그리고 리차드의 영국이 서로 예루살렘 성지 탈환의 공을 세우려고 지휘권을 가지려는 싸움에서 밀리게 된 필립이 홧김에 짐을 싸들고 돌아가지 않았나 싶다.
그후 리차드왕은 야파(Jaffa) 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십자군의 실력으로는 살라딘이 점령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야파는 이스라엘 땅이기는 해도 텔아비브 (Telaviv) 남쪽 항구여서 성지 예루살렘과는 상당한 거리를 가지고 있다. 야파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유럽에서 야파까지 도달했다는 것은 성지인 예루살렘을 코앞에 두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1192년 9월 2일. 리차드 1새와 살라딘은 야파에서 평화의 협정을 맺었다. 그들은 3년간의 휴전에 합의했고 살라딘은 십자군으로부터 해안지역 일부를 흡수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이로서 예루살렘은 계속해서 무슬렘족의 지배하에 남게 되었고 비무장한 천주교 순례자들에게만 출입을 허용했다.
평화협정이 이루어진 한 달 후 리차드가 성지를 떠난 것은 제3차 십자군 원정에서도 예루살렘 성지 탈환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십자군 전쟁은 200 여 년 동안에 8차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진군했지만 모슬렘족의 승리로 끝난 전쟁이다.
살라딘은 영국으로 돌아가는 리차드의 길을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사히 귀국하기를 바란다면서 귀국을 전송해 주었지만 엉뚱하게도 오스트리아의 레오폴드 5세(Repold V)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를 상징하는 깃발에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후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6세(Heinrich VI) 에게 넘겨져 영국에서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나서야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460호 22면, 2026년 5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