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
1989년, 본(Bonn)은 도시 창립 2000주년을 기념했다. 이는 기원전 12년에 라인강에 최초의 로마 군사 요새가 세워진 것을 기념한 것이다.
서독의 수도로 잘 알려진 라인강변의 도시 본(Bonn).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2천년 가까운 역사의 자취들이 살아 숨 쉬는 본의 참 모습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본은 쾰른처럼 거대한 대성당이 도시를 압도하는 것도 아니고, 프랑크푸르트처럼 현대적인 고층빌딩이 도시의 이미지를 규정하는 것도 아니다. 베를린처럼 독일 역사의 거대한 사건들이 한눈에 펼쳐지는 도시도 아니다.
그러나 본은 로마제국의 흔적과 중세 교회의 종소리, 쾰른 선제후의 화려한 궁정문화, 베토벤의 음악,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의 수도로서, 민주주의를 만들어간 정치사의 흔적이 서로 다른 시대의 지층처럼 포개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 뮌스터 광장에서
이번 본(Bonn) 역사산책은 뮌스터 광장(Münsterplatz)에서 시작한다.
뮌스터광장은 본) 시내 중심에 위치한 광장으로, 이곳은 본 대성당(Bonner Münster) 북서쪽에 있으며, 중앙역에서 포스트슈트라세(Poststraße)를 따라 도보로 갈 수 있다. 프리덴스플라츠(Friedensplatz), 본 시장광장(Marktplatz)과 함께 본 시내의 주요 광장 가운데, 가장 큰 광장이다. 보행자 전용구역 내 세 개의 가장 큰 광장 중 하나로 꼽힌다. 광장 남쪽에는 마르틴스플라츠(Martinsplatz)가 인접해 있다. 뮌스터플라츠는 본 크리스마스 마켓 등 여러 축제와 행사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의 ‘뮌스터플라츠’라는 명칭은 1719년부터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며, 중세 시기에는 ‘아우프 엠 호프(Aufm Hof)’ 또는 ‘아우프 엠 그로센 호프(Aufm großen Hof)’로 불렸다.
이곳 뮌스터광장도 로마시대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이번 역사산책에서는 본의 로마유적지는 아쉽게도 제외되기에 먼저 로마시대 관련 된 부분을 설명하고 본격적인 역사산책을 시작한다.
로마의 국경도시, 보나(Bonna)
라인강은 예로부터 로마제국의 북쪽 경계선이었다. 강 건너는 ‘야만의 땅’으로 불리던 게르마니아, 강 이편은 제국의 질서가 미치는 곳. 지금의 본(Bonn) 자리에는 기원후 1세기 무렵부터 로마 군단이 주둔한 요새, ‘보나(Bonna)’가 있었다. 오늘날 베토벤의 도시, UN의 도시로 불리는 본의 가장 오래된 이름이 군사기지였다는 사실은 낯설게 느껴지지만, 사실 라인강변의 거의 모든 독일 대도시—쾰른, 마인츠, 코블렌츠—가 이렇게 로마의 병영으로부터 출발했다.
군단의 도시
보나에 처음 주둔한 것은 기원전 12년경 로마군이었고, 이후 여러 부대가 교체되며 주둔하다가 서기 83년경부터는 ‘제1미네르바 군단(Legio I Minervia)’이 자리를 잡았다. 이 군단의 주둔지는 지금의 본 시가지 북쪽, 대략 현재의 중앙역에서 라인강 사이 구역에 해당한다. 흙과 목재로 지어졌던 초기 진지는 점차 돌로 개축되었고, 전성기에는 약 6천 명의 병력을 수용하는 대규모 요새로 발전했다. 진지 주변으로는 병사들의 가족과 상인들이 모여 사는 ‘카나바에(canabae)’라는 민간 정착지가 형성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본이라는 도시의 실질적인 씨앗이었다.
로마인들에게 보나는 변방의 소도시가 아니라, 상류의 마인츠와 하류의 쾰른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라인강을 따라 이어지던 이 방어선, 이른바 ‘리메스(Limes)’의 일부로서 보나는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는 최전선 기지 역할을 했다.
순교자 카시우스와 플로렌티누스 그리고 본 대성당(Bonner Münster)
보나의 로마 시대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두 순교자, 카시우스(Cassius)와 플로렌티누스(Florentinus)의 전설이다. 이들은 흔히 테베 군단(이집트 테베 출신 그리스도교 병사들로 구성된 로마 군단)소속이었다고 전해지며, 3세기 말 그리스도교 박해시기에 신앙을 이유로 이곳에서 처형당했다고 한다. 역사적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이 전설은 본이라는 도시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전승에 의하면, 4세기경 성녀 헬레나가 이들의 무덤 위에 작은 추모예배당을 지은 것을 시작으로, 훗날 이 무덤 자리에 본의 상징인 본 대성당(Bonner Münster)이 세워졌습니다. 이 성당을 중심으로 중세 도시 본이 발전했기 때문에, 두 성인은 본의 역사적 뿌리 그 자체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대성당 뒤편인 본 마틴스 광장(Martinsplatz) 바닥에는 두 성인의 잘려 나간 머리를 형상화한 거대한 화강암 조각상이 누워 있다. 2002년 예술가 이스켄데르 예딜레르(Iskender Yediler)가 제작한 이 작품은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두 순교자를 기리는 본의 가장 유명한 상징물 중 하나이다.
중세의 시작: 본 대성당(Bonner Münster)
로마 군단이 라인강변에서 철수한 뒤에도 보나(Bonna)의 자리는 비어 있지 않았다. 순교자 카시우스와 플로렌티누스의 무덤 위에 세워진 작은 추모 예배당은, 수 세기에 걸쳐 조금씩 몸집을 불려가며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웅장한 로마네스크 대성당, 본 민스터로 자라났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카시우스와 플로렌티누스는 3세기 말 그리스도교 박해 시기에 순교했다고 전해지는 인물들이다. 이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는 이미 4~5세기경부터 소규모 추모 시설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고학적 발굴 결과 6세기 무렵의 초기 교회 건물 흔적이 확인되었다.
이후 8~9세기 카롤링거 왕조 시기에 이곳은 참사회 성당(Stiftskirche)으로 격상되어 사제단이 상주하는 중요한 종교 시설로 발전했다.
우리가 지금 보는 형태의 본 대성당, 즉 로마네스크 양식의 웅장한 본체가 본격적으로 지어진 것은 11세기부터 13세기에 걸친 시기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성당 동쪽과 서쪽 양쪽 끝에 각각 탑과 앱스(제단부 반원형 구조)를 배치한 ‘이중 성가대석(Doppelchor)’ 구조인데, 이는 라인란트 지역 로마네스크 건축의 전형적 특징이자 쾰른, 마인츠 등 인근 대성당들과 본이 하나의 건축적 전통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서쪽 탑과 교차부 위에 솟은 팔각형 첨탑은 본 시내 어디서나 눈에 띄는 스카이라인의 상징이 되었다.
중세 내내 본 민스터는 단순한 지역 교회가 아니라, 신성로마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참사회 성당 중 하나로 기능했다. 성당에 소속된 참사회원(Canonicus)들은 상당한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지녔으며, 이들의 존재는 훗날 본이 쾰른 대주교-선제후의 거처로 낙점되는 배경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동시에 카시우스와 플로렌티누스의 유해를 모신 성당이라는 점에서 본 대성당은 중세 순례자들이 찾는 목적지이기도 했다. 오늘날 본의 문장(紋章)에 등장하는 인물상 역시 이 두 순교자에서 비롯된 것으로, 도시의 정체성 자체가 이 성당의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이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광장 중앙에 자리잡은 베토벤 동상
광장 한가운데는 베토벤탄생 75주년 해인 1845년에 세워진 베토벤 동상이 자리하고, 그 뒤로는 800년 넘은 로마네스크 성당이 첨탑을 드리우고 있다. 이 구도는 우연이 아니다. 베토벤 동상이 세워질 당시 본 시민들은 이 도시의 가장 유명한 아들을 기념할 자리로, 이미 도시의 정신적 중심이었던 뮌스터 광장을 선택했다. 즉 이 광장은 중세의 신앙적 중심과 근대의 문화적 자부심이 나란히 공존하는, 본이라는 도시의 시간이 압축된 공간인 셈이다.
베토벤동상 제막식은 당시 본분만 아니라, 유럽전체의 관심거리였다.
1845년 7월 10일에는 출판사 숏(Schott-Verlag)이 발행한 베토벤의 ‘장엄미사 D장조’와 ‘교향곡 9번 d단조’ 악보 인쇄본이 동상 기단부에 봉인됐다. 한 달 뒤인 8월 12일, 베토벤 탄생 75주년과 제1회 베토벤 페스티벌을 맞아 열린 제막식은 국빈급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개최됐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프로이센의 Friedrich Wilhelm 4세 국왕 부부는 물론,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인 알버트 공 등 유럽 최고 권력자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여왕 부부는 붉은 비로드와 금실로 장식된 왕실 로열박스에서 문서에 서명했으며, 이 문서 역시 납으로 만든 캡슐에 봉인되어 동상 주춧돌 아래 매립됐다.
이 화려한 축제의 이면에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프란츠 리스트의 헌신이 있었다. 리스트는 며칠간 이어진 제막 축제의 총감독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총 제작비 1만 3,000탈러(Taler) 중 2,666탈러라는 거금을 선뜻 기부했다. 이 행사를 계기로 본 최초의 ‘베토벤할레(Beethovenhalle)’ 공연장이 건립되기도 했다.
이후 베토벤 동상은 본 시를 대표하는 핵심 상징물로 사랑받아 왔다. 베토벤 서거 100주기였던 1927년 5월에는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독일 제국 대통령과 미하엘 하이니슈(Michael Hainisch) 오스트리아 대통령의 후원 아래 대규모 추모 행사가 동상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구 중앙우체국(Altes Postamt),
뮌스터 광장의 중심을 지켜온 역사적 건축물인 구 중앙우체국은 18세기 귀족의 저택에서 출발해 독일 우정 역사의 중심지로, 그리고 현대적인 복합 공간으로 변모해 온 수백 년의 역사를 간직하며 도시의 핵심 유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이 건물은 ‘퓌르스텐베르크 궁전(1751~1753년 건립)’ 이었다. 만사르 지붕을 얹은 3층 규모의 로코코 양식 소형 궁전으로, 본 시내에 남아있는 18세기 귀족 저택 중 외벽 파사드(정면부)가 원형 그대로 가장 잘 보존된 유일한 건축물이다. 건물 중앙부에는 앞으로 살짝 튀어나온 ‘중앙 돌출부’가 위치하며, 그 상단 삼각 박공에는 1876년 조각가 빌헬름 알베르만(Wilhelm Albermann)이 라인 응회암으로 제작한 부조가 새겨져 있다. 이 부조는 근대 우편 제도의 발전과 성과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궁전은 역사적 순간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1845년 8월 15일 제1회 베토벤 페스티벌 당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국왕과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이 건물 발코니에 서서 광장에 세워진 베토벤 동상의 제막식을 관람했다.
건물의 전환점은 1876년 10월 찾아왔다. 독일 제국우편(Reichspost)이 인근에 있던 본 우체국을 확장 이전하기 위해 이 궁전을 23만 4,000마르크에 매입한 것이다. 내부 개축을 거쳐 1877년 12월 3일 공식 개장한 우체국은 본의 급격한 도시 성장과 함께 세를 넓혀갔다.
그러나 130년 넘게 본의 중심 우체국 역할을 해오던 이 건물은 2008년 11월 구조조정으로 중앙우체국 지위를 내려놓았다. 현재는 포스트방크(Postbank) 금융센터와 도이체 포스트·DHL의 서비스 매장이 입점해 있다.
1447호 22면, 2026년 10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