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나누는 지혜, 하이델베르크

12월 7일 토요일 낮에 산드하우젠에 있는 하이델베르크 한인회 정귀남 회장의 자택에서 귀한 모임이 있었습니다. 한인회의 일을 돕는 임원들과 오래전에 한인회를 주관하며 16 년을 이 도시에 머물다가 미국으로 돌아가셨던 미셸씨와 이십년 만에 함께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하나뿐인 따님이 독일로 오게 되었으므로 주저하지 않고 남편과 함께 다시 이곳으로 살러 오셨습니다. 실로 이십년 만에 이 곳의 가족들과의 상봉이 펼쳐지는 잔치가 열렸습니다.

행복한 만남이란 그저 옆에만 있어도 환하고 즐거워집니다. 늘 그래왔듯이 띵동 문이 열릴 때 마다 한 손 가득 음식을 들고 나타나는 분들이 계십니다. 마음껏 개성을 발휘하여 다양한 요리가 펼쳐졌습니다. 붉은 고추와 쑥갓이 어우러진 화려한 부침개, 포장마차를 연상하게 하는 듬뿍 쌓인 닭발요리, 찹쌀가루를 살짝 넣어 보리개떡의 맛을 재현한 케이크, 호밀 튀김으로 만든 엿강정, 완벽한 김치, 불고기와 감자어묵볶음, 견과류가 어우러진 브로콜리 살라드, 그리고 나물 종류가 엄청 많은 가운데 정귀남씨의 한 가득 담아놓은 게장은 가히 일품이었습니다. 직접 적은 레시피를 받아 가방에 넣으며 꼭 게장을 해보리라 결심들을 합니다.

팔십대 중반의 미셸, 그녀를 처음 보는 순간, 밝고 신선한 미소를 대하니 조금도 거리감이 없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한인회의 초기부터 중심역할을 해왔으며 이제 60-70대가 되는 간호사로 오신 여러분들은 몇 십 년 전에 미셸씨가 목요일 마다 오픈했던 영어수업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하십니다. 이제는 모두 직장인이 되었고 부모가 되기도 한 자녀들이 한창 어렸을 때였습니다. 모두 바쁜 와중에도 모임을 가졌으므로 세상이야기와 자녀교육의 이야기로 시끌벅적하다 보면 시간은 흘러서 끝으로 영어 한두 마디를 하기에도 바빴던 추억의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있었습니다.

저를 위시하여 처음으로 미셸씨를 만나는 몇 명은 아주 짧은 사이에 많은 것을 감지했습니다. 그녀의 열정적인 삶이 매우 흥미롭고 듬직하게 다가오면서 바로 이 시간에 가장 기쁘게 살고 계시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독일의 여러 곳에는 그녀를 만나면 화들짝 기뻐하실 분들이 많으리라 여겨집니다.

성함인 ‘미셸’은 오십년 이상 호적에 올라 있으며 일상에서 불려왔으므로 한국의 이름은 아예 꺼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녀의 고향은 중국의 북경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중국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부친은 북경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며 성공적인 부를 이루었습니다. 일본이 전쟁에 패망한 후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부산에 자리를 잡았으며 미셸이 서울로 대학진학을 하려고 합격통지서를 받았음에도 딸을 멀리 보내고 싶지 않은 집안의 결정으로 결국 부산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습니다. 그 후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고 미국에서 중학교 교사를 하던 미셸은 미군부대 소속의 남편이 독일로 오게 됨으로써 함께 이 곳으로 오셨습니다. 미셸은 하이델베르크에서 16 년이란 세월을 미군부대소속의 학교 교사로 재직을 하면서 바로 오늘, 이십년 만에 만나는 여러분들과 열정적으로 한인회를 이끌어나갔습니다.

그녀는 또한 하이델베르크의 바하합창단 단원이었으며 이스라엘과 프랑스로 합창연주회를 다녀오기도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성악가 김청자씨가 하이델베르크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갑자기 그녀는 목소리에 관여하는 치료를 받게 되면서 그렇게 좋아하던 합창을 그만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끝없이 노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상실은 엄청난 고통이었다고 합니다. 영어교사 또한 쉬지 않고 말을 하는 직업인지라 합창과 더불어 성대를 보호하지 못했던 원인도 떠올렸다고 합니다. 틈틈이 전시회를 보러 다니느라 바쁘기도 했던 그녀를 ‘잡학사전’이란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이제 돌이켜 보니 오로지 한가지만을 일관성 있게 하지 못한 것은 건강이 허락지 않을 때 마다 몰두하는 대상이 바뀐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듣는 순간 왠지 숙연해졌습니다.

미국의 생활을 떠올리면 여러 기억이 있지만 2007 년의 끔찍했던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이 났을 때에 미국의 티비에서 인터뷰를 하러 왔었다고 합니다. 재미한국인 1.5 세가 저지른 이 사건은 용의자를 포함하여 33 인이 사망했습니다. 그 당시에 전 세계가 놀랐고 분노했었습니다. 비록 인터뷰는 했지만 티비에 나오는 것을 직접 보지 못했는데 그것을 본 지인들이 알려주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미국에서 ‘노무현 탄핵반대시위’에 몰두하기도 하셨습니다.

불과 몇 해 전에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가든에서 하는 가수 ‘비’의 공연을 보러가셨다고 합니다. 특등석에 앉은 분들이 갑자기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고 바로 옆에서 함께 하기에는 부자연스러운 자신이 그들의 분위기를 저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팔십대의 나이에는 더 이상 젊은이들의 향연에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철학을 전공했으며 모든 것을 함께 나누던 각별한 친구가 십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우울증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후에 친구의 자녀가 해외근무를 하면서 돌아가신 어머님 대신으로 초대를 했고, 이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며, 누구나 일생에서 모든 것을 풀어헤쳐 보일 수 있는 거울 같은 친구를 하나씩 갖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일을 줄이고 차분해지면서 건강관리에 시간을 쓰게 되니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아도 좋은 물건들을 차례로 나누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책과 그림들은 원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원하지 않는 물건들은 게시판에 올리면 모르는 이가 와서 차에 실어갔습니다. 중간 중간 “이렇게 정 들었던 물건들을 없애도 좋을까? 비록 만지지는 않아도 장식으로 놔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 끝없는 미련이 따라붙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독일에 가서 살기로 결정을 내린 후에 집과 차와 모든 가구들을 정리했습니다. 그런 후에 참으로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삶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홀가분함이 다가왔습니다. 떨쳐내야 할 먼지를 훌훌 털어낸 것처럼 어디를 가나 가벼워지는 신비를 만난다고 하십니다.

이제 독일의 생활은 그 어떤 물건에도 연연해하지 않으며 바로 있는 곳에서 존재 자체를 선연하게 마주하는 새로운 삶이 펼쳐진 것입니다.

인생의 오후에 이르면 알게 되겠지만 몸의 어딘가는 고장이 나게 마련이며 점차 수술이 불가능해집니다. 아프다고 표현을 하면 고통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오히려 환하게 웃으면 다 함께 기쁘니 그 편이 백배 낫다고 웃으셨습니다. 경험으로 손수 따라주시는 지혜의 샘물을 다 함께 마시는 뜻 깊은 하루였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정보문의 정귀남 회장 : 0622-43344

글: 김인옥 www.inock.de

2020년 1월 17일, 1154호 2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