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명수회장님 영전에 드립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저는 오늘 주님의 제단에서 깊이 머리 숙여 기도를 드립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자식이고 또 우리들의 형제인 고 이명수회장님의 영전에 명복을 빕니다.

저는 오늘 한 가족에게 튼튼한 기둥이시고 한 가족의 어른을 이별하시게 되는 유가족 제위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오눌 또한 고인의 영결예배를 허락하여 주시고 집전하시는 임지웅 한빛교회 담임목사님, 그리고 부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그리고 한빛교회 임직원님들과 성도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오늘 회장님께서 무엇이 그리 바쁘셔서 이렇게 먼저 떠나가셨는지 저희들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여 여기에 섰습니다. 저는 오늘 회장님께서 떠나 신 후 살아있는 우리인간에게 필요한 바로미터 같은 회장님의 삶의 흔적을 더듬어 봅니다.

회장님께서는 1942년 서울에서 출생하셨고 6.25전쟁 때 부모님을 따라 수원으로 피난하셨으며 성장하면서 부친으로부터 엄격한 유교사상을 공부를 하셨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한문을 읽고 쓰고 익히기를 반복하셨다는 얘기를 하셨습니다. 실제로 회장님의 그 필적을 자랑하실 만 하였습니다.

1974년 10월 사랑하는 부인 윤재순님과 자녀들을 고국에 남겨두고 당시 서독의 니더라인지역 노이키르켄 광산에 파독광부로 오실때의 결정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하기에 반세기를 이 땅에 거주하면서 다른 어느 누구보다 더 열심히 사셨습니다. 열심히 산다는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렇다고 봅니다만. 그럼에도 회장님의 치열했던 삶을 반추해 보면 감히 아무나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부지런하게 사셨고 드라마틱하계 사셨고 그 당시 고국에 남겨둔 식구들을 생각하며 일대 모험의 삶이였음을 알고도 남습니다.

세월은 어느덧 살같이 지나고 지금은 3남매 자녀들이 모두 튼튼한 기반아래 이 사회에 자리를 잡고 독일인 사회에서 선두에 서있으니 그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신가요. 뿐만 아니라 자녀에게서 태어난 예쁜 손녀들이 벌써 아비투어 준비와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회장님께서는 매사를 정확하게 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부담없이 대화하시며 진지하고도 친화력이 있어 사회를 리드해 나가시는 특별한 성격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회장님이 떠나신 자리가 너무 넓고 크게 차지하고 있어 저희들은 허무한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세상일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지난 2월24일 새벽 사랑하는 성도, 고 이명수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소천 하셨습니다. 저는 24일 아침 일찍, 전화로 이 소식을 접하고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였습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소식이었습니다. 회장님과 저희는 지난 2월21일 향군의 정기총회를 무사히 마치고 이제 한국 향군본부에 업무상 보고를 하기 위하여 전날 밤 저와 전화로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이 전화통화로 회장님의 마지막 음성을 듣게 되다니,, 저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자신의 몸도 가누지 못하는 저희 현실 앞에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회장님께서 소천 하셨다는 비보가 전해지고 독일곳곳에서 실시간으로 걸려오는 전화와 카톡, 메신저 등을 통하여 충격적 소식을 알려왔습니다.

모두가 안타까워하며 어떻게 이런 믿기 어려운 충격적 비보의 슬픔이 우리에게 다가온 것인가. 생각하며 모두가 허탈해 하고 슬퍼하는 고인의 친구들은 몰론이고 고인께서 마지막 정열을 다하여 활동하시던 향군단체 임원 및 이사 관계자들도 안타까움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로했습니다.

저희가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하물며 한 가정에 기둥이시고 든든하시던 어른께서 갑자기 운명하셨으니 미망인 윤재순님의 정신적 고통과 마음의 아픔을 어떻게 위로해 드려야 할지 저희는 갈피를 잡지 못하며 한동안 스스로 한없이 방황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희 머리에서는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저는 수십 년 전부터 한인사회 단체에 활동하면서 회장님과 언제나 함께 했던 추억이 너무나도 새롭습니다.

쾰른지방한인회의 지역사회에 봉사를 하였으며 한인들의 대표적 단체인 재독한인총연합회, 광부단체인 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 독일 한인들의 체육향상을 위하는 재독대한 체육회에서 선수단을 인솔하여 고국에서 개최되는 전국체육대회에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더 넓은 곳인 재유럽한인총연합회에 중책을 맡아 독일의 인접국가인 네델랜드 벨기에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각국으로 함께 다니며 활동했던 추억이 새롭습니다.

지금부터 13년전 제대군인들의 애국활동을 위해 대한민국재향군인회의 도이칠란트 재향군인회를 창립하였습니다. 공군부회장 겸 사무처장으로 독일과 한국을 왕래하시면서 12년동안 단체 발전에 노력하셨고 단체를 굳건한 조직으로 만들었으며 지난 해 향군회장님으로 추대되셨습니다.

저는 3년 전에 폐암진단을 받고 왼쪽 폐 절개수술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때 저희 목사님을 비롯, 많은 성도님들의 간절한 기도의 힘으로, 그리고 저를 아는 모든 분들의 위로에 힘입어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구사일생 명을 연장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저희 건강이 이처럼 회복된 것은 헌신적으로 간호해준 집사람 윤자씨의 정성어린 간병과 자신보다는 남을 위하여 헌신적 활동을 하시면서 저희 건강회복을 위하여 밤 낯으로 걱정하시던 회장님이 옆에 계셨기에 가능했습니다.

특히 회장님께서는 시시 때때로 전화로 카톡으로 저희 건강을 체크하시면서 전화에 저희 음성만 들으시고도 걱정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매일 저에게 희망과 힘을 주셨습니다. 회장님은 이렇듯이 저에게는 기댈 수 있는 큰 형님 같은 존재였습니다. 사람들은 회장님과 저희 관계를 바늘과 실 같은 관계라고들 말합니다. 바늘이 가는 곳에 실이 따라 갑니다.

이를 되짚어 보면 실이 가야 할 곳에 바늘은 길을 트는 역할을 합니다.

회장님과 저는 때로 바늘과 실의 역할을 번갈아 바꿔가면서 사회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렇게 함께 활동하던 저는 오늘 이렇게 회장님의 영전 앞에 홀로 서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이제 남은 삶을 위하여 더욱 더 노력할 것을 약속드리면서 고별의 인사를 올립니다. 회장님, 아니 형님 부디 영면하십시오.

2023년 3월 4일 아우 유상근 올림

1306호 13면, 2023년 3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