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복찬 중부지사장의 “글뤽아우프” 출간 기념 북토크에서의 인터뷰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여전히 가슴에 안고 사는 파독광부들”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글판 “글뤽아우프” 북토크는 지난 1월31일(화), 서울에 소재한 주한독일문화원에서 열렸다. 북토크는 문화원장의 인사, 저자 이유재교수의 소개 및 책 설명 후, 주제별 발표에 들어갔다. 당일 파독광부인 나복찬 교포신문 중부지사장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편집자 주

이유재교수: 파독광부로 독일에 오시게 된 과정을 소개해 주신다면,

나복찬지사장: 독일을 생각하게 된 동기는 당시 갈월동 숙대입구에는 롯데제과 등, 제과업 공장들이 많이 있었으며 중, 고등학생 또래 나이에 어린 여공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매일은 아니지만. 대리점 일이 일찍 끝나는 날이면 과일행상으로 사람냄새가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일에 자주하곤 했다.

유달리 추웠던 1976년 겨울, 어느 날 저녁에도 행상에 나섰다. 우연찮은 하나의 만남이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미지의 세계로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귀가 중 나를 알아본 친구(당시 공무원, 청파동 거주)가 내가 참 어렵게 살고 있구나! 란 생각이 들어서였던지? 넌지시 한국에서 일이 잘 안 풀리는가 본데, 이럴 때 외국에 한번 나갔다 오면 어때? 라는 제안을 해 왔다.

솔깃해진 나는 하고 있던 식품대리점 사업체를 아우에게 인계하고 어려운 과정(나의 경우 한조 500명에서 2명)을 거친 끝에 서독행에 오르게 되었다.

이유재교수: 독일 탄광일이 너무 어려워서 중간에 두 번이나 한국에 돌아갔었고. 완전 귀국 후, 이듬해에 다시 독일로, 결국 다시 독일에 가서 살게 되셨습니다.

나복찬지사장: 아헨 에밀마이리쉬 광산작업을 앞두고 지상에서 2주 동안 작업에 필요한 연장이름이며 작업시간 등, 간단한 언어 구사에 필요한 언어교육을 받고 지하광산 현장에 바로 투입되었다. 독일광산 측으로서는 광산경력을 전제로 한국의 건강한 노동력을 모집하여 데려왔기 때문에 한국인들 일하는 데에는 별다른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들은 순번에 따라 작업장소가 배정되었다. 큰 삽질을 한번도 해 본적이 없는 나는 행운(?)으로 일당이 제법 높은 곳(굴진작업반)에 배정되었다. 입항 첫날 1천 50미터 수직갱에 도착, 또 기차를 타고 족히 2km 정도를 수평으로 이동했다. 나는 “거짓으로 광부경력이 있다고 속이고 온 것이 벌을 받는 것이 아닌가?” 란 약간의 두려움과 엉뚱한 생각까지도 들었다. 나 때문에 정작 왔어야 할 어느 한 사람은 못 온 것이 되고 말았으니 그 분에게 미안한 생각이 또 스쳐갔다.

순식간에 이동하는 수직 승강기는 참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입항하던 첫날 기숙사에 돌아오니 두 아이의 아버지인 동료(B씨)가 돈이 적은 일자리에 배정되어 걱정이란 말을 내게 털어 놓았다. 나는 순간 “광산경력이 있는 저 사람이 내 자리에 들어가면 좋겠네” 라는 생각이 스쳤다.

한 달 정도가 지나 아침 작업조에 출근한 나는 일부러 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경력자이며 일 잘하는 그 친구가 그 자리에 들어가게 꾀를 낸 것이 성공한 것이다. 나는 곧바로 그의 일자리를 인계받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 일조차도 벅차게만 느껴졌다.

1년이 지난 어느 날, 굴진작업을 하던 그 친구의 휴가로 그의 일자리에서 대신 일을 하게 되었다. 어느새 지난 1년 경력이 그곳에서의 작업이 그리 어렵게 느껴지진 않게 했다. 그러던 중 작업장 사고(굴진작업 중 돌이 덮친)을 당했다. 들것에 실려 나와 병원에 입원하는 등, 편치 않은 시간을 거친 끝에 한국 상황을 살필 겸,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978년 당시 비행기 삯은 나의 3개월 월급에 해당(2800마르크)했다. 2년차 되던 해에 또 한번의 사고(3톤의 쉴드 상판에 하반신이 깔리는)를 입고 또 한국의 상황을 살피러 다시 한 번 나갔다. 결국은 힘든 작업 상황을 이겨내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 주원인이다. 나대신 못 왔을 그 어느 사람에게 미안할 뿐이다. 그 덕에 잠시 귀국하여 평생 반려자를 만나게 되었음은 참 행운이었다.

다들 힘들어들 했지만 파독광부들이 힘든 3년을 견뎌 낼 수 있었던 것은 고국의 가족과 동거동락한 동료애로 서로를 위로하고 기대면서 잘 들 견뎌낸 것으로 본다.

3년 계약기간이 끝나 한국에서 기다리던 이와 결혼을 하고 나니, 그런 겁쟁이에게 한국에서의 좋은 환경이 기다려 줄 리 만무였다. 그러던 중 한국귀국을 극구 만류했던 독일교회 칼봘터 장로가 “에쉬봐일러발전소에서 나 같은 사람을 찾고 있다” 라며 내가 원하면 비행기표를 보내겠노라는 연락을 해왔다. 마침 당시 서울세관에 근무하던 친구로부터 독일에서 기계공구(Dowidat 사) 수입단가와 납품기일을 조정해 주었으면 하는 부탁을 동시에 받아 든 나는 일단 독일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오게 되었으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유재교수: 한국에서 많은 분들은 파독광부. 간호사 분들이 한국에 송금한 돈이 1960/70년대 한국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 했다고들 말한다. 나는 그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광부 시절 이후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후에 한국기업들과 유학생들이 독일에 정착하고 생활하는데 노동이주자들의 공이 더 크다고 본다.

교포신문기자로서 한인사회내에서 열심히 활동하시는 1세대이신데, 이 점을 어떻게 보시는지,,

나복찬지사장: 파독간호사분들도 그렇습니다 마는 파독광부들은 가난을 벗어난 조국을 보며 그러한 과정에 일조를 하였다는 사실을 가슴 속에 큰 자긍심으로 삼고 살아 왔다. 당시 거의 모든 이들이 월급의 80-90%을 송금하였다. 그 나머지로 생활들을 한 셈이다.

얼마 전부터 연금 생활자에 접어들기 시작하며 발전된 미디어를 통해 고국에 대한 더 많은 것을 접하며 함께 울며 좋은 일엔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1963년 처음 광부로 파독된 선배들은 이듬해인 1964년 첫 광복절 광산지역별 축구대회를 시작으로 국경일을 지키기 시작했으며 2차 광부가 시작된 70년들어 각 도시에 한인회를 조직하고 태어난 2세 아이들이 학령기에 접어들면서 한글을 가르치고 우리 문화를 교육하는 한글학교를 각 도시(38개교)에 간호사분들과 함께 설립하게 된다.

1970년대 들어 서독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많은 한국기업인 동포들에게 먼저 온 인생의 선배들로서 필요한 모든 분야에 도움을 준 일, 또 수많은 유학생들의 불편해소(예, 일자리 주선, 당구장 운영, 학자금 조달)에 힘써 왔다. 나는 물론, 주위에 많은 이들이 유학생들이 학업을 마치면 한국에 돌아가 큰일을 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동조했다.

특별히 소개드리고 싶은 것은 동포사회와 우리의 삶을 담아낼 신문의 필요성을 사명으로 알고 파독광부들이 1983년 이정신문(발행인 이세희, 1년 후 정간), 1995년에 교포신문(발행인 이현복, 편집장 박승규)을 창간하였다. 교포신문은 우리들의 역사를 기록한다.라는 창간 취지에 따라 주간지로서 지난 27년여 동안 한주도 거르지 않고 지난 1월 27일에 1300호를 발행하게 되었다.

창간에 참여했던 이들 중 두 분은 창간 5년을 전후하여, 또 한분은 지난 3년전에 돌아가셨다. 최근들어 더 자주 부고를 접하며 1세대들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고맙게도 교포신문은 발행인(조윤경)으로부터 편집인(조인학)과 기자들 13명이 나를 제외하곤 다들 젊은 분들로 진용이 짜여져 있다는 사실에 매우 감사하고 있다.

지난 13년 전에 뒤셀도르프에서 찾았던 신호범 전 워싱턴주 상원의원(21년 4월 작고)은 내게 신문의 중요한 역할로 독일에서 정치가를 키워 내야 함을 강조했다. 정치지망생인 2세(현종범 정치학박사)의 국내 김종인 의원실 실무과정 소개, 이예원 하원의원 연방국회로 진출하는데 유권자들을 독려한 일들은 참 의미있었던 일로 기억된다.

신문은 5년 주기로 의미있는 행사(독한의원연맹 코쉭의원 초청강연회, 파독광부 자서전 검정밥 출판, 통독을 보며 우리의 역할, 재독한인사회 전망, 동포사회의 미래 등, 의 주제로)를 해 나오고 있다.

앞으로도 1세대들은 동포역사의 지난 역사를 거름 삼아, 다음 세대들이 맞닥트릴 미래의 과제를 함께 풀어 나가는데 힘쓰고 다양하게 변모한 동포사회 각계각층의 지혜를 모으는 견인역할을 지속해 나가야만 할 것이라고 본다. 특별히 지난 2년전 발족한 ‘교포 50년 위원회(위원장 양해경)’ 활동을 통해 재독한인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고 본다.

현재 재독한인사회 역시, 20년전 새 밀레니움에 들어서면서 각종한인단체를 포함한 모든 커뮤니케에서 차세대들의 참여 적극독려, 활동 영역들을 넓혀 오고 있으며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잘 들 해나가고 있다고 본다.

이유재교수: 1세의 노후는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다고 선생님께서는 걱정을 많이 하십니다. 동시에 1세는 정서적으로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여전히 크게 안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보실 때, 1새대의 노후는 어떻게 대책하면 좋겠고, 혹시 그 과정에 한국사회, 독일사회, 또는 한인2세에 대한 바램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나복찬지사장: 파독광부 가운데 약 1400명이 독일에 잔류했으며 현재는 약 850명이 생존해 있다. 이 가운데 약 350명 정도는 1천유로 미만의 연금 생활자들로 파악되고 있다. 파독광부들은 이제까지도 그러했지만, 이들은 할 수 있는 한, 자식들이나 친지의 도움을 거부하며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도모하고 있다.

어떤 형태로라도 국가차원에서 이들의 젊음을 보상해 준다면 매우 큰 정신적 위안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파독근로자들에 대한 예우가 선행된다면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에게 “대한민국 조국이 우리를 결코 잊거나 버리지 않았다” 라는 고마움을 갖게 할 것이며 그 후손들에게도 부모의 나라에 대한 긍적적 이미지를 더욱 더 키워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독일사회보장제도의 지원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기피하는 것이 현실이다. 자존심의 발로일 것으로 보인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자식세대들에게도 너희들이라도 잘 살라는 뜻에서인지 도움을 청하는 일은 매우 꺼리는 경향이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다.

고국에 또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지난 2009년 12월, 파독광부적립금을 기반으로 구입한 파독광부기념회관겸 한인문화회관이 중부독일 에센시에 세워져 있으며 부설시설로 재독동포역사자료실과 한국과 독일 광부들과 우호와 친선을 상징하는 광산박물관이 건립되어있다. 동포사회에서 공공시설로 자손대대로 이어질 이 중요한 시설은 지난 2013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상한바가 있으며 에센시 관광국 정기방문코스이기도 하다.

지난 13년간 운영을 담당해 연로한 1세대들에게 맡겨 놓을 수는 없는 문제에 봉착해있다.

또한 파독광부들에겐 마지막행사가 될 수도 있는 파독 6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에 대해 관계당국의 깊은 관심과 지원책을 강구해 줄 것을 요청드린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더 드린다면, 파독광부들은 노후에 맞는 경제적 어려움보다는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젊은 시절 조국을 그리며 피땀 흘렸던 지난 세월들이 고국에서 “잊혀 가는 역사”가 되지 않을까? 라는 현실을 우려하며 그런 역사적 사실마저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면 그들의 삶을 굳게 지탱해 주고 있는 정신적 버팀목이 무너지는 일이 될 것이기에 견뎌내길 힘들 것이란 점을 간곡히 말씀드린다.

1306호 14면, 2023년 3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