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총회 주최 ‘스페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순례길’ 7박 8일
노석임
제1장: 3일 차에 백기 들었지만, 이것도 엄연한 내 순례다!
확실하게 해두자. 나는 지금 무슨 경건한 묵언 수행이나 심오한 신앙 고백을 하러 스페인까지 날아온 게 아니다.
목표는 딱 하나! 동행들이랑 쉬지 않고 수다 떠는 것, 그리고… 물에 빠져도 절대 안 가라앉을 이 ‘뱃살 구명 튜브(Rettungsring)’를 단 1cm라도 줄여보는 것! 작년에도 “아이구, 이기 내 인생 마지막 순례길이다!” 하고 호기롭게 외쳤던 것 같은데, 정신 차려보니 또 짐을 싸고 있더라. 내 기억력이 이 뱃살 튜브 두께만큼이나 무뎌진 게 틀림없다.
걷다가 힘에 부칠 땐 지인들 얼굴을… 아니, 그 양반들이랑 먹었던 맛있는 술안주들을 추억하며 이 악물고 버텨보려 했다. 그런데 아… 오늘이 딱 3일째. 기어이 몸이 비명을 질렀고, 결국 회장님 순례 차 옆자리를 홀랑 차지하고 앉았다. 출발 전의 그 거창했던 비장함은 스페인 바람에 훌훌 날아가 버렸다.
발바닥은 불이 나고, 그 비싼 트레킹화도 소용없이 커다란 물집이 얹혔다. 바늘로 콕 따서 실을 꿰어놓으니 물이 쭈욱 흘러나오는데 기가 차서 웃음만 나온다. 허리 튜브는 줄어들기는커녕 나랑 더 끈끈한 우정을 과시하고 있으니 이놈을 어째야 할까.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길가에 놓인 이정표 속 조개껍데기가 “무조건 끝까지 제 발로만 걸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차를 타고 가든 엎어져서 가든 산티아고로 향하는 마음은 다 똑같다. 오늘 차에 올라탄 건 포기가 아니라, 내 칠십 평생 고생한 다리한테 내린 ‘휴가’다.
길 위에서 만난 85세 어르신의 묵묵한 발걸음은 참 멋지고 대단하다. 하지만 그 어르신은 그 어르신 세월이 있는 거고, 75세 부산 할매인 나한테는 내 삶의 속도가 있는 법이다. 남 속도에 맞추려다 내 무릎을 작살낼 순 없다.
차창 밖 풍경을 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에, 그래도 3일 동안 묵묵히 버텨준 내 다리에 고마움을 적셔본다. 걷든, 차를 타든, 쉬어가든… 산티아고 성인도 내 속사정을 다 아시고 “야야, 고생했다” 하고 허허 웃어주실 거라 믿는다.
오늘 밤엔 무릎 잘 다독여주고, 내일 또 슬몃 신발 끈을 매어본다. 길 위에서 만난 모든 이들에게 소리쳐본다.
“마, 다들 무릎 조심하고! 부엔 카미노(Buen Camino)다!”
제2장: 30km 남겨둔 산티아고에서, 거짓말쟁이가 되어
“반만 해라. 반만 따라가도 괜찮다.”

처음 이 길에 발을 디딜 땐 이 말을 무슨 주문처럼 읊조리고 다녔다. 일흔을 넘기고 살아온 인생도 돌아보면 늘 완벽하진 못했고, 그저 반쯤 겨우 해내며 걸어온 길 아니었던가.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전체 거리의 반을 훌쩍 넘어 산티아고까지 딱 30km가 남았다.
‘반’이라는 숫자가 주는 마법이란 참 오묘하다. 절반을 넘기는 순간 마음만큼은 이미 목적지 성당 마당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 것 같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기도 하지. 그토록 다리가 아프고 힘들 때는 “아이고, 집에 가고 싶다”를 입에 달고 살았으면서, 막상 내일모레면 이 여정도 끝이 나고 집으로 돌아간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새벽녘, 창밖은 아직 칠흑 같은 어둠이다. 이곳 주민들이 한창 단잠에 빠져있을 시간, 우리 순례자들은 또각또각, 지팡이 소리를 조심스레 내며 걸음을 옮긴다. 마을 아침잠을 깨울까 봐 발걸음은 사뿐사뿐 조심스러운데, 혹시나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을까 노란 화살표와 조개껍질 문양을 찾는 눈빛은 바짝 긴장해 있다.
그래도 어깨에 멘 배낭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든든하다. 어제저녁 동네 빵집에서 사 온 빵에 귀한 올리브기름을 듬뿍 뿌린 빵 봉지와 바나나, 그리고 물 한 병. 무슨 군인 배급받듯 챙겨 든 가방을 메고 길을 나서는 이 든든하고 야릇한 기분을 무슨 수로 다 설명할까. 길가 온천물에 슬쩍 손을 담그며 “아이구, 뜨거워라!” 소리를 한 번 지르고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길 위에서는 스페인, 스웨덴, 영국, 프랑스, 독일… 그야말로 ‘세계 연합회’ 정기총회가 열린다. 나이도, 언어도 제각각이지만 눈빛 하나, 헐떡이는 숨소리 하나면 다 통한다. 살면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살아왔든, 이 길 위에서는 그저 배낭 하나 짊어진 동무일 뿐이다.
숲속에 들어서자 멋진 자태의 유칼립투스 나무 그늘이 반기고, 정성스레 가꿔놓은 포도 넝쿨이 길게 이어진다. 게다가 인심 좋게 주렁주렁 열린 배를 따서 한 입 크게 물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소나기가 좍좍 쏟아진다. 옷은 푹 젖었지만 “에라, 모르겠다!” 하고 웃어버리니 운치가 그야말로 극에 달한다.
하지만 이 길에서 제일 유쾌한 건 바로 순례자들만의 ‘거리 계산법’이다. 다들 발바닥에 물집이 잡혀 절뚝이면서도, 서로 사기를 북돋아 주려고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던진다.
“이제 5km 남았어요!” (실제로는 10km)
“조금만 힘내요, 저 모퉁이만 돌면 금방이라니까!” (실제로는 모퉁이를 다섯 번은 더 돌아야 함)
이제는 아무도 저 말을 안 믿는다. “아이고, 또 속는다 속아! 저 인간 아주 입만 열면 구라(?)네!” 하며 다 함께 깔깔깔 웃음이 터진다. 살다 보면 남을 속이는 거짓말에 화가 날 때가 많았는데, 나이 일흔다섯에 먹는 이 선의의 거짓말은 피로를 싹 날려버리는 최고의 청량제다.
이 동네는 고추밭이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고, 기름에 달달 볶아 소금을 톡톡 뿌려 먹는 ‘파드론(Padrón) 고추’ 요리가 으뜸이다. 이 고추는 참 희한해서 대개는 순한 피망 맛이 나다가도, 어쩌다 하나씩 무시무시하게 매운 놈이 걸려든다. 동료들의 싱거운 거짓말이나, 순진한 얼굴로 매운맛을 숨긴 이 고추나 참 닮았다. 매운 고추에 걸려 쩔쩔매면서도 쏟아내는 수다와 단어들은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폭소를 터뜨리게 만든다.
내일이면 또 어떤 즐거운 거짓말과 풍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씁쓸하면서도 고소한 고추 한 점에 내일에 대한 설렘을 가득 얹어, 길 위의 기분 좋은 하루를 마무리해 본다.
제3장: 당나귀 축제부터 16.5km의 기적까지—꼴찌여도 좋아!
어제 파드론 시내를 가득 메운 당나귀 축제의 열기 속에서, 안장도 없는 고집쟁이 당나귀를 달래려 애쓰던 순간부터 이미 예감했다. “아이고, 내 다리야 발아, 오늘 고생 좀 하겠구나!”
마지막 날, 남은 거리는 25km. 그런데 스웨덴 지인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모두가 화장실이며 길목을 찾아 헤맸지만, 평소 걸음이 빠르고 단단한 분이라 큰 걱정은 안 되면서도 한편으론 속으로 쿡쿡 웃음이 났다.“내가 안 보이면 분명 난리가 났을 텐데, 저 양반은 눈에 안 보여도 혼자 잘 걸어가고 있겠지!”
어느덧 내 모습은 그야말로 ‘완벽한 피날레’를 향해 가고 있었다. 눈에 흘러들어간 땀방울 때문에 눈은 찌릿찌릿 따갑고, 입은 강아지처럼 헥헥거리느라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평소 창백하던 내 얼굴은 어느새 붉은 홍조로 화사하게(?) 물들어 있었고. 결국 염치 불고하고 사무총장님 어깨에 제 물병과 간식이 든 가방을 슬그머니 얹었다.
‘꼴찌 상’이 있다면 그건 단연코 내 차지! 하지만 이 상, 아무나 받는 거 아니다. 나는 당당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산길, 흙길, 딱딱한 아스팔트, 덜컹거리는 돌길… 고된 길 옆으로는 두 손을 합친 것만큼 커다란 레몬과 포도송이, 그리고 나뭇가지가 부러질 듯 주렁주렁 매달린 탐스러운 키위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 풍경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비록 반은 걸어서 가고 반은 차를 탔을지언정, 야고보 성인께서도 이 가련하고 애틋한 정성을 어찌 어여쁘게 보지 않으시겠는가? 천국 도장 쾅! 찍어주실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은가? 꼭 두 발로만 끝까지 밟아야 한다는 법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으니까!
마지막 이정표에 새겨진 ‘16,500m’를 눈에 담으며, 드디어 나의 위대한 발걸음은 장렬하게 마침표를 찍었다. 남은 길은 내 두 발 대신 신나게 굴러가는 자동차 바퀴가 대신해 줄 것이다. 걸어서 가든, 차를 타고 가든, 마음은 이미 성 야고보의 품 안에 도착해 있다.
다음 순례길을 꿈꾸는 여러분, 절대 겁먹지 마세요! 길 위에서는 꼴찌도 주인공이고, 차를 타는 것도 다 성스러운 여정의 일부랍니다. Buen Camino!
제4장: 마침내 하나 된 평화의 깃발 아래서
드디어 산티아고 광장 입성!
높이 든 평화의 깃발 아래, 다 죽어가는 얼굴들과 불이 나다 못해 물집이 깨진 지 오래인 발을 이끌고 광장에 모여들었다. 사람으로 꽉 찬 광장 한복판에서 우리는 손에 손을 잡았다.
스페인, 스웨덴, 프랑스, 영국, 독일… 국적은 달라도 목청껏 함께 부르는 가사는 하나, 바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었다. 타국 땅에서 힘차게 울려 퍼지는 힘찬 목소리에 지나가던 이들도 모두 넋을 놓고 바라보았고, 우리의 평화의 깃발은 스페인의 바람을 타고 더욱 힘차게 펄럭였다.
“다음 만남은 한국에서 합시다!”
뜨거운 포옹을 나누고 서로의 피로한 어깨를 두드려주며, 그동안 힘들어서 죽을 둥 살 둥 했던 고통들은 산과 들, 바다의 순례길 위에 훌훌 던져버렸다.
“부엔 카미노!” 를 외치며 인생의 귀한 한 자락을 영원히 가슴에 새긴다. 민주평통 유럽총회가 주최한 이 평화의 순례길 위에서, 일흔다섯 부산 할매의 위대하고 유쾌했던 여정도 이렇게 아름답게 결실을 맺는다.
1470호 14면, 2026년 8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