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조선후기 200년의 대표적인 화가 삼원삼재(三園三齋) ⑦ 오원(吾園) 장승업

조선후기 200년의 대표적인 화가를 이야기할 때 가장 뛰어났던 6명의 화가를 삼원삼재(三園三齋)라고 표현한다.

삼원삼재(三園三齋)의 삼원은 호가 원(園)자로 끝나는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오원(吾園) 장승업을 말하며, 삼재는 호가 재(齋)자로 끝나는 겸재(謙齋) 정선, 현재(玄齋) 심사정, 공재(恭齋) 윤두서를 지칭한다. 공재(恭齋) 윤두서 대신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을 포함 시키기도 한다.

오원(吾園) 장승업: 전통화법을 총 결산한 조선 최고의 화가

조선 말기의 천재 화가 오원 장승업(1843~97). 중세적 전통 세계에서 근대 세계로의 변환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던 1870~90년대의 개화기 화단의 최고봉으로 손꼽혔다.

장승업은 시기적으로 조선 왕조가 500년의 긴 역사를 타의에 의해 마감해 가는 암울한 시대를 살았다. 당시 조선 왕조는 내부의 모순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 근성을 배운 일본과 시대적 추세를 거스른 완고한 청나라, 그리고 러시아의 열강의 침략 속에서, 내부 개혁의 의지를 완성시키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몰락해 갔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500년을 지속한 문화대국(文化大國)답게 내부적으로는 풍부한 문화적 토양을 갖고 있었으니, 장승업의 회화는 바로 그런 문화대국 조선왕조가 마지막으로 빛을 발하듯이 배출한 천재화가이다.

장승업은 1843년 중인가문의 대원(大元) 장(張)씨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잃고 이응헌(李應憲)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다. 주인 아이들의 어깨너머로 글과 그림을 배우던 중, 중국의 명화(名畵)들을 구경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신들린 듯 그림을 능숙하게 그리게 되는 천재성을 발휘했다고 한다. 이러한 장승업의 재질일 알아 본 이응헌의 덕분에 장승업은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놀라운 기량과 넘치는 신운(神韻), 그리고 왕성한 창작력으로 장승업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고, 마침내 때문에 그의 명성이 궁중에까지 알려져 고종의 어명에 의해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성품이 호탕하고 어느 것에도 얽매이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술을 매우 좋아하여, 몹시 취하여야만 좋은 그림이 나왔다고 하는 장승업 작품은 강렬한 필법과 묵법, 그리고 과장된 형태와 특이한 설채법이 특징으로 필치가 호방하고 대담하면서도 소탈한 맛이 풍긴다.

장승업은 당시 조선시대 말기 화단의 형식화된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 내면세계 표출에 치중한 문인중심의 화풍) 뿐만 아니라 잊혔던 북종화풍(北宗畵風 ,진한 채색과 사진처럼 꼼꼼한 외형묘사에 주력한 전문화가 중심의 화풍) 및 당시 새로 수입된 최신 유행의 중국화법까지 받아들이면서 종합 절충하여 전통 화법의 총 결산을 이루는 업적을 달성한다.

방황학산초추강도

한 예로 장승업 중기 작품 중 <방황학산초추강도>가 있다. 이 그림은 방(倣)이라는 글자가 붙은 데서 알 수 있듯 중국 화가 왕몽(그의 호가 황학산초이다)이 그린 가을 강변의 풍경을 본뜬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구도는 비슷하되 장승업 그림 속의 산들은 전체적으로 마치 움찔움찔 춤을 추는 듯하고, 바위들에도 무언가 내적인 생명력이 숨겨져 있는 듯하다. 흔히 ‘기운이 생동한다’ ‘신운(神韻)이 감돈다’고 표현되는 장승업 그림의 이같은 자유롭고 활달한 기운은 꽃·풀·나무를 배경으로 새나 동물 따위를 그린 화조영모화에서 더욱 독창적으로 뻗어나갔다.

이렇듯 장승업의 화가로서의 위대성은 어떤 한 가지 유파나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는 뛰어난 기법과 양식적 다양성을 가진 독자적 경지를 이룬 데 있다. 장승업이 즐겨 사용한 기법으로는 필선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는 백묘법(白描法), 정묘하고 아름다운 공필(工筆) 채색화법, 이와는 정반대인 호방한 필묵의 감필법(減筆法), 수묵의 깊은 맛을 보여주는 파묵법(破墨法), 근대적 감각을 보여주는 신선한 선염 담채법, 그리고 최후에 이룩한 깊은 정신미가 깃든 수묵 사의화법(寫意畵法) 등을 들 수 있다.

장승업은 그림의 각 분야에서도 당대를 대표하는 양식을 확립하여 후대의 커다란 모범이 되었으며, 그가 그린 다양한 작품들은 당대 및 후대의 전형이 되었다.

화조영모 10첩 병풍 중

산수화에서는 수많은 전통적 양식을 절충하여 동양적 이상향의 모습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였고, 인물화에서는 진정한 초월적 인간상을, 또 꽃과 새와 강아지나 고양이 등, 털이 있는 짐승을 함께 그린 화조영모화(花鳥翎毛畵)에서는 다양한 소재를 기운 생동하는 필묵법으로 소화해 내었다.

그의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는 그릇과 화초 따위를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서양의 정물화와 비슷하지만, 서양의 정물화는 어떤 특정 대상을 관찰하여 묘사한 것으로 대개 사실적이며 정적(靜的)인 반면, 그의 기명절지화는 소재의 형태를 임의로 변형시키고 붓질을 과감하게 함으로써 활기 찬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그 성격을 달리 한다.

문기 어린 격조보다는 뛰어난 기량으로 평가 받는 그는 안견(安堅),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조선시대의 3대 화가, 또는 정선(鄭敾)을 추가하여 4대 거장으로 꼽히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대화가(大畵家)이다.

예술을 향한 순수한 열정을 구현한 장승업의 생애와 예술은 현대에 있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즉 투철한 예술혼이 없는 외형적 양식 추구가 과연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예술가의 인생 자체와 융합되지 않은 예술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라는 문제 제기에 대한 해답을 바로 장승업 자신의 생애와 작품으로써 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장승업의 회화는 초월적 예술정신의 발현이자 암울했던 시대를 밝힌 찬란한 예술혼으로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1197호 20면, 2020년 12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