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30)

한국전쟁 때 해외로 피난 간 문화재

우리 문화재를 지켜라 ➂

■ 서울 유린한 중공군에 앞서 부산으로 피난 간 유물들

10월 말, 국립박물관은 비밀 간부회의를 갖고 부산으로의 유물 운반계획을 착수했다. 김 관장과 소수의 간부 직원들만이 진행시킨 비밀 작업이었다. 덕수궁 미술관 지하창고에 그대로 보호돼 있던 박물관 미술관 소장품들은 밤중에 트럭에 실려 서울역으로 운반돼 갔다.

서울역에서 군용열차의 특별 화차에 실린 박물관과 미술관 유물들이 아무도 모르게 부산으로 출발한 것은 11월 4일이었다. 예측했던 대로 중공군의 개입이 치열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약 1주 일 만에 부산에 도착한 1차 소개 유물들은 사전에 연락이 되어 급히 안전 창고로 개조한 미 공보관 건물(6 ・25 당시에는 대사관에서 사용했다) 차고에 격납되었다.

유물과 행동을 같이한 사람은 김재원 관장 외 김원용, 최순우, 최영희 등 박물관 간부들뿐이었다. 이들은 1・4후퇴 때까지 3차에 걸쳐 박물관과 미술관 유물을 무사히 부산으로 운반하는 데 성공했다. 중요한 물건은 거의 서울을 떠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남은 물건은 있었다. 서역(西域) 벽화와 같은 큰 덩어리의 귀중한 유물이었다.

인해전술로 유엔군을 위협한 중공군이 재차 서울을 유린했을 때에도 박물관에 남아 있던 유물엔 큰 피해가 없었다. 이번엔 북으로 실어 가려고 한 증거가 뚜렷했으나 기동력의 부족과 유엔의 폭격으로 인한 위험 때문에 결국 뜻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1951년 3월 14일, 유엔군은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다음 날엔 정부 선발대가 서울로 올라왔다. 부산에 내려가 있던 박물관과 미술관에선 이번에도 미국 대사관에 협조를 요청하여 서울에 남아 있는 물건의 각별한 보호조치를 강구했다.

미국 대사관이 이기붕 서울특별시장을 위해 내준 비행기에 국립박물관의 선발대로서 최순우 연구관이 편승하여 서울에 올라온 것은 3월 29일의 일이었다. 박물관 직원으로서 혼자 서울에 올라온 최 연구관은 박물관에 남아 있던 서역 벽화를 위시한 물건들의 포장과 부산으로의 4차, 5차 운반하였다. 중공군이 다시 구파발까지 육박해 오는 춘계공세의 위협을 무릅쓴 임무수행이었다.

2차 서울 수복 후의 두 차례에 걸친 나머지 유물의 부산 이동으로 국립박물관과 덕수궁 미술관 소장품은 거의 완벽하게 보호되었다. 부산의 미국 대사관 차고를 임시 창고로 빌렸던 유물상자들은 뒤에 경남 도지사의 주선으로 부산 시내의 한 약품회사 창고인 4층 콘크리트 건물로 모두 옮겨져 보호되다가 휴전과 함께 서서히 서울로 돌아왔다.

6 25 동란 중에도 국립박물관과 미술관 소장의 국보와 기타 미술 문화재들은 그처럼 완벽하게 보호되었지만 개인 소장품과 지방 사찰의 건물과 국보급 유물 중엔 적절한 대책이 없었던 탓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혹은 행방불명이 된 것이 있었다.

실제로 신라의 종이 출토된 지 2년 만에 전쟁 와중에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1948년 11월 강원도 강릉군 신서면 미천리(현재의 양양군 서림리) 신림원터에서 새로운 신라 종이 발견되었다. 종 안쪽 명문에 신라 애장왕 5년(서기 804년) 제작된 것으로 새겨져 있었다. 발견 이듬해 11월 오대산 월정사로 옮겨 종을 보관했다. 하지만 1951년 중공군 개입 이후 전황이 불리해지자 산사를 태워버리는 작전으로 월정사가 불타면서 이 종도 처참하게 훼손되었다.

■ “역사의 정통성 지켜라”, 미국으로 분산된 한국 문화재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보여주는 또 다른 대목이 있다. 이승만 정부는 남쪽으로 피난 가면서 한국은행에 보관 중이던 금괴를 미국의 민간 은행인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로 옮겼다. 이때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이 소장하던 금관총 금관(국보 제87호), 승마토우, 경주를 벗어나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옥피리 등을 비롯한 유물 139점도 그 편으로 미국에 보냈다.

1950년 7월의 급박했던 유물 대피 상황을 담은 「소개유물목록철(疎開遺物目錄綴)」이 전하고 있다. 「소개유물목록철」에 따르면, 1950년 7월 24일 경상북도지사 조재천으로부터 유물 반출을 권고하는 소개장을 받은 국방부 제3국장 김일환 대령이 7월 25일 경주분관장 최순봉에게 제출하고, 그에게서 유물 15 점을 인수한다. 또 이틀 뒤인 7월 27일 김일환 대령이 다시 경주분관을 찾아가 유물 124점을 인수한다. 김 대령은 모두 139점의 유물을 대구로 이송해 최순주 재무부 장관에게 인계했다.

국립박물관 서울 본관, 부여, 공주의 박물관을 빼앗긴 정부로서는 낙동강 전투 상황에 따라 경주를 빼앗길 경우 국립박물관의 모든 소장 문화재를 북한에 내주는 결과, 즉 문화와 역사의 정통성이 넘어간다는 의미여서 그 조치가 주목할 만하다. 미국으로 보낸 문화재와 유물139점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샌프란시스코 지점에 보관되었다(<박물관신문>, ‘국립박물관아카이브 기행, 15호, 33호’ 기사).

중공군의 개입과 1・4 후퇴로 전세가 또다시 역전되면서 부산으로 피난 간 문화재의 안전이 불안하다는 인식 때문에 이 문화재들을 국외의 안전한 장소로 옮기고, 그중에서 중요 문화재를 미국에서 전시하자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국 문화재를 약탈한다는 공산 진영의 흑색선전을 의식한 미국 정부는 주저했다. 또 해외에 분산하는 것은 전쟁 위협으로부터 한국문화재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겠지만 야당이 한국의 문화 정체성을 대표하는 중요 문화재 전량을 다른 나라로 옮기겠다는 정부 구상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게다가 전선이 중부전선에서 고착화되면서 문화재의 국외 분산 필요성도 크게 낮아졌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휴전이 이루어지고 몇 년 뒤인 1957년 12월 14일부터 18개월간 미국의 주요 8개 도시에서 ‘한국 국보전’이란 이름으로 한국 문화재 첫 순회 전시회가 열렸다. 전쟁 초기 미국으로 피난 간 금관총 금관 등 국립박물관 경주분관 소장품 가운데 13 건도 여기에 합류, 모두 197건이 선보였다.

1311호 30면, 2023년 4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