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72)

라이프치히: 구시가지 골목 모두가 역사의 현장

라이프치히(Leipzig)는 2차 세계대전 전만 하더라도 독일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1915년 완공된 라이프치히 중앙역은 당시 유럽 최대 규모였으며, 1930년대에 인구가 70만명에 이른 독일의 손꼽히는 대도시로서 번영을 구가하였다.

독일의 교육, 상업, 예술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라이프치히는 안타깝게도 동서독 분단 시기를 거치며 동독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과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90년 독일통일 후에 독일 정부와 라이프치히 주민들의 노력으로 라이프치히는 지난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상상력을 통해 변화와 성장을 거듭해왔다. 구동독 지역은 어둡고 위험하다는 여전히 존재하는 선입견의 장벽을 허물어트릴 만큼 매력적인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예부터 출판업이 발달하였고 높은 수준의 오페라 극장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그 전통은 남아있어 독일 내에서 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 중 하나로 꼽힌다. 독일의 대표적 음악가인 바흐(J.S.Bach)의 고장이기도 하다.

라이프치히는 괴테가 ‘작은 파리’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던 도시로도 유명하다. 젊은 시절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수학했던 괴테는 훗날 그의 자서전 ‘시와 진실’에서 생각과 마음이 맞는 지식인들과 한 도시에 모여 살며 교류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다며 당시 라이프치히에서의 삶을 회상했다.

이와 더불어 독일 분단 시절, 구 동독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민중 시위가 열려 통일의 초석을 놓은 도시라는 점은 오늘날까지도 라이프치히 시민들의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성 토마스 교회와 바흐

지난호에서는 바흐의 라이프치히 생활과 성토마스교회(St. Thomaskirche) 내부를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성토마스 교회 외부에서 라이프치히가 바흐의 자취를 기억하는 형식을 살펴보도록 한다.

성 토마스 교회 앞에는 광장이 있어서 시민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이 광장에는 1908년 카를 제프너가 만든 바흐 동상이 있는데, 오늘날 세계적으로 바흐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되었다. 청동으로 만든 이 작품은 바흐의 키를 245㎝로 제작했다.

성 토마스 교회의 800년이 넘는 긴 역사, 그중에서 바흐가 차지하는 27년은 결코 길지 않다. 하지만, 바흐가 라이프치히와 성 토마스 교회에 남긴 음악과 흔적은 분명 적지 않은 무게를 갖고 있다. 성 토마스 교회와 그 주변은 바흐와 그 생애와 업적을 생각하며 충분한 시간을 갖고 둘러볼만하다.

바흐 박물관에서 바흐 음악을 만나다

동상 바로 앞에는 노란색 건물의 바흐박물관(Bach Museum)이 있다. 박물관처럼 보이지 않고 일반인들의 주택 같은 건물에 있다. 언뜻 지나치기 십상이다. 10유로를 내면 바흐의 역대 기록, 악기별 소리 감상, 작곡 시뮬레이션 등을 고루 해볼 수 있다. 한국어로 오디오 투어를 할 수 있다.

바흐 박물관은 토스카나 기둥과 로흘리츠 반암으로 만든 둥근 아치형 포털이 있는 르네상스 양식으로 16세기에 지어졌다. 4층 건물인데 2, 3층에는 돌출형 창문이 있다. 원래는 바흐 가족과 절친이었던 보제(Bose) 가족의 집이다.

바흐는 교회 옆에 교회의 부속건물에서 살았는데, 1902년에 헐렸다. 잘 보존되어있던 보제 가족의 집을 바흐 박물관으로 신설했다. 바흐와 가까이 지내던 보제가는 금은 중개인으로 꽤 부유했다. 보제가족은 건물을 증축하여 콘서트홀과 연회장을 지어 바흐가 연주하도록 했다.

박물관 1층 전시실에는 바흐의 초상화가 여러 점 있으며 악보, 생활용품, 서신과 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2층 전시실에는 바흐의 가계도가 있는데 바흐 가족 전체가 음악가 집안이다. 바흐가 교회에서 사용했던 오르간도 전시되어 있고, 오케스트라에 사용하는 악기도 전시되어 있다. 바흐가 작곡한 작품을 오디오를 통해서 들으며 클래식에 빠져 보아아도 좋다.

이 곳에서는 바하의 일생에 대한 충실한 자료는 물론, 바하와 그의 가문의 음악가들의 작품 감상도 가능하다. 그리고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들도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교향곡에서 특정 악기 소리만 골라 듣는 감상실 등 다양한 시청각 자료들을 충실히 꾸며놓았다.

2층에서는 성토마스 교회와 바흐 동상이 있는 거리가 보인다.

바흐 음악축제

라이프치히에서는 매년 6월마다 약 열흘가량의 일정으로 바흐 음악축제(Bachfest)가 열린다. 도시를 대표하는 음악가 바흐를 기리며 도시 전체에서 그의 음악을 연주하는 클래식 축제의 현장이다.

오페라 극장(Oper Leipzig) 등 공연장은 물론이고, 바흐와 인연이 깊은 성 토마스 교회, 니콜라이교회 등의 교회, 그리고 시장광장(Marktplatz) 등에서도 곳곳에서 바흐의 음악이 울려 퍼진다.

축제 기간 전 세계의 다양한 음악가들과 클래식 애호가들이 바흐를 만나러 라이프치히를 방문한다. 동서독 분단 시기에도 바흐 협회는 둘로 나눠지지 않고 단일 조직을 유지해 한 해씩 동서독 도시를 번갈아 가며 바흐 페스티벌을 개최했다고 한다. 이념과 정치적 갈등을 뛰어넘어 화해와 교류를 가능케 하는 예술의 힘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올해에는 6월 12일부터 6월 22일까지 ‘Transformation’을 주제로 개최된다.

2025년 라이프치히 바흐 음악축제 예매는 지난해 11월 26일 오전 10시부터 시작되었다. ‘Transformation’ 주제로 바흐의 작품 변화 과정을 조명할 예정인데, 200개 이상의 이벤트를 포함하는 대규모 축제로 진행된다.

멘델스존 동상

지난 호에서 살펴본 바움카페에서 성토마스교회로 노는 길에는 녹지가 조성되어 있고, 조그만 공원이 있다. 바로 그 공원에 멘델스존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성 토마스교회에서 보자면 ‘멘델스존 문’(Mendelssohn portal)과 이어져 보이고 있다.

멘델스존 동상이 이곳에 설치되게 된 점은 아마도 바흐와 멘델스존과의 관계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26세의 젊은 나이에 라이프치히 시립교향악단인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Gewandhausorchester)’의 지휘자로 부임했다. 이 기간 멘델스존은 잊혀져 가던 바흐의 곡들을 재발굴해 연주함으로써 바흐를 재조명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1829년 20살이었던 멘델스존이 지휘자로 공식 데뷔하며 지휘한 바흐의 ‘마태수난곡’ 연주는 독일 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마태수난곡’ 뿐 아니라 바흐의 전 작품, 나아가 바로크 시대 모든 음악들이 재조명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은 바흐가 남긴 가장 중요한 종교음악이었음에도 당시에는 사실상 음악계에서 사라진 레퍼토리였다. 멘델스존이 전곡 악보를 얻으려고 여기저기를 수소문하며 돌아다녔으나 구하기 힘들었을 정도였다.

멘델스존이 베를린에서 ‘마태수난곡’을 연주하겠다고 결정했을 때 이를 선뜻 지지해준 사람은 거의 없었다. 화려하고 세련된 낭만주의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이었으니 그렇게 길고 난해한 음악이 청중에게 먹힐 거라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흐 시대에 성 금요일에 교회에서 연주된 곡을 연주회장의 일반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교회로부터 공격을 받을 위험까지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크게 뛰어넘는 것이었다. 무려 천 명이 넘는 청중이 연주회에 몰려왔으며 그보다 몇 배 되는 사람들이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건물 밖에 서 있었다.

그리고 바흐가 활동했던 라이프치히에 온 멘델스존은 본격적으로 바흐의 음악을 세상에 소개하게 된 것이다.

라이프치히에서도 지휘자로서 큰 명성을 얻었던 멘델스존은 그러나 나치 정권 시절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의도적으로 묻혀 지고, 현재 게반트하우스 앞에 자리했던 그의 동상도 철거되어 사라지게 된다.

다행히 2009년 멘델스존 탄생 200주년을 맞아 독일에서는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음악적 업적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라이프치히도 철거되었던 멘델스존의 동상을 시와 민간이 기금을 모아 현재자리에 복원했다.

신 시청사

성토마스교회에서 계속해서 구시가지로 내려가면, 구시가지 끄트머리에 만들어진 신 시청사(Neues Rathaus)를 만나게 된다. 신청사를 접하는 방문객들은 그야말로 궁전을 연상케 하는 웅장한 건물에 압도당하게 된다.

신총사의 완공연도는 1905년. 당시 유럽 최대의 기차역을 지을 정도로 강성하고 부유했던 라이프치히답게 새로운 시청사 건물도 아낌없이 화려하게 건축하였다.

당시 작센 공국은 라이프치히에 있던 플라이센 성(Pleißenburg)을 인수한 뒤 그것을 개조하여 현재의 신 시청사로 개조하였기에 어쩌면 궁전을 연상케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플라이센 성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와도 관련이 있는데, 작센공의 후원으로 1519년 가톨릭의 대표자와 성서 교리에 대하여 갑론을박했던 소위 “라이프치히 논쟁”의 장소이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루터는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이단으로 지목되어 파문당하게 된다.

신시청사는 여러 건물이 복합적으로 연결된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으며, 그 중앙에 가장 높이 솟은 탑의 높이는 114.7m에 이르고 있다. 시청사가 차지하는 면적은 건축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시청이었다고 하고, 시청탑 역시 현재 독일에서 가장 높다.

라이프치히 신청사는 라이프치히를 상징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연방 행정법원

신 시청사에서 구 시가지를 벗어난 바로 건너편에는, 궁전 같은 신 시청사에도 뒤지지 않는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건축물이 있다. 흡사 베를린의 연방의회 의사당(Bundestag 1894년 완공)을 연상케 하는데, 마침 건축년도도 1895년 완공으로 연방의회 의사당과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

이 건물은 궁전도, 시청사도 아닌, 독일의 연방행정법원(Bundesverwaltungsgericht)이다. 

입구는 신전을 연상케 하는 신고전주의 양식, 그러나 전체적인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혼합하였다. 내부로 들어가면 웅장한 로비와 대법원 박물관을 여행자들도 구경할 수 있다. 법원 건물 앞은 넓은 광장이 있으며, 그 옆으로 개천이 흐르고 있다.

1394호 20면, 2025년 1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