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이프치히: 구시가지 골목 모두가 역사의 현장 ⑨(마지막회)
라이프치히(Leipzig)는 2차 세계대전 전만 하더라도 독일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1915년 완공된 라이프치히 중앙역은 당시 유럽 최대 규모였으며, 1930년대에 인구가 70만명에 이른 독일의 손꼽히는 대도시로서 번영을 구가하였다.
독일의 교육, 상업, 예술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라이프치히는 안타깝게도 동서독 분단 시기를 거치며 동독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과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90년 독일통일 후에 독일 정부와 라이프치히 주민들의 노력으로 라이프치히는 지난 역사와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상상력을 통해 변화와 성장을 거듭해왔다. 구동독 지역은 어둡고 위험하다는 여전히 존재하는 선입견의 장벽을 허물어트릴 만큼 매력적인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예부터 출판업이 발달하였고 높은 수준의 오페라 극장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그 전통은 남아있어 독일 내에서 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 중 하나로 꼽힌다. 독일의 대표적 음악가인 바흐(J.S.Bach)의 고장이기도 하다.
라이프치히는 괴테가 ‘작은 파리’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던 도시로도 유명하다. 젊은 시절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수학했던 괴테는 훗날 그의 자서전 ‘시와 진실’에서 생각과 마음이 맞는 지식인들과 한 도시에 모여 살며 교류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은 없다며 당시 라이프치히에서의 삶을 회상했다.
이와 더불어 독일 분단 시절, 구 동독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민중 시위가 열려 통일의 초석을 놓은 도시라는 점은 오늘날까지도 라이프치히 시민들의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 라이프치히 역사산책을 마치며
중세 이래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 그리고 독일 현대사의 최대 역사적 사건인 독일 통일의 현장인 라이프치히 구 시가지를 8회에 걸쳐 살펴보았다. 이제 라이프치히 역사산책을 마치며, 라이프치히 구시가지 뿐만 아니라, 시 외곽의, 독자들이 방문해 볼만한 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라이프치히를 방문한 독자들은 이곳도 들러볼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라이프치히 전투 기념비(Völkerschlachtdenkmal)
라이프치히 외곽에는 거대한 돌의 탑이 있다.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있었던 이른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게 위한 전승탑이다.
1813년 10월 나폴레옹은 연합군(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등)과 라이프치히 근처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이 전투는 ‘라이프치히 전투’ 또는 ‘국민들의 전투(Völkerschlacht)’로 알려져 있으며, 나폴레옹 제국의 몰락을 예고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라이프치히 전투는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 중 하나였으며, 약 60만 명의 병력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나폴레옹 측 부대 20만명,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 38만명이 맞붙어 양측에서 10만명의 사상자를 낸 죽음의 전투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기념비 앞에 있는 커다란 인공호수를 가리켜 ‘전사한 군인들이 흘린 눈물’이라고 부른다.
라이프치히 전투는 나폴레옹에게 참패로 끝났다.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프랑스로 퇴각해야 했고, 이는 그의 제국 쇠퇴의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으며, 1814년 나폴레옹이 엠스 조약을 체결하면서 결국 황제직을 물러나게 된다.
이후 전후 유럽의 정치적 재편성이 시작되었는데, 유럽은 빈 회의(Congress of Vienna)를 통해 새롭게 재편성되었다.
라이프치히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전쟁 중 가장 규모가 큰 전투로 꼽힌다. 그만큼 많은 사상자가 나왔고, 그것은 승자인 프로이센 연합군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승리를 기념하고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전투 100주년인 1913년 이 곳에 기념비가 세워진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 곳은 히틀러가 사랑했던 장소 중 한 곳이다. 게르만군(물론 연합군이었으나)이 외세를 물리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이 몹시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히틀러가 라이프치히에 들르면 항상 이 곳에서 연설을 했다고 한다.
라이프치히 전투 기념비는 둥근 벽 전체는 거대한 신전처럼 웅장한 조각이 둘러 새겨져 있고, 중앙에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꽃이 놓여져 있다. 조명도 잘 들어오지 않는 엄숙한 분위기이다.
전망대에 오르면 라이프치히 시내를 360도 파노라마로 조망할 수 있다. 전망대는 크게 세 층으로 나뉜다. 첫번째 층까지는 엘리베이터로 오를 수 있고, 그 다음부터는 좁은 계단으로 올라야 한다. 마지막 층은 기념비의 꼭대기. 뾰족한 탑이 아니라 평평한 옥상이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라이프치히 젊은이들의 문화의 출발지, 칼리와 플라그비츠
젊은이들의 중심지로 자리잡은 칼리(KarLi)의 원래 명칭은 ‘칼 립크네히트 거리(Karl-Liebknecht-Straße)’인데 줄여서 칼리라고 불린다.
칼 립크네히트는 라이프치히 출신으로 독일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정치가이다. 반전주의자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소속 당이었던 사민당의 전쟁 협력 노선에 단호히 반대하다 당에서 축출되었고, 이후 1918년 독일 공산당(KDP) 창당을 주도했다. 동독 시절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통일 이후에도 계속 거리 명칭을 유지하고 있다.
2km 정도 일직선으로 뻗은 도로를 양쪽으로 레스토랑, 노천카페, 바, 클럽, 문화공간들이 즐비해 있다. 라이프치히 시내 중심가에서 멀지 않고, 상대적으로 집세가 저렴해 학생들이 많이 주거하다 보니 자연스레 젊은 거리가 형성되었다. 자유롭고 다채로운 분위기가 거리의 매력을 한껏 더해준다.
칼리 거리가 인기를 얻자 역시나 이곳에서도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피할 수 없었다. 월세와 물가가 올랐고 이렇게 오른 가격이 부담스러운 청춘들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나섰다. 이들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플라그비츠(Plagwitz)’다.
동독 시절까지 공장들이 즐비한 산업 단지로 역할을 하던 이곳은 통일 후 동독의 기업들이 거의 문을 닫으면서 폐허처럼 남겨지게 되었다. 남겨진 빈 건물에 예술가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이어 가난한 젊은이들이 저렴한 집을 찾아 옮겨오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되었다. 지금은 라이프치히 창작자들의 활동과 젊은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대표지역으로 자리 잡고 있다.
방직공장에서 문화예술의 메카로
플라그비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슈피너라이(Spinnerei)’이다. 번역하면 방직공장이라는 뜻이다.
유명 문화예술 공간이지만 원래 이곳은 동독 시절까지 방직공장단지였다. 1990년대 초까지 유럽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 통일 후 이 단지도 문을 닫았는데, 이후 라이프히시와 민간이 협력해 이곳을 복합문화예술 단지로 조성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예술가들은 이곳에서 ‘목화에서 문화로’의 슬로건 아래 다양한 예술 형태를 추구하며 오래된 강관들을 이용한 정성스러운 조각품,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표현주의 그림, 멀티미디어 룸 설치작품 등을 만든다.
역사적인 건축물 안에 자리한 많은 작업실들은 라이프치히 예술계의 중심지를 이루며, 네오 라우흐와 같은 유명한 예술가들과 함께 1990년대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회화 사조인 ‘신 라이프치히 학파(Neue Leipziger Schule)’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곳 지구의 독특한 분위기를 제대로 경험하려면 자전거로 창업자 시대의 건물, 역사적인 공장 건물, 다채로운 그래피티, 칼 하이네 운하의 물가를 따라 달리며 둘러보는 것이 최고다.
슈피너라이는 그동안 미술뿐만 아니라 그래픽, 패션, 공예, 공연, 영화 등 다양한 분야 창작자들까지 함께 활동하는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성장해왔다. 성공적인 도시재생 사례로도 한국을 비롯한 해외에 많이 소개되고 있다.
‘신라이프치히 화파’
세계 미술계에서 독일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한 ‘신라이프치히 화파(New Leipzig School)’는 ‘회화의 부활’을 선도하는 미술집단으로 손꼽힌다. 이들은 설치, 미디어아트에 밀려 날로 그 입지가 좁아지는 회화의 본령을 끈질기게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가의 손맛을 느끼게 하는 아날로그적 표현방식과 옛 동독이라는 지역적 특수성 등은 오늘날 세계로 하여금 ‘신라이프치히 화파’를 주목하게 한다.
‘라이프치히 화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공산 치하의 옛 동독에서 급변하는 외국의 사조와 단절된 채 사회주의적 작품의 전통을 이어갔다. 대상의 사실적 표현에 충실했던 것이다.
라이프치히 화파는 일찍이 1960년대부터 서구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라이프치히 화파의 초기 세대인 베른하르트 하이지히(Bernhard Heisig), 볼프강 마토이어(Wolfgang Mattheuer), 베르너 튑케(Werner Tubke) 등은 구동독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배경으로 개인의 두려움과 무기력함 그리고 그 속에서 싹트는 욕망을 그들만의 스타일로 만들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고, 이후 1977년 카셀도큐멘타에서 등장하면서 국제적 화단으로 인식되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며 새 사조가 유입됐지만, 이들은 전통을 유지하며 ‘신라이프치히 화파’를 구축했다.
네오 라우흐(Neo Rausch)라는 탁월한 작가를 중심으로 라이프치히 출신들인 팀 아이텔, 틸로 바움개르텔, 안나 테센노 등이 ‘신라이프치히 화파’의 대표 주자로 꼽힌다. 팀 아이텔의 경우, 현대적 건축물 안에서 무언가에 몰두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주로 그려 낸다. 관람객으로 하여금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라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작가의 매력이라고 한다.
신라이프치히 화파는 라이프치히 시각예술대학교의 교수인 네오 라우흐와 이 학교 출신의 화가들이 주축이 되어, 기존의 라이프치히 화파의 독특한 풍토를 계승하고 거기에 현대의 다양한 매체에 대한 실험과 주제가 덧붙여져 오늘날 미술시장에서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되는 화파이다.
1408호 20면, 2025년 4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