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열
남기고 싶은 이야기 2
나는 해마다 또는 한 해에도 몇 번씩 한국 행 비행기를 탄다. 그러면서 셀 수 없을 만큼 독일과 한국 공항을 오갔다. 그 가운데 내 기억 저 깊은 곳에 오롯이 남아 있는 공항에 관한 추억은 내가 처음 한국을 떠나올 때와 독일에 도착했을 때의 공항에 관한 기억이다.
우리집은 아버지의 소천 이후 오빠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오빠는 어선을 사서 고기잡이 사업을 운영해왔다. 그러던 어느 날 풍랑과 태풍에 휩쓸려 배와 그물 등 모든 것이 풍비박산이 났다. 오빠는 다시 사업을 일으켜 보려고 애를 썼으나 너무 크게 타격을 입은지라 쉽게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우리 가족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직격으로 맞았고 이를 견디는 힘든 시기를 보냈다. 그때 나 역시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친척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다가 서울 더 큰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파독간호사에 관한 소식을 접했다. 그때 나는 간호사로 독일에 갔다가 오면 가족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보탬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말하지 않고 파독간호사를 신청하고 준비하여 출국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출발하기 하루 이틀 전에 가족들에게 독일에 가는 것을 말씀드렸다. 예상대로 가족들은 막내 딸이 간호사가 되어 독일에 가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그렇지만 내 의지는 확고했다. 힘든 경제사정을 극복하려 애쓰는 가족들을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한국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이 기회를 통해 가족들이 안정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고집을 막을 수 없었던 가족들이 김포 공항에 나왔을 때 우리 가족들은 그야말로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그렇게 나를 보냈던 김포공항에서의 가족과 이별기억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한편, 청운의 꿈을 안고 동료 간호사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독일 공항은 한국의 공항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오후 늦게 어둑어둑한 저녁, 비행기에서 내린 우리들은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고 무슨 번호로 불려졌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각각의 병원에서 나온 사람들이 호명한 번호에 따라 함께 왔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갔다. 춥고 쌀쌀했던 날씨와 어두웠던 주변 모습, 그리고 모든 것이 낯설어 초조했던 그때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함께 왔던 사람들과 헤어져 나와 몇몇 사람들은 낯선 자동차를 타고 끝없이 어둠속을 달려갔다. 그때의 불안한 기억들이 내가 처음에 독일에 도착했을 때의 공항과 관련한 기억들이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도 없고 물어볼 수도 없었던 그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병원에 도착하여 깨끗하고 비교적 안락해 보이는 숙소에 짐을 풀었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병원에서 등록해준 어학원에서 3개월동안 독일어를 배웠다. 그리고 3개월의 언어 연수가 끝난 후 우리는 병원에서 간호사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주머니에 독일어 사전을 넣고 다니며 사전이 다 헤질 때까지 단어들을 외우고 또 외웠다. 딱 3년만 일하고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3년을 정말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 중에는 일의 고됨과 아울러 향수, 그리고 이국의 낯섦을 감당하지 못해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아 결국 귀국을 택한 경우도 있었으나 나는 독일에서의 생활이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체계적이고 질서 있게 일하는 독일 병원의 시스템도 좋았고 예의를 지키며 친절한 독일인 동료들에게서 배우는 점도 많았다.
그렇지만 독일어가 나의 모국어가 아니었기에 소통에 한계가 있었고 덩치가 산만한 독일 환자들을 돌보는 것에는 체구가 작은 동양 여성인 내가 감당하기에 버거운 일이었다. 나는 월급을 받으면 집세와 한 달 동안 먹을 생활비 약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가족들에게 송금하였다. 나는 힘들었어도 송금하여 가족들에게 보탬이 되는 것이 너무나 행복했고 감사했다. 그래서 나는 늘 환자들을 대할 때 행복한 모습으로 대했고 독일인 동료 간호사와도 좋은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3년을 보낸 후 다시 연장할 기회가 있었기에 조금 더 일하기로 했다. 연장을 하고 난 후 내가 근무하던 병원에 입원한 시누이의 소개로 남편을 만났다.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남편과 결혼을 결심했고 그 선택으로 독일에 정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50년이 넘는 세월을 독일에서 살고 있다.
결혼 후 아이들을 낳으면서 전일제로 일했던 간호사 일을 파트타임으로 바꾸었고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양육에 집중해야 했으므로 정다웠던 동료들을 뒤로하고 간호사 일을 떠났다. 그리고 아이들 키우기에 전념하면서도 시어머니의 친정어머니를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도 시켜드리고 시장에도 같이 가며 산책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시간들은 내가 남편의 가족과 나누었던 즐겁고 행복한 시간 중 하나이다.
그렇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나는 시아버지의 권고에 따라 남편과 함께 당시 동독지역에 있던 풍차 건물을 리모델링한 호텔을 경영하게 되었다. 호텔이 있던 위커뮌데 지역은 풍광이 아름답고 많은 레저를 즐길 수 있는 지역이었으나 당시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호텔에 손님이 차고 넘치지 않았다. 그러한 형편이었으므로 나는 호텔을 활성화할 방안을 늘 연구했다.

그때 마침 지역에서 녹색박람회가 열렸기에 가보니 그곳도 손님이 없어 박람회라는 이름이 무색했다. 이에 나는 우리 호텔 뿐 아니라 박람회도 같이 상생할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박람회에 손님들이 차고 넘치면 더불어 우리 호텔에도 투숙객이 늘어날 것이기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문득 우리 어머니들이 장에 나가실 때 큰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가셨던 것이 생각났다. 여기에 착안하여 큰 모자에 호텔의 상징과도 같은 풍차 모형을 얹어 박람회에서 홍보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아이디어가 결정되고 난 후 이웃이고 재봉사이며 의류 디자이너 친구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현실화 한 풍차를 얹은 대형 모자를 완성했다.
그 모자를 쓰고 의상은 멋지고 화려한 독일 전통의상을 입고 어깨에는 띠를 둘렀다. 그리고 나 자신이 광고의 아이콘이 되어 박람회에 갔다.
당시 큰 볼거리가 부족했던 박람회에 머리에 풍차 모형이 있는 대형 모자를 쓰고 독일 전통 드레스를 입고 박람회를 누비는 한 동양여성인 내 모습은 단연 화제가 되었다.
그래서 박람회를 소개하려 온 전세계의 TV, 신문 기자들은 내게 와서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했다. 나는 인터뷰에서 박람회가 열리는 그 지역의 아름다운 장소들과 먹거리, 트레킹 코스, 자전거, 요트 등을 즐길 수 있는 장점들을 홍보했다. 그리고 아울러 우리 호텔 숙박권을 상품으로 받을 수 있는 퀴즈를 내는 등의 아이디어들을 실행했다.


나는 매해 열리는 그 녹색박람회를 위해 해마다 다른 주제의 대형 모자와 의상들을 제작했다. 유난히 더웠던 어느 해에는 노란 해바라기를 모티브로 모자를 제작했고 또 다른 해에는 그 지역의 특산품이기도 한 대형 생선을 만들어 모자에 장식했다. 매해 새로운 아이템으로 홍보를 하면서 방송 매체는 나를 해마다 계속해서 취재했다. 이에 따라 전파를 타고 유럽 등지와 세계로 녹색박람회가 홍보되었고 이와 아울러 박람회가 열리는 지역의 특성과 장점들이 소개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관광객이 우리 호텔이 있는 지역으로 모여들었고 우리 호텔 투숙객도 빈방이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이와 아울러 나는 우리 호텔에 투숙하는 고객에게 세심한 정성을 기울였다.
투숙객 중에 아이들이 있는 경우 새학기엔 문구류를 예쁘게 포장하여 선물을 주기도 하였고 한국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마다 한국 문화의 밤을 마련하여 한국 전통문화와 음식을 제공했다.
사람들은 나와 우리 호텔을 통해 한국을 접하는 것이므로 나는 한국음식은 직접 만들었고 한국 문화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보여주기 위해 독일거주 한인들과 주독 한국 대사관 등과 함께 협력하여 아이디어를 짜고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실행하였다.
나는 녹색박람회에 17년 동안 참여하였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므로 호텔 경영이 버거워질 것을 대비해 남편의 의견에 따라 호텔을 매각하기로 했다. 호텔 매각 후 17년 동안 녹색 박람회에서 사용했던 모자들과 의상들을 위커뮌데 시에 기증하였다. 위커뮌데 시장은 그동안 지역과 상생하기 위한 나의 노력에 깊은 감사를 해주었다. 나는 이주민이며 동양여성에 대한 편견을 넘어서서 나를 진정한 이웃으로 대한 독일인들에게 감동받았다.

위커뮌데 시는 내가 호텔을 매각하는 것과 아울러 녹색박람회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는 것을 매우 아쉬워했고 대신 위커뮌데 시의 홍보이사로 계속 활동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이에 동의했고 지금도 계속 활동 중에 있다. 또한 위커뮌데 시는 지난 2023년에 녹색박람회에 참석했던 모자들과 의상들을 모아 작은 전시회를 열어주었다. 원래 3개월을 하기로 했으나 이를 더 연장하여 6개월 동안 전시실을 마련해 운영해주었다.
너무 감사한 마음이고 또한 내가 살던 위커뮌데 풍차호텔 주변의 마을 사람들도 내가 베를린으로 가는 것에 대해 몹시 아쉬워하고 사랑을 표현해주었다. 내가 살던 시와 마을 주민들의 마음이 그대로 내게도 전해져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는 오랜 세월을 독일에서 살면서 독일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었고 내 마음은 그들에 대한 사랑으로 채워졌다. 그러면서도 떠나온 내 조국에 대한 사랑도 늘 내마음속에 출렁인다.
한국은 한번도 잊지 못했고 잊을 수 없는 내 나라이다. 내가 독일에 살기 때문에 한국어를 마음껏 사용하지 못하고 살지만, 한국과 한국어와 한국 문화는 언제나 내게 뭉클한 감정을 일으킨다. 나는 독일에 살면서 내가 간호사로 근무할 때나 집에서 아이들을 양육할 때나 그리고 박람회와 호텔경영 등으로 바쁘고 고단할 때도 내 몸을 편하게 두지 않았다.
나는 늘 바쁘게 움직였고 만사를 완벽하게 하기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온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도 이를 악물고 스스로 치유하며 버텨왔다. 그것은 내 주변사람들이 나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를 그렇게 단련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내가 독일에 일하러 와서 이곳에 정착할 결심을 하고 살아온 것은 쉽게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수없이 고민한 끝에 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내게 꽃 길 만은 아니었다. 아마도 당시에 한국으로 귀국하는 선택을 했더라도 그 길이 꽃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 인생은 꽃같이 곱고 아름다운 길로만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독일에서 살아온 길이 때로 고독하고, 때로 기쁘고, 때로는 고통이었다고 해도 나는 내 선택에 책임을 졌고 내 삶을 사랑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서 내 삶을 살아왔다. 실수가 없었다고 말할 수 없고 모든 것이 훌륭하다고만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매 순간 나의 선택에 집중했고 내 모든 힘을 기울여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 삶에 나는 만족하며 감사한다. 나는 살아오는 동안 나와 함께 했던 모든 이에게 감사한다. 나는 내 나라 대한민국에도 감사하고 내 친정 가족들을 깊이 사랑한다. 그리고 나의 두 번째 조국이 된 독일도 사랑하고 독일의 가족들도 온마음을 다해 사랑한다. 내가 한국에 살든 독일에 살든 나는 언제나 나였고 금후 어느 때라도 그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글을 마치며 정리하자면 내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감사와 사랑이다. 나는 내 삶에 감사하고 나와 함께 한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내 삶과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것이 내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인 것 같다.
감사합니다.
1459호 14면, 2026년 5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