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바람 찬바람에

유완숙

독일에 온지 45 년이 넘었다.

참으로 긴 세월이다.

스물다섯 살에 독일에 왔으니 내가 이 세상에 나서 살아 온 것은 더 긴 세월이다. 생각할수록 긴 세월, 그 70년 동안엔 한 일도 많고 일어난 일도 많다. 독일 사람인 남편과 결혼한지도 42년이나 되었고 이젠 우리 아이들도 벌써 어른이 되었다.

남편은 그동안 우리가 한 일 가운데 우리 두 아이들을 낳아 키우고 공부시켜 애들이 그만한 직업을 가지고 자립해서 잘 살 수 있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고, 이제는 안심이라고 가끔 이야기 한다.

이제 나는 이곳에 처음 왔을 때처럼 한국에 있는 엄마와 형제들이 그리워서 슬퍼하거나 애타게 향수에 빠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언제나 한국을 내 마음속에 간직하고 산다.

한국에 좋은 일이 생기고 텔레비전에 좋은 뉴스를 들으면 기쁘고 자랑스럽다.

금방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2002년 월드컵 축구시합 때 한국이 4강을 달성했을 때이다. 그 기쁨을 나누는 우리국민들의 모습이 정말 자랑스러웠다. 붉은 옷을 입고 “필승 Korea”를 외치며 거리를 붉게, 아름답게 물결치듯 하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내 가슴이 뜨거워진다.

얼마 전의 Corona 19 사건도 그렇다. 갑자기 감염된 환자가 늘어나 큰일 났다는 생각을 한지 얼마 만에 정치가들의 신속한 결정과 국민들의 협조로 좋게 처리된 것을 본보기로 하자는 유럽신문을 읽으면 여기에 살고 있는 한국친구들과 나는 모두 자랑스러워했다.

물론 한국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좀 부끄러울 때도 있다. 당장 생각이 나지 않지만 여기에 사는 한국친구와 전화하며 “한국에서… 그래서… 창피스럽다” 할 때도 있었다.

내 가슴속에는 25년을 살았던 한국의 정신이 뿌리박혀 있고, 우리 어머니와 학교선생님의 교육은 나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나는 훨훨 날개를 치며 날라 독일을 온 것 같다. 실로 나는 한국과 독일을 왔다 갔다 하며 살고 있다. 몸이 왔다 갔다 할 때도 있지만 나의 정신은 더 빨리 두 나라를 오고 간다.

나이가 든 탓인지 요새 Corona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그런지 옛날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우리 아버지는 엄마가 서른다섯 살 때 애 다섯과 자기 어머니를 두고 돌아가셨다.

엄마는 부잣집 딸이었다. 역시 부잣집 며느리로 시집을 왔었지만 그전에 시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선산에 서서 남쪽에 멀리 보이는 땅이 다 우리 땅이라고 하셨던 그렇게 많은 땅이 몇 년 전에 있었던 토지개혁으로 인해 토지의 대부분이 소작인에게 넘어가, 사는 것이 옛날 같지 않았다.

동네사람들은 젊고 고운 과부가 혹이 다섯 개나 달렸다고 했다. 혹은 우리를 두고 한 말이었다. 할머니는 애 다섯을 두고 엄마가 어느 날 도망이라도 가버릴까 겁이 났다고 한다. 큰언니가 그때 열두 살이었는데 엄마는 우리 식구를 두고 도망갈 사람이 아니라고 할머니한테 화를 냈다고 한다.

우리는 평생 엄마가 불쌍했다. 엄마의 고달픔이나 외로움이 우리에게 전해 오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와 우리는 될 수 있으면 엄마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으나 별 방도가 없었고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면 엄마가 제일 좋아한다고 할머니가 말씀 하셨다.

저녁에 오빠들이 밥상에 앉아 숙제를 하거나 다음날 학교에 가지고갈 물건을 챙겼는데 자주 누구하나가 뭔가를 잘못해 야단을 맞으면 한방에 있는 딴 오빠나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는 나까지 야단을 맞는 기분이 들었다. 주로 숙제를 한 글씨가 삐뚤삐뚤하거나 필통의 연필이 뭉텅한 채로 있는 것이 이유였는데 엄마의 화가 풀릴 때까지 우리는 주눅이 들어 숨소리도 죽여 가며 이불속으로 자러 들어갔다.

오빠들이 숙제도 잘하고 가방도 깨끗해 야단을 맞지 않은 날에는 내가 막내였기 때문에 어리광을 부리며 엄마 옆에서 잤다. 잠이 들락 말락 해서 뒤척거리는 나를 쓰다듬어 주시던 엄마의 따듯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아직도 느껴지는 듯하다.

한번은 우리 동네에 새미장원이 생겨 그때처음으로 파마라는 것을 한다고 소문이 났다. 창녕 읍에 있는 쪽을 찌른 엄마 친구들이 모여 같이 파마를 하자고 웅성거렸다. 내 기억으로 그때 엄마와 그 친구들이 마흔 둘 셋 정도 되었는데 쪽을 찌르고 한복을 입은 모습이 지금 그 나이 사람들보다 비교가 안 되게 훨씬 나이 들어 보이던 생각이 난다.

마루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가 “니도 파마 할끼가?” 하고 물으셨다. 엄마는 “모르겠다”고 하며 그래도 친구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셨다. 저녁에 엄마는 여전히 쪽을 찌르고 돌아오셨다 할머니와 나는 왜 파마를 안했느냐고 섭섭해 하자 “신랑도 없는데 파마하면 뭐합니꺼” 하며 저녁을 차리러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엄마의 고운 얼굴에 파마한 머리를 상상해 보던 나는 실망이 컸고 엄마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 며칠 동안 마음이 우울했다. 뒤에 알고 보니 엄마친구들은 할머니말로 다 머리를 뽀글뽀글 볶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97세까지 큰언니가 살던 면목동 아파트 바로 옆 동에서 착한 아줌마를 두고 사시면서 “나는 신랑복은 없어도 자식 복이 많아서 늘그막에 행복하다고 하셨다.” 독일에 처음 오실 땐 “딸 낳으면 비행기 탄다카는데 그 말 맞다” 하시며 기뻐 하셨다. 그리고 그 후 독일을 4번 더 오시고 오시면 한국에서 언니오빠들이 빨리 오시라고 할 때까지 계시면서 한국에서 가지고 오신 국어책으로 우리 딸에게 한국말도 많이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우리 딸은 경상도 억양으로 한국말을 꽤 잘한다. 한국에 전화할 때는 “할무이 어떻게 지내심니꺼” 하고 시작해 우리를 웃게 했다. 좀 더 커서 한국에 갔을 때는 아침에 눈을 뜨면 옆에서 주무시던 할머니가 경대에 앉아 기름 바른 긴 머리를 곱게 빗으시며 비녀로 쪽을 찌시던 손재주와 그 단정한 모습이 생각난다고 한다. 그때 할머니가 주신 은비녀 하나도 잘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가 80세가 넘자 언니오빠들은 엄마를 독일로 보내는 것이 위험하다고 못가시게 했다. 그때부터 나는 일 년에 한 번씩 엄마를 뵈러 한국에 나갔다. 언니는 내가 오는 날을 벽에 걸린 엄마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철새 오는 날” 이라고 썼다. 나는 철새처럼 가을만 되면 영락없이 한국으로 날아갔다. 15년이 넘게 일 년에 한 달씩 엄마와 단둘이 15평짜리 작고 아늑한 아파트에서 살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집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엄마가 양파를 썰다가 눈물을 흘려 아버지가 ‘집 생각이 나서 우는가’ 오해를 하고 다음날 친정에 간 이야기, 옛날에는 세탁기커녕 수돗물도 없어 시냇물이 흐르는 도랑이나 우물가에서 빨래를 한 이야기, 할머니와 엄마가 다투면 내가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다가 서로 웃으며 이야기 하면 마음이 놓였던 이야기, 엄마가 군청에서 장한 어머니상을 타고 집에 와서 모두 같이 울었던 이야기, 큰언니 약혼식 때 큰오빠가 명곡을 부르지 않고 외국 팝송을 불러 형부가 눈을 흘긴 이야기,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그리고 가까운 언니 집은 물론 엄마가 혼자가시기 힘든 오빠집이나 친척집으로 나들이도 했다. 또 내 동창생이 찾아오면 “니가 향숙이가? 아이구! 부잣집 마느래라미…” 하며 반가워 하셨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는 요가부터 시작 했다. 아파트 사무실에서 노인을 위한 건강관리 강의를 할 때 경희대학 중국의학과 의사가 와서 가르친 것이라고 하시며 시범을 하셨는데 오장육부를 자극 하는 요가였다. 나는 그것이 너무 마음에 들어 아직도 자주 남편과 그 요가를 한다.

오후에는 길 건너 있는 방둑 길을 걸으며 다리운동도 중요하니 내가 독일로 가고 나면 아줌마와 매일 방둑을 걸으시라고 당부했다. 저녁에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사극이나 드라마는 빠뜨리지 않고 꼭 보았다.

청계천이 아름다운 계곡으로 변했을 때 엄마가 너무 고령이라 걸을 수가 없어 휠체어에 엄마를 태워 택시를 타고 청계천을 갔다. 조그맣고 힘도 별로 없는 나에겐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용기 하나만 가지고 그런 일을 가끔씩 한다. 친절한 택시기사가 도와주고 지나가는 학생도 불러서 도와달라고 했다. 그런 면에서 너무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한국이 좋다. “아이구 ! 누가 이렇게 잘 해놨노” 하시며 좋아하시고 싸가지고 온 말랑말랑한 약밥을 같이 먹으며 아름답고 깨끗하게 흐르는 물가에 앉아 가을 햇살을 즐겼다.

10년 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15년동안 점점 줄어드는 엄마의 모습이 안타까워 독일로 돌아갈 때마다 눈물을 글썽거리는 나에게 “내 안 죽는다 내년에 또 오너라” 고 말씀 하셨다. 지나고나니 엄마와 지나던 그때가 나에겐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보물 같은 시간이었다.

이제는 나는 우리거실에 있는 사진으로 엄마를 뵌다. 그때 80이 넘어 조카 결혼식에서 찍은 사진인데 미색 한복을 입으시고 무얼 생각하는 듯 한 단단한 그 모습 속에는 엄마의 인생을 동반하던 고독과 용기, 체념이 나타나 보인다.

남편과 나는 내가 한국에서 처음 왔을 때 일했던 병원이 있는 Goch라는 조그만 도시에서 살고 있다가 남편이 대학을 졸업하자 함부르크에 있는 회사에 취직이 되어 함부르크 근처에 있는 작은 도시 Winsen으로 이사를 왔다.

시부모와 시누이들이 몹시 서운해 하셨다. 시댁 사람들은 진실한 가톨릭 신자이고 모두 순하고 조용한 사람들이다. 독일 음식이나 케이크를 굽는 것은 다 시어머니한테 배웠고. 그때 내가 병원에 일을 나가면 항상 손녀를 즐겁게 돌봐 주셨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이오면 꼭 아이들을 데리고 400km를 달려 즐거운 시간을 같이 보냈다. 인제는 모두 하늘에서 우리를 돌봐주고 계신다.

어느새 40년 동안 살고 있는 이 동네는 옛날부터 대대로 여기서 살고 있는 농부들과 40년 전에 그때 우리같이 젊은 부부들이 와서 집을 짓고 아이를 낳고 정착한 사람들이 어울려 살고 있는 동네이다. 우리는 아직도 감자나 채소 달걀 등을 농부들에게 직접 살 수 있고, 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평화롭고 조용한 곳이다. 이제는 이곳이 우리의 고향이 된 것 같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며 친구를 사귈 때 나도 그 아이들의 엄마들과 조금씩 가까워 지기시작 했다.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뿔뿔이 자기가 택한 대학이나 직업학교를 가고 나서도 우리는 부모끼리 계속 만나며 운동을 하거나 같이 차나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야간학교에 가서 요리 강습을 받기도 했다. 40년 동안 보고 만나고 웃고 하다 보니 친구가 되었다. 이곳에 다른 한국 사람이 없는 탓인지 나는 함부르크에 사는 한국 친구에 비해 독일 친구가 많다. 독일 사람도 오래 사귀면 한국 친구나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이 사람 들은 가능한 한 친구나 아는 사람에게 신세를 지지 않으려 하고 남의 일에 상관을 하지 않는데 처음엔 그것이 인정 없이 생각되었지만 살다보면 그 장점을 이해하게 되고 나도 그렇게 하게 되었다.

처음에 “한국이 어디 있지” 하고 물어보던 이곳 독일 친구들은 이제 나한테 들어 한국을 꽤 잘 알게 되었고 한국을 무척 좋게 생각한다. 특히 1년에 한번 우리 남편의 생일이 되면 내가 차려놓은 한국 음식에는 모두 까무러칠 듯 좋아한다. 그들도 생일이 되면 한국음식 못지않은 화려한 유럽음식을 자랑할 줄도 안다.

내가 왜 화려한 음식이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모두 한꺼번에 푸짐하게 상위에 올려놓고 먹지만 이 사람들은 큰 접시에 음식을 쪼끔씩 놓고 온갖 양념이나 먹을 수 있는 꽃잎으로 장식을 해서 예쁘게 담아서 주고 또 다음 접시에 다른 음식을 주는 것을 다섯 번 이상 반복 한다. 전식에서 1차 2차 3차 메인코스 그리고 후식이었다. “저 많은 그릇을 어떻게 씻을려고?”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때에 따라 국 하나 끓여놓고 생일잔치를 할 때도 있고, 급한 사정이 있을 때는 초대된 사람들에게 선물대신 먹을 것을 해오라고 할 때도 있다.

그런데 잔치를 했다 하면 모두 12시가 넘어도 집에 갈 생각을 않고 이야기를 하고 하고 또 한다. 한번은 마침 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셨을 때 우리 집에서 잔치를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한참 재미나게 이야기 하는 사람을 눈으로 슬쩍 가리키며 “무슨 이야기를 저래 해쌌노” 하고 물으셨다. 그 사람들은 개를 가지고 있어 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개의 품종, 품종에 따른 성격, 개를 훈련시키는 법 그런 이야기였다. 어머니에게 번역을 해드렸더니 어머니는 “아이고 야-! 이렇게 늦었는데 무슨 쓸 데 없는 개 이야기를 해쌌노” 하셔서 우리는 두고두고 웃었다.

독일 사람들은 잔치 때 먹기도 좋아하지만 술을 마시며 앉아서 재미나게 이야기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좋은 이야기를 하고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즐거움을 느낀다. 이 사람들의 취미나 관심은 범위가 넓고 이야기하는 방법도 좋다. 작은 일에도 귀를 기울이고 중요하게 여긴다. 나는 그런 것도 배우고 만사에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뿐만 아니다 잔치에 손님이 오자마자 주는 Aperitif가 든 술잔, 물잔, 포도주잔 , 맥주잔, 독한 술잔 등 장속에 있는 잔은 다 나와 있고 20명이 마신 술잔이 60 개도 넘었다.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한국에 가면 대학 동창 들이 먼데서 오랜만에 왔다고 딴 친구들도 불러 맛있는 음식을 하루 종일 볶고 찌지고 전도 부쳐서 차려 놓곤 했다 매번 초대된 애들은 맛있게 먹고 나서 고속도로 이야기를 하다가 “아빠 밥 차려줘야 하는데…”, “우리 아이가 학원에서 올 시간인데…” 하며 일어나기가 일쑤였다.

어쩐지 섭섭한 생각이 들어 주인이 이렇게 애썼는데 왜 먹고만 가느냐고 물었더니 한국이 그렇다고 했다. 남의 집에 너무 오래 앉아 있는 것도 실례라는 소리까지 했다. 독일에서는 초대 받아 갔을 때 이렇게 빨리 가는 것이 오히려 실례라고 했더니 남편과 외국에서 오래 살다온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자기 남편이 외국에 있었을 때처럼 집에서나 아늑한 식당에서 모여서 좀 놀자고 회사 직원들을 초대하면, 밥 먹을 때는 “이거 들어보게”, “이건 더 맛있는 데요” 하며 잘 나가다가 식사가 끝나면 슬슬 눈치를 보고 서둘러 집으로 뺑소니를 친다고 했다. 이유는 한국습관이 젊은 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나이가 더 많거나 직위가 높은 사람과 좀처럼 이야기를 하지 않고, 또 나이 많거나 직위가 높은 사람들도 아랫사람들과 권위 상 이런저런 이야기를 잘 안한다고 했다.

우리와 가까이 지내는 20명 정도의 이곳 친구들은 나이 차이가 약 15세 정도 되지만 그래도 너, 나, 하며 친하게 지낸다. 결국 우리는 그것이 모두 문화의 차이라고 입을 모았다.

나는 한국을 오가며 옛날 친구들을 만난다. 우리가 머무는 언니 집에서 가까운 강남대로에 있는 파리 빵집이나 근사한 친구 아파트에서 옛날처럼 떠들고 웃으면 우리는 모두 옛날로 돌아가 즐겁기만 하다. 언제나 꿈같이 그리워하는 나의 젊은 날의 별 같은 친구이다.

(다음호에서 이어집니다.)

2020년 10월 23일, 1192호 14-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