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회] 해로(HeRo) 특별 연재 – 죽음 곁에 선 천사, 호스피스

2015년에 시작된 HeRo(해로)는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늙어가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코멘트에서 출발했다. 해답은 늘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이국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도움활동의 필요성으로 귀결되었다. <해로>의 입술로 연재를 시작하지만,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재독 동포들의 목소리를 그릇에 담으려 한다. 이 글이 고단한 삶의 여정을 걷는 이들에게 도움의 입구가 되길 바란다(필자 주)

18/ 죽음 곁에 선 천사, 호스피스

그는 이승만 정권 시절, 청와대에서 고위간부를 지낸 분이다. 그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고 지나왔던 인생의 그늘로 가득했다. 하지만 풍채를 지탱했을 골격은 품위 있고 곧바랐다. 시대의 영욕에도 버텨왔을 끈기와 자신감이 풍겨났다. 비록 호스피스 병동에서 남아 있는 시간을 세고 있었지만 호령을 누렸을 위엄은 살아 있었다. 그래도 어쩌랴. 그는 생의 종착역에 도달한 가냘픈 구십의 노구일 뿐이었다. 다행히 그가 누워 있던 호스피스 병동은 온화했다. 부와 명예가 독방의 지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는 마지막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책을 쓰고 싶어했다. 당시 나는 호기심 가득한 이십 대 후반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근대사의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욕망에 기대감 충만으로 펜을 들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나온 말은 예상 외였다.

“춘천에 사는 숙이가 보고싶습니다!”

좀 허탈했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스토리를 캐낼 거라는 기대는 나만의 착각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춘천으로 파견 근무를 갔다고 했다. 그곳에서 꽃다운 숙이를 만났고 잠깐이지만 불꽃 같은 사랑을 나눴다. 하지만 평생 배필의 인연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노인의 입술에서 뭔지 모를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는 두 달 후 생의 저편으로 떠났다.

그때까지 주변에서 한 번도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던 나는 충격이었다. 죽음에 도달하는 이들에겐 어떤 명예와 부도 위로가 되지 않았고, 지나왔던 시간에 대한 회한만이 가득했다. 난 대필자의 신분을 망각한 채, 그분의 마지막 이야기를 마음껏 들어드리며 생의 불꽃이 서서히 꺼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의 마지막은 대체로 편안해 보였다고 직접 임종을 지켜본 그의 아들이 덤덤하게 말해주었다. 가끔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이들에게서 헛헛한 토로를 들을 때가 많다. 아, 죽는 것은 결코 쉽지도 간단하지도 않다.

현대 사회는 더더욱 죽음에 대한 논의가 더 필요한 시대다. 그만큼 일상의 삶 자체가 불확실성 투성이다.

매년 10월 둘째 주 토요일은 ‘세계 호스피스의 날’ 로 지정하고 있다. 코로나 기간에서도 베를린에서는 올해 21번째 행사를 가졌다. 올해의 모토는 “Solidarität bis zuletzt“(마지막까지 연대를)로 “Wir sind für Sie da”(우리는 당신을 위해 있다)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호스피스 관련 단체 등에서 온라인 강연(예) Worauf es am Lebensende ankommt/인생의 마지막에 중요한 것) 등이 열렸고, 호스피스 관련 연극과 영화상연도 이어졌다.

그럼에도 죽음은 이어져온 삶과의 영원한 단절이기에 여전히 입에 올리기 힘든 주제다. 그래서인지 좀더 평안한 죽음을 위한 준비로 호스피스 완화의료가 등장한 것도 당연하다. 완화의료(Palliative Care)라는 단어는 라틴어의 Pallium과 영어의 Care의 합성어이다. 팔리움은 망토라는 뜻으로 아픈 환우를 따뜻하게 덮어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근대적 의미의 호스피스는 완화의료의 개념과 상통한다. 호스피스 완화의료 의사인 시슬리 사운더스(Cicely Saunders, 1918~2005)가 이러한 연구에 있어서 창시자다. 그는 임종 말기 환우의 고통에서 육체적 뿐만 아니라 정신적, 심리적, 사회적, 영적인 부분을 강조했다. 즉,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여러 측면의 고통을 완화하고 전인적 돌봄을 제공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러한 사회적 욕구에 따라 호스피스 관련 지원도 포괄적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정착되어가고 있다.

Deutschem Hospiz- und PalliativVerband e.V. (DHPV)(독일 호스피스완화의료협회)의 2016년 통계에 따르면, 독일에는 1500여 개의 방문형 호스피스단체, 236개의 시설형 호스피스와 300개 이상의 병원 내 완화의료병동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말기 환우들은 집에서 삶을 마감하길 소망한다. 이러한 소망 때문에 방문형 호스피스 봉사의 역할이 증대되는 게 사실이다.

베를린 사단법인 <해로>에서는 방문형 호스피스 팀이 사전의료의향서(Patientenverfügung) 작성 등 서류 관련 업무를 돕고 있고, 환우의 필요에 대응하고 있다. 또한 효율적인 봉사활동을 위해 자원봉사자의 교육을 독려하고 있다.

호스피스 정기교육의 일환으로, 지난 11월 28일에는 호스피스 간호사로 활동하는 율리아 레만(Julia Lehmann)이 호스피스 교육강사로 초빙되었다. 그는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역사와 마지막 임종 시기의 현상들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했다.

임종이 가까이 온 환우들은 여러 증상을 동반하는데, 통증, 호흡, 공포감, 파닉상태, 구토, 오심, 가려움 등 복합적이고 개별적인 증상들을 통해 환우의 고통은 증대된다고 말했다. 교육생들은 ‘죽음’이라는 테마에 대해 현실감 있게 바라보며, 삶과 죽음의 연결선에서 호스피스의 역할을 인식했다. 무엇보다 중병에 걸린 환우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환우의 상태 등을 기본적으로 인지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덕목은 환우의 감정을 공감할 수 있는 엠파티(Empathi)다. 호스피스 이론과 함께 환우의 정서적, 사회적 통증까지 아우르는 것이 전인적 치료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죽음의 태풍을 통과한다. 그 태풍 속에서 누구든 먼 여행을 떠나는 자의 동행이 될 수 있다. 죽음 곁에 선 천사, 당신이 그 주인공이다.

박경란/ 사단법인 <해로> Alltagshilfe 자원봉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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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8호 16면, 2020년 12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