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살 없는 감옥(2)

전성준

호강에 겨워 요강에 변을 본다. 라는 우리의 옛 속담처럼 요즈음 보기 드문 자식들의 효심에도 불구하고 외출을 못해 안절부절 마음을 잡지 못하고 생병을 앓는 달섭씨를 빗대어 하는 말로 들렸다.

외출을 못하는 대신 달섭씨는 전화기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코로나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자주 만났던 술친구들한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고 답답한 심정을 털어 놓았다.

처음 몇 차례는 정색을 하며 반기더니 전화 걸려온 횟수가 잦아지자 전화 받는 상대방 반응이 갈수록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상대방 얼굴을 볼 수 없는 비 대면인데도 혹여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이라도 될까 싶어, 아니면 며칠 사이 혹시나 코로나에 감염되었는지 확인이라도 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 온 것 마냥 시큰둥하게 응답하더니만 나중에는 달섭씨 전화번호가 액정에 나타나면은 아예 수신을 차단하는 등 쌀쌀한 태도에 전화기에서도 손이 멀어져 갔다. 대신 매일 TV에 시선을 고정 했다.

한국뉴스는 조선시대 당파싸움을 직접 보는 것 같아 흥미가 없고 넥플릭스에서 영화나 세계 테마여행기. 자연 다큐를 보았다.

그러다 지루하다 싶으면 유튜브에서 먹방 사이트로 자리를 옮겼다.

간혹 먹방에서 소개 되는 각종 음식 중에서 나이 지긋한 종갓집 맏며느리 같은 복스러운 분이 소개하는 토속 음식 먹방에 흥미를 갖고 자주 찾았다.

소개하는 여러 토속 음식 중 뼉다구 감자국에는 엄지척, 좋아요를 보내고 몇 차례 되돌려 보았다.

옛날 향수를 느끼게 하는 뼉다구 감자국. 얼큰한 국물과 뼈에 붙은 살코기를 뜯어 먹는 감자국의 진한 맛. 그리고 크윽 소리와 함께 식도를 타고 넘어 가는 짜릿하고 달착지근한 소주 생각이 간절했다.

수년 전,파독 광부로 독일 땅을 밟기 전에 지방 신문 사회부기자로 잠시 일을 하다 대망의 꿈을 품고 서울로 진출 어느 유명 주간지 연예부 말단 시다바리 기자 생활을 할 때였다. 고참 왕기자가 취재비 몇 푼을 손에 쥐어 주면 수습기자 박군을 데리고 남대문시장 뒷골목 감자국 집을 자주 찾았다.

추레한 몰골에 소주 몇 잔을 들이켜고 그제야 비로소 얼굴에 화색이 돌면 말문이 터지는 끗발 없는 젊은 시다바리 김달섭기자, 그를 동정했는지 마음씨 좋은 주인아주머니는 “따구탕 하나 주세요.”하고 주문을 하면은 뚝배기가 철철 넘치도록 제법 살이 많이 붙은 돼지뼈와 감자를 듬뿍 담아 배고픈 젊은 기자 뱃속을 채워 주던 옛날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뿐인가 뚝배기 바닥이 보였다 하면 주인아주머니는 직접 양푼에 살이 많이 붙은 뼉다구와 감자를 듬뿍 담아 덤으로 주면서,<젊었을 때 배불리 먹어야 늙어서 힘을 제대로 쓰는거야!>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건네며 푸짐한 인심을 쓰던 그 시절 그때 즐겨 먹던 감자국이 떠올라 달섭씨 입안에 항상 군침을 가득 고이게 했다.

달섭씨는 대형 마트 메트로에 가야 겨우 살 수 있는 돼지 등뼈를 사와서 얼큰하니 감자탕을 끓여 먹자고 춘자씨를 꼬드기고 겨우 집을 빠져 나왔다가 메트로에서 고향 후배 봉수를 만난 것이다.

꽁꽁 얼어붙은 돼지 등뼈 두 봉지와 감자를 사 들고 계산대를 빠져 나오는 데 외국인들로 법석이는 인파 속에서 “달섭이 성님!”하고 부르는 한국 말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는데도 용케 달섭씨를 알아보고

손을 흔드는 머리 검은 한국인이 눈에 띠었다. 카트에 식용유와 잡다한 식품을 가득 싣고 낑낑 거리며 끌고 오던 봉수가 달섭씨를 발견하고 반겼다.

“성님 정말 오랬만이네요. 캄보디아로 아들과 함께 여행 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언제 돌아 왔지라?”

“그래 정말 반갑네. 캄보디아에서 돌아 온지 돌시가 다 되었는디. 캄보디아를

들먹거리는 것 보니 자네 얼굴 본지1년이 넘었네 그려…정말 오래간만에

자네를 만났는데 그냥 헤어질 수 없제…우리 어디 가서 목이나 축이며 잠깐

야기나 하고 헤어지세…”

옛날 같으면 서로 투박한 손을 꽉 쥐고 놓을 줄을 몰랐을 텐데 코로나 때문에

악수를 못하고 서로 주먹을 마주 대하는 것으로 반가운 인사를 대신 했다.

달섭씨는 봉수의 대답도 듣지 않고 대뜸 마트 주차장 한 쪽 구석 이동식 간이식당으로 갔다. 머리털을 시원하게 밀어 버린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주인은 턱에 마스크를 걸치고 있다가 코까지 마스크로 덮고 나타난 달섭씨를 보고 겸연쩍은 표정으로 금방 마스크를 코까지 가렸다. 병맥주 두 병을 사 들고 띄엄띄엄 거리를 두고 있는 빈 탁자를 찾아보았으나 거리 두기를 하자는 코로나 방역 지침을 무시하고 빈자리가 없었다. 맥주병 채 들고 서서 마시는 원탁 테이블이 하나 빈 곳이 있어 그 곳을 찾아 갔다. 다른 날 같으면 봉수가 먼저 앞장을 서서 술판을 벌렸는데 오늘 따라 별로 반가운 기색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외출을 못 했던 터라 달섭씨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다. 마침 옆 자리에는 작업복 차림의 이주 노동자들이 몇 사람 둘러 앉아 코로나 방역지침도 아랑곳없이 침을 튀겨 가며 맥주병을 앞에 놓고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약간 께름칙하니 마음이 쓰이는 구석도 있었으나 1년 만에 만난 고향 선후배 사이인지라 너무 반갑고 그 동안 소식도 궁금하고 오랫동안 들어 보지 못했던 고향 사투리를 듣고 보니 서로 끌리는 정감에 누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 자연스럽게 맥주병을 들게 되었다.

봉수는 달섭씨보다 다섯 살 아래 일흔 셋이고 달섭씨는 일흔여덟. 그런데 파독 광부만은 봉수가 달섭씨보다 3년 먼저 온 광부 선배였다.

그들은 독일 생활 5십여 년이 지났지만 그들이 만난 자리는 언제나 고향 사투리가 등장했다. 유별나게 봉수는 토박이 사투리를 능청스럽게 잘 했다.

한인회행사, 향우회행사. 등 모임에서 만났다 하면은 두 사람은 맥주를 상자 채 놓고 서로 권커니 잣거니 주량을 과시하는 사이인지라 그냥 얼굴만 보고 헤어 질 수 없어 이 날만은 작은 맥주 한 병으로 서로 반가운 마음을 대신하기로 했다.

요즈음 봉수는 아들이 운영하는 오펜바흐 반호프 근처 한식당 불닭집 일을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일손이 부족하고 배달이 많아 아들 내외가 낑낑거리는 것을 보다 못해 봉수 부부가 나서서 봉수는 재료 구입을 해 주고 봉수 처는 집안일과 손자들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마침 메트로 대형 마트에 식품을 구입하려 왔다가 돼지 뼈를 사려온 달섭씨와 마주 친 것이다. 코로나 방역지침에 따라 거리 두기를 하고 주먹 인사만 하고 헤어져야 하는데 이들한테는 코로나는 뒷전이고 1여년 만에 고향선후배가 만났으니 그냥 헤어 질 수 없어 병맥주라도 한잔 하자고 달섭씨가 나선 것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1년 가까이 얼굴을 못 본 사이라 반갑지만 서로가 직접 차를 몰고 온 처지라 취기가 올라 올 만큼 마실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저런 그 동안 쌓이고 쌓인 이야기에 시간을 보낼 수도 없었다. 맥주병이 바닥이 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섭섭하지만 다음 날을 약속하고 헤어 졌다.

몇 달 만에 외출을 하고 자동차 핸들을 잡으니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움이 앞섰다. 술을 질탕 마시고 다녀도 세상이 두렵지 않았고 모든 것이 자신만만했는데 집안에 박혀 있다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마신 탓인지 눈에 익숙한 길도

더듬적거리고 겁이 났다. 술에 취했을 때는 마음에 꺼리는 것 없이 온 세상이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 마냥 두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몇 달간 술 한 잔 마시지 않고 집안에 박혀 지내다 보니 온 세상이 두렵고 불안 했다. 그리고 시시각각 자신에게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는듯한 망상이 자주 일어나 불안과 공포가 숨을 막히게 했다. 나이 탓일까.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달섭씨는 늙었다고 생각 해 본 일이 별로 없었다. 젊은 사람 못지않게 활동적이고 주량도 크고 잘 이겨냈다. 뿐만 아니라 섹시한 장면을 보면은 젊었을 때 마냥 아랫도리에 금방 묵직한 느낌이 전해 왔다. 그런 그가 코로라 사태 이후 많은 변화가 따랐다. 매사에 의욕이 떨어지는 무기력 증상이 심해지고 남한테 쫓기듯 강박관념과 초조와 불안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 때문인지 사소한 일에도 불끈 불끈 화가 치밀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더욱이 오늘 봉수를 만나 그가 했던 말이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최근 평소 지병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난 향우 병구의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봉수와 광산 동기이며 술친구인 병구는 봉수를 만날 때마다 말년 편치 못한 가정사를 털어 놓으며 괴로워했다 한다. 사망 소식을 전해 듣기 1주전에 부석부석한 얼굴로 봉수를 찾아 온 병구는 술 한 잔 생각이 나서 찾아 왔다는 말에 집 근처 임비스에서 병 매주 두 병씩 마시고 헤어진 것이 병구와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고 했다. 가뜩이나 병구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지만 코로나 때문에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해 늘 미안한 생각을 가졌던 달섭씨는 병구의 장례식에 다녀 온 봉수를 통해 병구의 마지막 초라한 장례 소식을 듣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병구의 말년 편치 못했던 가정사 이야기는 남의 일이 아닌 멀지 않아 닥쳐 올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 온 달섭씨는 술 생각이 간절했다. 울적한 마음을 잠재울 방법은 술 밖에 없다는 사실을 달섭씨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나 혼자 자작을 해 본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 상황은 달랐다. 감자국 재료인 꽁꽁 언 돼지 뼈를 내 팽개치고 주위를 살폈다.

춘자씨 기척이 없었다. 지하 세탁실에 갔을까. 더욱 술 생각이 간절했다.

밖에서 마시고 온 술은 탓하지 않지만 집안에서 술은 절대 금지였다. 이 묵계는 춘자씨가 권사 직분을 받은 뒤로 꼭 지켜야 할 사항으로 춘자씨가 강력하게 주장을 했다. 만일 이 묵계를 지키지 않을 경우 별거도 불사하겠다는 으름장에 춘자씨 요구사항을 달섭씨는 거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비상용으로 춘자씨 눈에 띠지 않게 몰래 숨겨 놓은 술이 있었다. 사방을 살펴보고 서가에 꽂혀 있는 두꺼운 한글 사전 뒤에 숨겨 놓은 독주 병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리고 춘자씨가 나타나기 전에 부리나케 안주도 없이 맨입으로 단 숨에 바닥까지 비웠다.

사슴뿔이 그려진 예거마이스터. 보양식품으로 각광 받는 사슴 뿔 녹용을 첨가해 제조한 술인 줄 알고 한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주정 농도 38프로 독주다.

씁쓸한 특유의 향기를 풍기며 짜르르 식도를 타고 넘어 가기 바쁘게 온몸 전체 신경 마디마디를 짜릿짜릿하게 자극하는 상쾌한 전율을 오랜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몸이 공중부양을 하듯 붕 떠오르는 쾌감이 전신에 감돌았다.

“이 망할 놈의 지랄 같은 세상사 코로난가 뭔가 망할 놈의 돌림병이 사람 발을 묶어 놓고 어디 갑갑해서 제대로 숨이나 쉬고 살수가 있는감…” 거나하게 주기가 오른 달섭씨는 늘어지게 푸념을 했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 덮으며 가물가물 짙은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가 싶더니 1970년대 팔팔한 젊은 시절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추석 특집공연 취재차 고참 왕기자 뒤를 따라 시다바리로 전라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밤 새워 순천까지 쫓아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방 공연을 떠난 인기 가수 박재란을 취재하기 위해 순천까지 내려 간 것이다. 성대모사의 달인 쓰리보이 신선삼이 “방금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치고 순천시민을 위해 지금 막 도착한 인기 가수 박재란을 소개합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장내에 요란하게 울리는 팡파레, 휘황한 조명과 관중의 박수를 받으며 요염한 모습의 박재란이 무대에 등장 그녀의 히트 곡 <창살 없는 감옥>을 섹시한 몸짓으로 열창했다. “목숨 보다 더 귀한 사랑이건만 창살 없는 감옥인가…” 창 살 없는 감옥을 흥얼거리던 달섭씨는 끝도 맺지 못하고 그만 세상모르게 잠에 골아 떨어 졌다. 얼마 동안 잠을 잤는지, <아휴 술 냄새… 또 어디 가서 술을 퍼 마시고 왔어? 준아 아빠. 저녁 먹어야지…>하며 춘자씨가 달섭씨 몸을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스르르 눈을 떴다. 벽에 걸린 전광판 시계는 오후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는데 11월의 짧은 해는 자취를 감추고 주위가 어둑어둑했다. 달섭씨는 창 살 없는 감옥에 갇힌 자신을 위해 노래하던 박재란 모습은 간 곳 없고 잔뜩 짜증이 난 춘자씨가 어둠을 등지고 달섭씨 앞에 버티고 서있었다. 깜짝 놀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달섭씨는 목이 타는 듯 심한 갈증에 냉수 한 컵을 벌컥 벌컥 마시고 나자 뒷머리 골이 띵하니 땅기고 양 쪽 눈가에 얼얼하니 열기가 돌며 재채기와 콧물이 동시에 쏟아져 나왔다.

(다음호에서 이어집니다.)

1199호 14-15면, 2020년 12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