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수레바퀴’ (2)

2023년 대구매일신문사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수상작품

– 효린 강정희
(재독수필가, 시인, 소설가, 시조시인)

교포신문에서는 2023년 대구매일신문사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분에 수상한 강정희작가의 ‘삶의 수레바퀴’를 매월 4째주 발행 호에 연재한다.
글의 분량이 많은 관계로 강정희 작가가 독일에 오던 날부터 연재를 하게 됨에 독자분들이 양해를 구하며, 아울러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편집자 주

1972년 8월에 첫아들을 낳고 세상을 다 내 품에 얻은 것처럼 너무너무 기뻐서 울었고, 1975년 8월에는 둘째 아들을 낳고 너무 좋아서 울었다. 퇴원하여 우리 집에 돌아오니

꽃향기 가득했고 아기와 산모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남편은 미역국도 끓여 놓고 고슬고슬한 쌀밥도 해 두었고 집안도 말끔히 치워 두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봉밥, 송송 썬 양배추김치 그리고 참기름이 둥둥 뜬 미역국이 식탁에 올랐다.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핑 돌았다. 게다가 미역국은 어쩜 그리 맛있게 끓였는지 감동이었다. 한 숟갈 한 숟갈 입에 넣는 미역국이 마치 작은 행복을 먹는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큰 공부는 자식 키우면서 배우는 것이라고 나는 유아기의 중요성을 생각하며 씨를 뿌리고 싹을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처럼 세밀한 관심과 정성으로 우리 아이들을 키워가겠다고 결심했다. 내 몸이 부서져도 두 아이의 꿈에 날개를 꼭 달아주겠다고 다짐했다.

아무런 연줄도 없는 혈혈단신 만리타국에서 온종일 근무하며 두 아이를 키우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았다. 아침 일찍이 한창 단잠을 자는 아이들을 억지로 깨워 씻기고 먹여 유아원에 맡기고 일자리에 도착하면 아직 내 근무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진이 완전히 빠졌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겨울에는 감기에 걸리고, 유아원에서 전염되어 한 아이가 병을 앓으면 우리 아이도 앓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애들이 아프면 안절부절못했다. 물론 애들이 아파서 속이 타기도 했지만, 아픈 아이를 유아원에 보낼 수 없으면 근무를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감기로 열이 오르면 해열 항문 좌약을 미리 넣어 주고서 시치미를 뚝 떼고 유아원에 데려다준 다음 일자리에 가서 중요한 일들을 대충 끝내놓고 눈치껏 빠져나가 소아청소년과 의사를 찾아갔었다. 그런 잔꾀를 부려야 할 때는 정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아이가 감기에 걸려 기침만 콜록거려도 마음 아프고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 대신이라도 앓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인데 스스로 모진 엄마여야 했던 두고두고 아픈 기억이다. 그래도 완치되어서 또 잘들 지낼 때는 언제나 감사한 마음이었고 고통과 슬픔이 봄날 눈 녹듯이 사르르 사라졌다. 소리를 내며 토실토실 크는 두 아이는 내게 단순한 자식이 아니라 삶의 윤활유 같은 힘이고 살아가는 희망이었다.

1978년 7월에 수술실 수간호사로 임명받았다. 외국인의 삶은 의지를 결과로 보여줘야 하는 증명의 연속이다. 그동안 내 노력에 대한 일종의 감투상이라고 할까? 너무나 자랑스러운 가슴 뛰는 그 순간, 속 깊은 눈물이 번졌다. 책임이 따르는 벅찬 자리였지만, 이 사회에서 당당한 의지의 한국인으로 새로운 임무를 잘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에도 온도가 있음을 알고 숨길 것이 없을 때 제일 행복한 것같이 속 각각 말 각각이 아닌 나를 내보이고 경쟁이 아닌 협동을 구하며, 칭찬에 인색하지 않고 희생과 헌신으로 솔선수범 일하는 것이었다. 몇몇 독일 간호사들은 언감생심 아니꼽다는 눈치를 보이며 쇠심줄 같은 오기를 부리기도 했다.

내가 처음 독일에 왔을 때를 생각하면 정말 개천에서 용 난 게 아닌가? 나는 그들을 미워하기보다 한쪽은 미안해하고 한쪽은 이해하려고 애쓰며 더 낮게 더 바싹 다가가 온 정성을 다하여 모서리와 각도를 조절했다.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재능이 아닌 열정이라고 나의 대단한 열정은 사람을 한군데로 모았다.

난 새벽 날개 치면서 제일 먼저 출근하고 맨 마지막에 퇴근하며 그날의 일 처리를 아귀 차게 꾸려갔다. 물샐틈없는 독일인들에게 인정받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은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일목요연하게 기록으로 남겨 실질적인 지식과 경험을 쌓으며 공들인 만큼 보석은 꼭 태어난다는 믿음으로 온 힘을 다한 나의 노력이 아니었나 싶다. 난 지금도 하루를 돌아보며 일기를 적는다.

결혼한 지 11년 만에 우리 아이들이 봄 햇살처럼 눈웃음치며 마음껏 뛰어놀 수 있고 우리만의 문패가 달린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단벌 숙녀로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며 대단한 결단 심으로 인생의 절반을 정말이지 마라톤 러너처럼 뛰고 뛰어 숨 가쁘게 달려온 기분이었다.

의사들도 사기 어려운 삶을 담은 그릇이라는 주택을 감히 저 조끔 한 한국 간호사가 겁도 없이 장만했다며 병원이 시끌벅적했다. 내가 근무했던 병원 직원들은 유별나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아 소문이 도착하기도 전에 잘 퍼뜨렸다.

1981년 4월에 새로운 원장이 부임했다. 수술 잘하는 젊고 유능한 교수가 부임했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수술 환자가 현저하게 늘어나고 수술실 살림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기 시작했다. 원장의 눈높이에 나를 맞추기 위하여 일심전력했다.

다행히 남편이 집안 일이나 아이들을 잘 돌봐 줘서 마음 놓고 집중할 수 있었다. 어쩜 나를 이해해 주는 꽃받침 같은 남편을 만나게 된 것도 내가 이 일을 하기 위한 필연이 아닌가 싶었다. 노랑 고무장갑이 없던 시절이어서 손에 주부습진이 생길 정도로 바삐 도왔다. 피곤한 남편의 어깨는 늘 눈부셨다. 마음 편히 쉬어 보지 못하고 쉬면 뭔가 불안할 정도로 일중독에 걸려 살아온 삶이다.

원장이 부임한 지 3년 만에 최신식의 수술실을 지어 8방에서 수술을 할 수 있는 시설로 확장했다. 난 수술실 수간호사 업무 외에도 위생관리, 중앙공급 실과 외래까지 총괄하게 되어 어깨가 더욱더 무거워졌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새로운 분야의 전문 지식을 쌓기 위해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세미나에 참가하여 배우고 갈고 닦으며 차곡차곡 날 발전, 갱신해 나갔다.

신뢰는 모든 것의 시작이고 모든 것의 끝이라고 한다. 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난 동료를 춤추게 할 만한 따뜻한 사람은 아니지만, 베풀 줄 알아야 거느릴 수 있다고 내게 주어진 권리만을 찾으려 하지 않고 늘 동그란 마음으로 협상 타협하며 어렵고도 고상한 대인관계와 인맥의 고리를 이어갔다. 마음이 환히 트여 있는 사람 곁에는 사람들이 머무르기 좋아한다고 내 귀와 마음의 휘장은 언제나 바로 세워 활짝 열려있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대기 근무를 섰다. 정상 근무가 끝난 시간부터 시작하여 그 이튿날 아침 근무가 시작하는 동안이었다. 억세게 재수가 좋은 날은 잠자면서 대기 근무 수당을 받았고 또 어떤 날은 계속 실려 들어오는 환자들을 밤 내내 수술하며 한숨도 못 잔 날도 있었다. 지금이야 엄격한 노동법이 근로자를 보호해 주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수술 일정에 짜여 있는 환자를 일손이 부족해서 중단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가누며 꼼짝없이 연장 작업을 해야 하는 날은 눈이 저절로 감길 것 같은 느낌에 손발을 점검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하기도 하다.

책임이라는 말로 인내를 배우면서 모든 것이 가능했다. 눈에서는 빛이 나고 손발에서는 불이 나게 일을 했다. 이럴 때면 대부분 간호사는 그 이튿날 모름지기 병가(病暇)로 재깍 결근했다. 나 역시 온몸이 부서져 다 어긋난 것처럼 뼈 다기가 욱신욱신 쑤셔서 그런 생각을 했다가도 두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잽싸게 일자리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누구를 위하여 끊임없이 종을 울렸을까? 나를 위하여? 아니면 환자를 위하여? 아니면 병원을 위하여? 아니면 독일 사회를 위하였을까? 난 정녕 환자를 위해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선서문처럼 가슴 달구며 내게 한 신호등 같은 약속을 지키며 적나라하게 모든 것을 다 주었다고 생각한다. 대충대충 사는 모습보다는 기꺼이 변하는 용기와 결단을 한 과감한 힘, 내일 쓰러질지라도 오늘 할 일을 실천하는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불쑥불쑥 먼지처럼 떨어지지 않는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면 눈뿌리가 아찔하고 혓바늘이 돋던 날들을 생각하면 서리 내린 꽃잎처럼 가슴이 시리다.

우리 부부는 역할 구분이 아예 없었다. 질서와 조화 속에 온 가족이 하나 되는 노력과 희생으로 우리 둘 중, 직장에서 먼저 돌아온 사람이 일사천리로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 밥하고 요리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찬거리 시장도 보고 아이들도 보살폈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불만이 있을 수 없었다.

우리는 아이들을 초등학교 3학년, 열 살이 될 때까지 병원에 속한 온종일 유치원에 맡기고 출근해서 직장 일이 끝나면 집으로 데려왔다. 학교도 유치원에서 갔고 수업이 끝나면 유치원으로 가서 점심도 먹고 숙제도 그곳에서 했다. 근무를 마치고 일단 집에 돌아오면 이미 끝낸 숙제였지만 꼼꼼하게 다시 살폈다. 무언가를 잘하려면 기초가 튼튼해야 하고 엄마로서 적어도 자식들 학교 수업내용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유별나게 날씨가 좋은 날엔 숙제를 빨리 끝내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은 어린 마음에서 성의 없이 대강대강 했음이 드러났다. 글씨가 엉망이었고 산수 셈도 정확하지 않았다. 그런 날은 처음부터 다시 하도록 해서 다시금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했다. 시험을 앞두고 아이들은 나와 함께 공부하는 시간을 살그니 기다리는 눈치였다.

자식 잘 키우는 것도 애국 애족이라고 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눈힘을 맞추며 어깨를 어루만져 주고 햇볕 같은 칭찬과 사랑으로 감싸 안으며 잘 키우려 애썼다. 아이들이 차츰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자 애들을 앞장세워 책방에 들러 읽고 싶어라 하는 책을 사서 책과 가까이할 수 있도록 습관을 길러 주었다.

두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면 절대 안 된다고 가르쳤다. 선한 거짓말도 거짓말이기에 안 된다고 했다. 거짓말은 우리를 약하게 만들고 자꾸 하다 보면 스스로조차 그것을 진실처럼 믿게 된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엄마와는 비밀이 없어야 한다고도 일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난 아이들에게 마음을 곱게 쓰고 가슴을 읽어주며 별빛 같은 꿈과 희망을 크게 심어주려고 노력했다. 이상과 꿈이 작으면 성취하는 일도 작고 보잘것없다고 한다. 꿈은 팽팽한 현악기처럼 아름다운 음률을 내기 위해 삶을 긴장시키기 때문에 꿈의 성질이 어떤 것이든 인간은 꿈을 꾸는 한 아름답다고 한다. 난 우리 아이들이 혹시 꿈과 희망보다 반항과 적의를 먼저 배울까? 걱정스러웠다.

어느 날 초등학교에 입학한 큰아이가 침을 꿀컥꿀컥 삼키면서 내게 물었다. 대부분 친구 엄마는 직장에 나가지 않고 수업이 끝나면 자식들을 데리러 오는데 왜 우리 엄마는 꼭 직장엘 나가야 하느냐고? 엄마도 자기를 데리러 왔으면 좋겠단다. 그리고 점심때 유아원이 아닌 우리 집에 가서 엄마가 지어준 따뜻한 쌀밥을 먹고 싶다고 했다.

난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지만,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만약에 엄마가 직장엘 나가지 않는다면 널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올 수도 있고 점심때 함께 따뜻한 쌀밥도 먹을 수 있지만, 네가 좋아하는 아디다스 신발이나 옷이나 네가 읽고 싶어서 하는 책 그런 것들을 살 수 없고, 어쩌면 우린 자가용도 없이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해 주었다. 엄마가 매달 벌어 오는 돈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금액이라고, 그래서 엄마가 일을 나간다고 했다.

그리고 병들어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도 없다고 했다. 엄마는 수술실 간호사여서 원장 선생님이 수술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도 했다. 작은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는 자기를 데리러 오지 않아도 좋으니, 엄마가 계속 일을 나가도 괜찮다면서 이젠 쓸데없는 마음을 가지지 않겠다고 했다. 어린 자식에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아이들의 말로 설명해 주면서 난 참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내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알아들어서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그 후부터는 다시는 어렵고 불편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 당시 아디다스는 아이들에게 대단한 인기 상품이었다.

바쁜 생활 속에서 쪽지 편지는 우리 집의 고마운 대화 꾼이었다. 알기 쉬운 표현으로 사랑도 전하고 소망도 전했다. 잔소리처럼 들리지 않아 우리 식구는 무지개 쪽지 편지를 참으로 사랑하고 은근히 기다리기도 했다.

남편이 남긴 쪽지, 큰아들이 남긴 쪽지, 작은아들 꼬마가 남긴 쪽지, 내가 남긴 쪽지의 색깔은 변색하였지만, 추억은 아직도 또렷하게 내 기억 속에 머물러 있다. 지금도 그 고마운 대화 꾼은 마치 우리 집 가보(家寶)처럼 예쁜 자개함에 가지런히 보관되어 있다.

‘여보, 잠깐 시장에 가요. 서둘러 다녀올게요.’

‘아빠, 연극 연습이 있어서 자전거로 학교에 갑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여기저기 창문 열어 뒀어요. 마틴은 축구 경기하러 갔어요. 팀 아빠가 자동차로 데려갔어요. 엄마, 아빠 오늘도 힘드셨죠? 양 볼에 뽀뽀!’

‘엄마, 잠깐 마크 집에 갑니다. 오늘 점심 먹은 그릇은 내가 설거지했으니 그런 줄 아세요. 울 엄마, 최고!’

‘독일어 시험 결과 나왔어요. 우리 반 평균 점수는 좋진 않지만 내 점수는 좋아요. 보너스 주실 거죠?’

– 1368호에서 계속됩니다.

1364호 14면, 2024년 5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