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린 강정희
(재독 수필가, 시인, 소설가, 시조 시인)
바쁜 생활 속에서 쪽지 편지는 우리 집의 고마운 대화 꾼이었다. 알기 쉬운 표현으로 사랑도 전하고 소망도 전했다. 잔소리처럼 들리지 않아 우리 식구는 무지개 쪽지 편지를 참으로 사랑하고 은근히 기다리기도 했다. 남편이 남긴 쪽지, 큰아들이 남긴 쪽지, 작은아들 꼬마가 남긴 쪽지, 내가 남긴 쪽지의 색깔은 변색하였지만, 추억은 아직도 또렷하게 내 기억 속에 머물러 있다. 지금도 그 고마운 대화 꾼은 마치 우리 집 가보(家寶_처럼 예쁜 자개함에 가지런히 보관되어 있다.
‘여보, 잠깐 시장에 가요. 서둘러 다녀올게요.’
‘아빠, 연극 연습이 있어서 자전거로 학교에 갑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여기저기 창문 열어 뒀어요. 마틴은 축구 경기하러 갔어요. 팀 아빠가 자동차로 데려갔어요. 엄마, 아빠 오늘도 힘드셨죠? 양 볼에 뽀뽀!’
‘엄마, 잠깐 마크 집에 갑니다. 오늘 점심 먹은 그릇은 내가 설거지했으니 그런 줄 아세요. 울 엄마, 최고!’
‘독일어 시험 결과 나왔어요. 우리 반 평균 점수는 좋진 않지만 내 점수는 좋아요. 보너스 주실 거죠?’
‘아빠, 내일 아침 일찍 시장에 가실 때 나도 따라갈래요. 소니 음악 카세트 사야 하거든요. 나 꼭 깨워야 해요. 아셨지요?‘
‘너희 화해했냐? 다 큰 녀석들이 웬 싸움이냐? 어제는 어제이고 오늘은 오늘이다. 누가 잘했건 잘못했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 알았지?‘
‘사랑하는 아이들아, 엄마는 회의가 있어서 늦을 거야. 너희 학습 봐줄 시간이 없겠구나. 숙제 잘하고 동생 공부도 살펴 주렴. 달력에 동그라미 쳐 둔 내일은 엄마가 모처럼 쉬는 날이야. 너희가 좋아하는 불고기랑 뽀빠이처럼 힘이 솟는다는 시금치나물이 랑 동그랑땡 부쳐서 맛있게 먹자꾸나. 모노폴리 게임도 하고 땅따먹기 놀이도 하고 온 몸으로 웃음 지으며 우리 함께 봄이 되는 거야. 난 지금부터 한바탕 신이 난다.’
주머니 속 구슬처럼 소중했던 그때의 도란도란 추억으로 평생이 들썩들썩 즐겁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남편이 목숨 걸듯 살았던 광산촌으로 나들이하였다. 어둠을 깨물면서 비지땀도 감사해하며 살았던 20여 년이 지난날들을 선명히 기억하는 남편은 그 당시에 사용한 탈의장, 공동욕실, 휴게실, 숙소 등 탄광 주변을 안내했다. 뜨거운 가슴 빛으로 동그랗게 안으며 수고에 열중한 숱한 날의 아픔으로 묶었던 설움을 녹인 시간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아빠의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자기 삶에 더 충실하고 부모를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고 분발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알토란같은 두 녀석은 집에서는 응석꾸러기였지만 밖에서는 속 깊은 어른이었다. 부모가 부족하면 아이가 빨리 철이 든다고 했던가? 제대로 호강시켜 주지 못하고 엄마의 잔 손길이 가장 많이 필요할 때 마음껏 함께해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고 가슴이 아프다. 맷돌로 돌리듯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수성찬은 아니지만, 숟갈이 많아야 밥맛도 좋다고 내 살 같은 우리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하는 저녁 시간을 소중하게 여겼다. 정직히 깔린 방울땀의 하루 허리를 펴는 시간이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 있는 생활은 작은 축복 같았다. 음식은 마음이다. 더군다나 정성이 무르익은 엄마의 손맛이 배어 있는 음식이야말로 가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소중한 끈이다. 사랑하면 먹이고 싶어진다고 먹는 모습만 봐도 어미는 배가 부르고 행복하다.
꽈리처럼 터질 듯 서로를 일으키며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는 그 시간은 가족의 소중함과 남아 있는 믿음과 사랑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아이들의 웃음과 재잘거림은 행복이고 위로였다. 자식한테 욕심 없는 부모 어디 있으랴? 잘난 자식도 내 자식이고 못난 자식도 내 자식이고 내 보물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잠자코 지켜보며 기다려 주고 눈 찡긋 윙크하며 한편이 되어 긍정의 외투를 입혀주며 철통 밀통 믿어주고 떨리게 응원하는 것이다.
두 아들은 학업에 열중하여 큰아들은 의대를 졸업 후 경력을 쌓아 정형외과, 구급 외과 전문의로 병원을 개원하여 히포크라테스의 본질을 정중히 거울삼아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정직하고 성스러운 노동으로 주어진 몫에 충실하게 살아온 아버지와 일자리를 내 집처럼 가꾸며 살아온 어머니를 생각하며 불편한 몸으로 찾아온 연로하신 교민들을 성심성의껏 치료해 주고 싶다는 사명감이 남다른 아들의 갸륵한 마음이 참 아름답다.
작은아들은 상대를 졸업하여 보장된 직책에서 소신껏 일하고 있다. 둘 다 가정을 이뤄 터를 잡고 열심히 살고 있다. 우리에게 가족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고 삶의 전부이다. 가족 안에는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 이야기보따리가 숨어있는 듯하다. 자식과 골프는 마음대로 안 된다는데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이탈하지 않고 독하게 공부하여 긍정적인 사고를 하고 올바르게 장성해 주었음을 그지없이 고맙게 생각한다.
힘들게 키운 튼실한 뿌리 깊은 두 아들은 언제나 내 가슴에 향기 젖은 감사로 울렁이는 나의 자랑이고 큰 힘이다. 지난 고된 삶의 흔적을 그대로 보상받은 느낌이다.
남편의 꿈은 ‘남자는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집을 짓고 나무를 심어야 한다’라는 은사 님의 말씀이었다. 원래 기본적인 것이 가장 확신적이라고 하지 않은가. 우리 부부는 검정이와 하얀 이로 시작하여 꿈은 뼈를 깎는 시련과 아픔을 동반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배우며 한 단계 한 단계 이뤄갔다. 58년 전 그 젊고 건장한 청년이 땡전 한 푼 없이 20㎏ 괴나리봇짐 하나 달랑 가지고 서독에 와서 꽃봉오리 같은 나이에 이역만리 떠나온 간호사와 꽃씨처럼 사랑을 나누며 가정을 이뤄 두 붕어빵 아들을 얻었고 며느리 손주까지 일곱 가족 만들었다.
우리 모두 건강하고 돌담 쌓듯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며 얼룩이 얼룩을 아껴주면서 맘 다해 큰사랑이 되도록 애쓰며 살아가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큰 은혜인가?
우리 엄마는 진달래꽃을 무척 좋아하셔서 분홍빛 꽃을 머리에 꽂고 다니셨다. 당신이 좋아하는 진달래가 활짝 핀 5월에 세상을 떠나셨다는 문풍지처럼 떨리는 조카의 전화를 받고 목이 꽉 잠겨버리고 온몸에서 썰물처럼 힘이 빠져나갔다. 아이들은 눈물을 닦아주며 날 위로했고 남편은 장례식에 참석하려면 서둘러야 한다며 재촉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긴 시간 내내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줄줄이 바퀴를 돌렸다.
지난번 한국에 나갔을 때 하얗게 시린 달빛 아래 박꽃 같은 순한 웃음을 지으시고 줄곧 단내 나는 숨 고르기를 하며 지내시다가 독일로 다시 돌아가는 날, 어찌 이리 날짜가 빨리 갔는지 보내는 마음이란 살점 한 움큼 떼어내는 것 같은 아픔이라며 눈가에 눈물이 붉게 물든 얼굴로 언제 또 올 거냐며 다짐하시던 엄마의 모습이 삼삼히 떠올랐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엄마는 일평생 우리 팔 남매의 밑거름되어 모든 근심 걱정 꿰매시며 한결같은 사랑으로 품어 주셨다. 큰오빠의 실수로 기울어진 가정 형편에 괴로워하시며 힘든 마음을 달래기 위해 입에 붙은 찬송가 가락을 되뇌며 침침한 눈으로 성경을 읽으시고서 심지가 약해지지 않게 나날이 달빛과 별빛에 손 모으며 평안함을 찾으려 무릅쓰셨다. 목이 긴 기다림에 기울어 손가락을 꼽던 하루하루, 부모 자식 인연으로 오손도손 살지 못한 아쉬움, 그냥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는데 멀리 떨어져 살면서 섬김의 시간을 놓쳐버린 죄책감, 상처보다 오래 남는 것이 죄의식이라고 이제는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음에 회초리로 맞은 듯 가슴이 미어진다.
살아보니 나중은 없었다. 왜 이제야 절절히 깨닫는 것일까? 이역만리 외국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불효였다. 난 엄마에게 평생 아픈 새끼손가락이었는데 이제는 엄마가 내게 아픈 손가락이다. 마지막 기다림마저 내려놓을 때 임종 놓친 걸음은 용서하셨을까?
덩그런 징 소리로 울리는 끝없는 바닷속같이 깊은 사랑인 어머니! 거룩한 날개 그늘에 고이고이 잠드소서! 먼 날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두 분의 무덤에 잊지 못한 마음처럼 패랭이꽃을 피우겠습니다.
난, 가끔가다 꿈결에서 솔바람 등에 업고 홑이불처럼 덮인 추억을 찾아 햇살이 뜰에 뛰놀고 안마당 한쪽으로 올망졸망 꽃이 웃고 댓돌에 놓인 눈에 익은 고무신 두 켤레와 듬직한 아버지의 등이 보이고 그리운 엄마의 목소리가 있고 무슨 짓을 해도 이쁘던 개구쟁이 꼬마 조카들과 북새통을 이뤘던 배냇짓 고향 집을 한 바퀴 휘돌고 온다.
2009년 7월 18일, 병원 근속 40년을 맞이한 날이다. 독일에서는 근속 25주년과 40주년을 매우 중요시하고 큰 행사를 한다. 그날 행사의 첫 순서로 내 분수에 넘치는 병원장의 축사와 독일 기독교 재단으로부터 최고의 디아코니아 훈장 증정이 있었다. 많은 축하 인사와 꽃다발, 귀한 선물도 받았다. 그날 하루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나만의 날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선물은 동료들이 구상한 연극 한 토막이었다. 호화찬란한 연극은 아니었지만, 무척 애를 쓴 듯 보였다. 그 첫 장면은 수술 환자를 눕혀 놓고 간호사들이 규율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일하는 모습이다. 껌을 짝짝 씹으며 껌으로 풍선을 불어 터뜨리기도 하고 볼연지 두들겨 가며 요란스럽게 화장하고 담배 연기를 뿜어내면서 아주 짧고 야한 수술 가운을 입고 엉덩이를 맞대고 의사들과 어울려 목젖이 환히 보이도록 깔깔거리며 호들갑을 떨고 있을 때 직원들이 두려워하는 간호사가 나타난다.
갑자기 들이닥친 간호사 앞에서 당황한 그들은 쩔쩔매며 그 자리를 수습한다.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면서 잘못된 현장과 그들의 태도를 하나하나 지적하는 그녀는 동양 여자여서 화장도 마치 동양인처럼 보이게 했고 동양사람 악센트를 넣은 말투를 썼다. 그 깐깐한 간호사는 바로 나를 비유한 것이었다. 동료들은 긴장감마저 감도는 한 장면 한 장면의 연기를 어찌나 잘 해냈는지 비눗방울처럼 박수가 터져 나왔다.
통째로 주어진 뜻깊은 하루를 100여 명의 축하객이 참석한 꽃밭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덕담을 나누고 지인들이 각각 공들여 만들어 온 한국 음식을 함께 나누며 웃음꽃 한 바구니 내려놓고 눈물 나게 행복한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참되게 사는 사람에겐 두려움이 없다는데 인간이 부족하고 나약할수록 남 탓을 하게 되고 침도 안 바른 입술로 뻔한 거짓말, 엉뚱한 변명을 먼저 한다고 한다. 난 평소에 동료가 어떤 잘못을 했을 경우, 진상을 정확히 파악해 규명하고 거기 따른 질책과 책임을 추궁해서 다시는 복사판 같은 실수가 일어나지 않도록 책임자의 명목으로 엄격하고 야무지게 마무리했다.
2010년 4월에 신경을 칼날처럼 세워야 하는 수술실 간호사로 41년의 직장생활을 끝마치고 정년퇴직했다. 난 꿀 먹은 벙어리로 맨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로지 한 우물을 쉼 없이 파며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아낌없이 감당하며 시련 속에 꽃피는 연꽃처럼 순응의 지혜를 배우며 과분한 능력과 공로를 인정받은 수간호사직까지 거쳤다. 내 인생의 절정기와 황금기를 이곳에서 맞았고 나의 젊음과 영혼을 고스란히 이곳에 바쳤다. 나의 인생은 위대하거나 크게 내세울 건 없지만 각시탈 웃음 띠며 야생화의 끈기와 강한 의지로 묵묵히 참고 이겨낸 삶이었다.
은퇴한 후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그 옛날 문학소녀 시절에 분홍 리본 꿈 달고 생각 주머니를 키우며 즐겨 썼던 글을 쓰기 시작했다. 40여 년 동안 쌓였던 온갖 설움이 복받쳐 오름을 느꼈다. 마치 누에가 실을 풀어내듯 내 속에 맺힌 응어리를 토해내
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2016년에 M 한국 문단에 늦깎이 작가로 등단이 되어 서울에서 있는 등단 식에 참여하는 영광을 가졌다. 가족, 지인, 유리알같이 맑은 꿈 많던 고향 친구들이 한달음에 달려와서 크게 축하해 주었다.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가슴 뜨거운 날이었다. 말과 글은 민족의 생명이 되는 것처럼 우리 말을 사랑하며 독일 하늘 아래 세월이 남긴 우리네 이야기를 알알이 꿰어 독자를 진한 감동으로 출렁이게 하고 쓰러진 것을 세워주고 보듬어 주는 마음으로 숨 멎는 날까지 글을 쓰고 싶다.
이제 다리가 아프고 팔도 아프다. 그래도 나지막한 가슴 속에 알 수 없는 갈증을 풀어내고 싶은 간절함으로 부단히 써야 한다.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과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간호사라는 직업을 빼고 내 인생을 말할 수 없다. 간호사를 중심축으로 평생의 삶이 이루어졌다. 간호사로 친구를 사귀었고, 간호사로 일하고, 간호사로서 긍지를 가지고 눈물 꽃 맺고 풀면서 놋그릇처럼 닦았다. 한번 간호사이면 영원히 간호사다.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어 슬픔이 반이 되었던 오래되어도 빛나는 초록 마음 가득한 인연은 참으로 아름답다.
내 곁 가슴께 살아 있는 가을 햇귀 같은 고마운 사람들이 시나브로 하나둘 떠나간다. 시큰한 눈물 자국 함께 밟고 가자던 동료가 보고 싶다. 독일 땅에 뿌리를 내린 파독 간호사의 이야기가 오늘날의 조국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던 삶으로 조국에서는 물론 이 독일 땅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코리안 천사’로 길이길이 기억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애당초 3년의 고용계약이 반세기를 훌쩍 넘어 장장 54년의 머나먼 경주가 될 줄을 그 누가 알았으랴? 아프게 절룩이는 해어진 짚신 한 짝 같은 타향살이,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뀐 세월 속에 윤슬 같은 꽃 청춘도 묻혀버렸다. 이제는 내 지갑에 든 시간도 많이 얇아졌다.
철새의 울음 같은 그 긴 세월에는 웃음이 있었고 눈물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고 미움도 있었다. 어느덧 꽉 찬 나이에 씩씩했던 어깨가 꺾어진 채 잠이 들고 주름진 얼굴엔 거뭇거뭇 검버섯이 피어 번지고 검은 머리에 내린 백설은 봄이 와도 녹지 않는다. 빈소라 귀에 바람이 인다. 움츠리는 자라목에 허리뼈가 시큰거리고 물안개 사라지듯 흐려지는 기억은 입에서 감감 돌면서 생각이 안 나는 단어가 종종 있다.
살아가면 고향이라고 이제는 박하사탕 같은 나라 독일에서 하늘의 은총 같은 파릇파릇 손자들과 까르르 웃음소리 굴리는 옥구슬 같은 손녀랑 시간을 묶어 두고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큰소리를 치며 아무것도 못 본 척 딴청을 부리면서 샛별눈하고 작은 가슴 조마조마하며 애써 꼭꼭 숨은 달덩이들을 찾으려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봄날의 꿈처럼 행복한 술래 할머니가 되었다.
“뿌리를 뽑아 국경을 넘어 다른 땅에 다시금 뿌리를 내리겠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내 힘으로 얻어야 진짜 내 것이 되는 것처럼 소리 없는 열화(熱火)로 홀로서기를 하였습니다. 나의 서러움과 눈물, 노력과 열정, 인내와 성실이 여러 색깔로 수놓은 희로애락이 널을 뜁니다. 난 어떠한 난간에서도 거짓 없는 몸짓으로 한 조금 부끄럽지 않게 대한의 딸로 온 힘을 다하여 당당하게 살았음을 감히 장담합니다.
내가 =낮아질 때 네가 보이는 것처럼 겸허한 마음으로 이제 더는, 불평하지도 서러워하지도 않으며 주님의 깊은 섭리 안에서 넉넉한 느낌, 깨끗한 행동, 사랑받는 사람으로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하여 옹골지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위대하신 주님, 단단한 껍데기를 깨고 무거웠던 웃음이 여울져 울렁이는 지금, 이 행복이 오래오래 내 곁에 머물러 있게 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문득 하늘을 바라볼 때가 있다. 문득 고향을 불러볼 때도 있다. 바람이 넘기는 책장처럼 가버린 허망한 세월 따라 창에 비친 얼굴, 엄마를 떠올릴 때도 있다. 과거는 돌아올 줄을 모른다. 눈시울 적신 시절을 넘나든 아픈 세월이 닳도록 지문이 되었다.
지나간 그대로 오늘을 감사하며 뼛속까지 자란 인내의 힘으로 차분히 살피면서 한 생을 나누어지고 닮아가는 우리 부부는 오늘도 마음을 다해 축 이룬 삶의 수레바퀴를 소소히 굴린다.
보드레한 하늘엔 구름 한 점 한가롭다. 싱그런 풀빛이 짙어지는 5월에 살랑살랑 얼굴에 와 닿는 꽃바람이 감미롭다.(끝)
1369호 14면, 2024년 7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