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다리 위, 70대 다리유학생들의 ‘배꼽 잡는 찰나’

슈프레강물에 띄워 보낸 세계의 강과 우리의 청춘

노석임

1단계: 설레는 출사표 — 김밥은 없어도 가슴은 뛴다

소풍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삶은 계란 몇 알과 사이다 한 병, 그리고 밤새 간절하게 기다리던 김밥. 6남매가 가지런히 누운 밤, 자다 깨서 혹시 내 김밥 도시락이 머리맡에 잘 있나 슬그머니 손을 뻗어 더듬어보던 그 시절 추억들이 아득한 흑백영화처럼 스쳐 지나간다.

오늘 우리 ‘다리 유학생’들 배낭 속엔 김밥도, 사이다도 없다. 그래도 마음만큼은 그때 그 시절 십대 소녀나 다름없다. “내일 날씨는 어떠려나?”, “약속 시간에 지각하면 안 되는데!”

드디어 다리 밑 첫 만남. 약속 장소를 제각기 다르게 알아들은 덕에 시작부터 옥신각신 난리가 났다. 하지만 그마저도 좋아서 일단 단체 사진부터 한 장 박고 본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나올까, 남아있는 청춘을 싹 끌어모아 포즈를 잡느라 오버바움 다리(Oberbaumbrücke) 위에 까르르 웃음소리가 시원하게 울려 퍼진다.

2단계: 오버바움의 야사 — 채소 싸움과 낡은 운동화

“명색이 다리 유학생인데 역사 공부 좀 해볼까?” 하는 진지함은 딱 3초 간다. 구글이나 정식 역사책에는 안 나오는 야사와 정겨운 뒷담화가 시작되니 다들 눈빛이 달라진다. 이 거대한 다리를 누가 지었는지 같은 딱딱한 소리는 필요 없다. 동·서독 분단 시절 이 다리에서 일어난 웃지 못할 비화들이 진짜 공부다.

“언니들, 통일되고 나서 이 오버바움 다리에서 프리드리히스하인하고 크로이츠베르크 주민들이 서로 ‘우리 동네가 진짜 베를린 중심이다!’ 하면서 썩은 토마토에 썩은 바나나, 썩은 계란까지 던지고 난리도 아니었대! 이름하여 ‘채소 싸움(Gemüseschlacht)’!”

공부해 온 할매의 자랑스러운 썰에 모두의 눈이 똥그랗게 커진다. “어머나, 양반 체면에 채소를 던졌단 말가?”, “에구구, 아까운 야채를 와 던지노! 국이나 끓여 먹지!” 다들 배를 잡고 자지러진다. 분단의 아픔이 서린 다리 위에서 진지한 역사를 유쾌한 해학으로 승화시키는 우리만의 수업시간이다.

문득 다리 위 전선에 웬 낡은 운동화들이 끈이 묶인 채 주렁주렁 걸려 있는 게 보인다. “어머, 저거 와 저래 걸어놨노? 옷걸이도 아니고!” 누군가 묻자, 또 다른 할매가 으스대며 한 줄 보낸다.

“저게 말이다, 옛날에 젊은 애들이 자기 영역 표시하려고 던져 걸었다는 말도 있고, 여기서 무사히 학위 마치고 고향 갈 때 ‘나 이제 이 동네 떠난다!’ 하고 던졌다는 소리도 있단다. 아니면 짝사랑하는 사람 얻게 해달라고 비는 주문이라나 뭐라나!” 그 말을 듣던 할매 하나가 손사래를 친다. “에구구, 저 높은 데 신발을 던질 기운이 있으면 집에서 밥이나 더 해 먹지, 청춘도 참 유별나다!”

3단계: 슈프레강의 깊은 숨결 — 960개 다리와 세계의 강 이야기

다리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슈프레강을 바라보노라니 문득 이 강이 지닌 깊은 숨결이 느껴진다. 하늘 높이 올라가 베를린 시내를 내려다본다면 어떤 모습일까? 시내 구석구석 실핏줄처럼 갈라진 물길 위로 무려 960개가 넘는 다리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히 놓여 있는 장관이 펼쳐질 것이다. 물의 도시라 불리는 이탈리아 베네치아보다 다리가 더 많다니, 베를린은 그야말로 물과 다리로 완성된 도시인 셈이다.

이 촘촘한 물길과 다리들은 단순히 사람만 나른 것이 아니다. 19세기 독일 산업혁명의 젖줄로서 석탄과 벽돌을 실어 나르며 프로이센의 번영을 이끈 숨은 주인공이었다. 잔잔하게 흐르는 저 수면 아래 수많은 공장과 노동자들의 땀방울이 묻혀 있다.

생각해 보면 인류의 위대한 역사와 기적은 늘 강변에서 시작되었다.

• 독일의 라인강과 베를린의 슈프레강: 잿더미 속에서 경제를 일으킨 주역이 ‘라인강의 기적’이라면, 베를린을 960개의 다리로 단단히 동여매고 역사와 사람을 이어온 ‘슈프레강의 수호’ 역시 또 다른 기적이다.

• 영국의 템즈강: 증기기관과 산업혁명의 거친 숨소리를 바다로 실어 나르며 세계 제국을 건설했던 물길이다.

• 프랑스의 세느강: 화가와 시인들의 예술적 영감을 품어 안고 세계 문화의 중심을 이룬 낭만의 상징이다.

• 미국의 허드슨강과 미시시피강: 대륙의 물자를 실어 나르며 신대륙의 산업화와 경제 성장을 폭발시킨 거대한 혈관이었다.

• 한국의 한강: 그리고 전쟁의 폐허를 딛고 피와 땀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한강의 기적’을 만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우리의 고향 강이다.

이 거대한 세계의 강들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베를린의 슈프레강 역시 960개 다리와 함께 역사의 수레바퀴를 묵묵히 돌려왔다. 타향살이 수십 년, 이 땅에 와 독일의 번영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헌신했던 우리네 삶도 어쩌면 갈라진 마음과 세상을 연결해 온 저 다리들의 운명과 참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4단계: 처녀자리 다리의 웃음 또 다른 청춘을 기약하며

어느덧 제2차 유학 장소인 처녀자리 다리(Jungfernbrücke)로 이동한다. 베를린에서 가장 오래된 이 귀여운 도르래 다리엔 또 슬픈 역사가 숨어 있다. 옛날 프랑스에서 종교 탄압을 피해 베를린으로 망명해 온 ‘위그노’ 교도들이 이 근처에 모여 살았단다.

집안일과 수공예로 생계를 이어가던 위그노 처녀들이 이 다리 위에서 손수 만든 비단과 자수를 팔았는데, 워낙 솜씨가 좋아 베를린 시내에 소문이 자자했단다. 타향살이에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도 참 야무지게들 살았던 모양이다.

그때 누군가 슬그머니 옛날 전설 한 토막을 던진다. “그 시절 예비신부들이 이 다리를 건널 때 다리 목재판에서 삐걱 소리가 나면 순결을 의심받았대~”

그 말이 끝나자마자 한 분이 무심하게 건너더니 한마디 던진다. “하이구야! 내가 지나가는데 소리가 하나도 안 나네? 나 아직도 순결한 처녀인가 봐!” 순간 다리가 뒤집어진다. 70대 시니어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십대 여고생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해 근처 카페로 피신한다. 고풍스러운 다리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마시는 따뜻한 커피와 바삭한 크루아상! 그야말로 독일어로 ‘나흐 게타너 아르바이트(Nach getaner Arbeit, 일을 마친 뒤에)’ 누리는 꿀맛 휴식이다.

집에서 열심히 ‘열공’해온 지식들을 보따리 풀듯 쏟아내며 서로 어깨를 토닥인다. “잘했다!”, “어머, 대단해!” 따스한 칭찬 속에 다음 장소인 슐로스다리(Schlossbrücke) 일명 게다리(Hundebrücke)에서의 만남을 기약하며 아쉬운 자리를 턴다.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이렇게 멋진 하루가 열리는데! 잠옷 바람으로 커피 잔 들고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시간에, 우리는 벌써 베를린 한복판에서 신나게 수다를 떨고 추억을 한 페이지 더했다.

다음 ‘다리 유학 소풍’이 벌써 기다려진다. 다음 다리에는 부끄럽게 발가벗은 청년 조각상이 기다리고 있다는데, 그 발그레한 청춘을 구경할 생각에 노장들의 눈빛이 또 초롱초롱해진다.

“유학생님들, 그다음 모임 전까지 스파이 영화 한 편씩 꼭 보고 오기다!” 오늘도 베를린이라는 인생 캔버스 위에 우리의 유쾌하고 파란만장한 보따리가 기분 좋게 풀려나간다.

1478호 14면, 2026년 10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