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를 배우며 재정립되는 정체성
새로운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 안다. 독일에 오래 살면서도 독일어를 그저 그렇게 하는 필자도 독일어와 사랑에 빠졌다가 삐져서 돌아서기를 일 년에 수차례씩 한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면 그 짓은 또 시작된다.
새로운 독일어 문법 교재를 사서 몇 페이지 열심히 풀고, 단어집도 사서 차근차근 예문도 보고 모르는 단어도 정리하는 일은 길어야 한 달, 어쩔 때는 일주일 안에 식어버리기도 하는 괴상한 새해 초의 설앓이다. 대체 독일어를 잘하고 싶으면서도 왜 꾸준하게 공부하는 것은 이렇게 힘든지…
20년 가까이 독일살이를 하면서 시간의 여유가 생길 때마다 이제부터 열심히 독일어 공부를 하겠다는 같은 다짐을 수십 번을 했고, 교재를 사들이고 큰맘을 먹게 되면 학원에 등록하여 한두 달 수강하기도 했다. 요즘은 온라인 강의도 많아서 학원 등록도 버튼 하나로 되기에 등록한 후 학원에 등록한 것을 까먹어 버린 적도 있다.
더 부끄러운 것은 온라인 강의를 고를 때는 지나치게 신중해져서 모든 강의를 다 펼쳐 놓고 단계를 알 수 없는 나의 독일어 (독일에 오래 살아서 읽고 듣기는 제법 되고 문법은 엉망인)에 딱 맡는 강의를 찾기 위해 수 시간 심지어 며칠을 고심한다.
문제는 강의 선택의 고민은 오랜 시간 공들여 하지만 정작 강의를 수강하는 열기는 급격히 식어버려 구입한 온라인 강의를 끝까지 마친 적이 없다는 데 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어쩌다 한국에 가면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등 큰 서점에 들러서 읽고 싶은 책을 잔뜩 산 후에 혹시나 향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까 하는 마음에 한국어로 된 독일어 교재들을 사들고 들어온다.
그 무거운 것들을 낑낑 매고 싸온다. 독일에서 산 교재들까지 집에 쌓인 교재가 산더미다. 교재를 만드는 출판사 사장님이 보면 나는 정말 사랑스러운 학습자가 아닐 수 없다. 공부는 하기 싫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새로운 교재는 계속 사들이고… 대체 왜 이럴까.
언어를 배우는 일 이외에도 습관을 바꾸어서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일은 다 힘들다. 운동도 그렇고 평소에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학습할 때 우리는 보통 이러한 난관에 부딪힌다. “해야는 하는데 습관이 들지 않아서”, “하기 싫지만 그래도 해내기 위해” 환경을 바꿔보거나 필자처럼 이것저것 새로운 습관을 들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 – 이를테면 새로운 교재나 수업을 수강하는 것 – 일에 투자를 하며 하기 싫은 마음을 극복하고 해내기도 한다. 그런데 유독 실천이 잘 안되는 것이 나이 들어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유학생도 아니고 (혹은 유학 생활이 이미 끝나서), 살아가는데 굳이 더 잘할 필요 없는 이 말에 왜 이런 투자를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과 독일어를 잘하면 잘할수록 독일에서 살기는 편해지고 당연히 이 땅에서 살려면 이 땅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번민에 사로잡힌다.
300 단어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나의 독일어 실력은 발음도 정확하지 않고 문법도 다 틀리게 말하지만 은근 쓸 만해서 가게에서 필요한 것을 사고, 누가 길을 물으면 답할 수 있고, 관청에 가서 필요한 일을 해내는 데 무리가 없다. 가끔 독일 이웃과 길에서 만나면 웃으며 대화도 가능하다.
이 두 가지 마음, 즉 대략 의사소통이 되는데도 (정확하게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독일어를 더 잘 배워야 할까와 더 잘해서 이 땅에서 더욱 편안하고 당당하게 살리라 하는 두 가지 마음은 끊임없이 상충하며 나를 괴롭힌다.
늦은 나이에 언어를 배우는 것과 정체성의 상관관계에 대해 연구는 상당히 많이 이루어져 있다.
과거에 비해 눈에 띄게 증가한 국제이주와 이민으로 늦은 나이에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하는 상황에 닥친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러다 보니 언어 배우기에 난관을 겪는 성인들이 많아졌으며 그에 상응하는 교육기관과 교육자들의 노력은 상아탑을 이루고 있다. 어떻게 하면 성인들에게 언어를 더 잘 가르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성인들 언어학습의 동기부여를 극대화할 수 있을까.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하게 혀로 다른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가 관여하는 현상이다.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 우리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즉 인간 전체로 관여한다.
성인은 학습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때까지 그동안 자신이 누구로 어떻게 살았는지와 무관하게 미성숙한 아이 취급을 받게 된다. 언어를 배우는 동안 학습자는 당연히 원어민과 같은 발음을 하기 힘들 것이고, 문법도 맞지 않게 말할 때가 많고, 질문을 받아 답변해야 할 때 혹은 질문을 할 때에도 모어에 비해 생각하는 시간이 더 필요하기 마련이기에 상황에 빠르게 대처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다 보니 성인이 되어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사용한 다는 것은 이렇게 모자란 나를 마주 대하는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동시에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서 끊임없이 모국어인 한국어를 생각하게 되고 즉 모국어 화자로서의 자신과 외국어 학습자로서의 자신에 대해 알아가고 비교하게 된다.
이 과정은 지속적이고, 항상 변화하는 과정으로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모국어 화자로서의 정체성과 외국어 학습자로서의 정체성을 탐구하게 된다.
한국 대기업에서 IT 부서 차장으로 지내다가 얼마 전에 프랑크푸르트로 해외취업되어 이주한 37세 김지영 씨의 경우를 상상해 보자.
김지영 씨는 한국에서 잘나가는 IT업계에 승승장구하다가 새로운 도전이 필요해서 독일 회사로 이직했다. 이직이 결정되어 오기까지 열심히 한국어 공부를 했고 B1 수준의 독일어 실력을 갖추어 독일로 왔다. B1까지 잘 마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현지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주변 사람들은 김지영 씨의 독일어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지만 어딜 가나 부딪히는 언어의 난관에 온 지 석 달 만에 김지영 씨의 건전지는 방전되었다. 독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지 못하니 자신의 학습 수준이나 나이와 상관없이 미성숙한 아이 취급을 받는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어디서든지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자신 있게 살아왔던 김지영 씨는 이민 석 달 만에 미성숙 독일어 발화자가 되어 완전히 작아져 버렸다.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든 대기업의 차장이든 여기서는 그것이 언어로 증명되지 않는다. 현지인들이 보기에 김지영 씨는 그저 부정확한 발음과 어설픈 문장을 구사하는 이방인에 불과하다.
언어와 정체성 연구로 잘 알려진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의 보니 노르턴 (Bonny Norton) 교수는 언어는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기도 하고 우리의 정체성에 의해서 만들어지기도 한다고 했다. 그 말은 언어를 배우면서 우리는 정체성을 확립해 가고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언어를 어떻게 배우는지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 혹은 젊은 나이에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 나이 들어 배우는 것보다 성공할 확률이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단순히 어린이가 언어를 배우는 능력이 뛰어나다기보다 그 언어를 배우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훨씬 적기 때문인데, 그 거부감은 자신의 내부에 만들어진 세상의 크기에 비례한다.
즉 성인은 이미 잘 발달된 언어와 그에 걸맞은 세계와 정체성이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는 상태이고 어린이는 아직 그렇지 못하기에 새로운 언어에 훨씬 더 개방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고 그러기에 더 쉽게 새로운 언어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노르턴 교수는 학습자가 학습 언어 (즉 우리의 경우 독일어)를 원어민만의 것이라고 생각할 때, 즉 (학습자를 포함한) 독일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의 언어라 생각하지 않고 독일어가 모국어인 화자만 온전하게 소유할 수 있는 언어라고 간주할 때 학습 언어에 대한 거부감이 더 커질 수 있다고 했다.
특정 언어가 단순히 그 언어의 모국어 화자만의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학계에서 이미 오랜동안 비판의 대상이지만 아직까지도 학습자와 교육자들에게는 독일어 모국어 화자를 독일어 사용자의 주인으로, 또한 독일어 실력의 달성 목표를 원어민의 수준으로 세우는 것에 대한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 현상은 영어도 한국어도 교육도 마찬가지다).
모국어 화자만을 언어의 주인으로 보고 학습자의 절대 목표로 삼는 것을 네이티브 스피커 주의(Native-speakerism)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 언어를 배우는 학습자들을 모두 타인 (Other)으로 보게 만든다.
즉 이러한 시각은 학습자들을 진정한 언어 사용자에서 소외시켜 버린다. 그러다 보니 학습자는 자신들이 발화하는 모든 독일어가 부정확하고, 틀리고, 잘못된 언어라고 간주하게 되고 (배우는 과정의 언어 발달은 당연히 그럴지언데) 학습 언어를 발화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끄러운 것으로 즉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더 나아가 노르톤 박사는 그녀의 사회 정체성 이론에서 학습자가 새로운 언어를 잘 배우기 위해서는 그들이 말할 자격이 있다는 자의식을 개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완전하게 말하더라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말을 해야만 새로운 언어를 잘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불편한 사람들이 많을 수 있다. 굳이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면서 어설픈 독일어로 무슨 말을 해 망신을 당한 후 집에 와서 이불킥 하는 상황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이냐…
언어는 절대로 중립적이지 않다. 그리고 언어를 사용할 때 거기는 항상 힘이 작용한다. 학습 상황에서 당연히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독일어 모국어 화자는 힘센 사람이고 미숙한 독일어를 사용하는 학습자는 권위와 존엄성을 상실하면서 약자가 된다. 학습자에게 말할 자격이, 즉 그러한 파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학습자는 언어를 배우는데 힘을 받지 못한다.
즉 그들의 ‘비모국어 화자이면서 학습자’로서의 정체성이 존중되어야만 그들이 언어를 배우는데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모국어 화자로서의 정체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말은 즉 그들이 독일어를 배우는데 자신감을 느끼고 자랑스러워해야 말하기 학습이 성공 가도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왜 독일어 학습에 고통을 느끼고 자꾸 학습이 정체되는지에 대한 답이 나왔다. 독일 거주 기간이 긺에도 불구하고 그에 상응하는 독일어를 하지 못함에 대한 자책이 앞서 학습이 정체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독일에 몇 년 살면 대충 독일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맞지 않는가? 당연히 그렇지. 이십 년 가까이 독일에 살면서 독일어를 제대로 못하는 것에 대한 자책이 큰 문제인 것이다. (사실 내 입으로 말하지 않으면 누가 아는가? 내가 여기서 몇 년 동안 살았는지…)
그렇다면 성인이 새로운 언어를 학습함에 있어 가져야 하는 바람직한 마음은 어떤 것일까?
언어와 정체성에 대한 최근 연구에 따르면 나의 다른 모습들, 여러 가지 정체성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즉 독일 사회에 잘 적응하려는 자아와 비모국어 화자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독일어를 사용할 수 있음에 대한 자부심이 균형이 맞을 때에 독일어를 잘 배울 수 있다고 한다.
독일어를 학습하는 사람들이 학습자로서의 정체성만을 가진 것이 아니다. 언어 학습자이면서 부모이고, 조부모이고, 직장인이고, 종교인이고, 학생이고, 사회봉사를 하는 사람이고 등등 수많은 다양하고 계속해서 변화하는 정체성을 탑재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다중적 정체성과 협상하고 재협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즉 우리는 단순한 독일어 학습자가 아닌 다중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기에 세상의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미숙한 취급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단단하게 다지고 나의 다른 정체성들을 잘 관리하면 올해의 독일어 공부에도 다시 박차를 가할 수 있다.
자신의 미숙함을 극복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지만 또 도전해 보는 것이다. 2023년 새해니까. 나를 위시하여 다시 독일어 실력을 다지고자 하시는 모든 분들의 건승을 빈다.
1301호 14면, 2023년 2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