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2)

교포신문사는 3.1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8회에 걸쳐 특집 면을 준비한다. 이번 기획 특집에서는 먼저 3.1운동의 전반을 살펴보며, 3.1운동이 우리 민족사에 차지하고 있는 의미를 되짚어 보며, 3.1운동의 결실인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과정을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편집자 주

3·1 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3·1 혁명 또는 기미년에 일어났다 하여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부른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으며, 고종의 인산일(=황제의 장례식)인 1919년 3월 1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민족대표 33인으로 부르며, 그밖에 만세 성명서에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직접, 간접적으로 만세 운동의 개최를 위해 준비한 이들까지 합쳐서 보통 민족대표 48인으로도 부른다. 이들은 모두 만세 운동이 실패한 후에 구속되거나 재판정에 서게 된다. 약 3개월 가량의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조선총독부는 강경하게 진압했다.

3·1 운동은 현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역사적 기원이 되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한편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에 의한 강경책을 펴던 조선총독부는 민족분열책인 일명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되었다.

I. 3.1운동의 배경

(1)외부 원인론과 내부 원인론

우선 일본에서 널리 통용되었고, 1945년 이후부터 1970년까지 한국에서도 3.1운동의 동인에 대해서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인 견해였다. 이는 1차 세계대전 말기에 윌슨이 재창한 ‘민족자결주의’와, 러시아 10월 혁명의 영향으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3.1 운동의 역량이 민족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닌, 민족 외부에서 주어졌던 상황으로 인해 일어난 것으로 해석이 된다. 즉, 3.1운동은 일본에 대항한 민족의 자발적인 운동이 아닌 외부의 상황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었던, 수동적인 운동이었다는 해석으로 까지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주장 모두 3.1운동의 역량의 기반이 될 수는 없다. 우선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의 식민지’에 해당하는 문제였으며, 민족지도자들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민족자결(民族自決)은 물론 환영하는 바이나 민족자결이란 것이 어떠한 지역에 상용되는 것인지 불분명하므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민족자결이라고 해서 이것을 몽상(夢想)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다는 것을 말하였다.” (최남선)

“그 때 우리들은 당시 1차 세계대전이 동아시아에는 전면적으로 파급되지 아니하였고, 또 일본이 전승국측에 가담하고 있었던 관계로 조선독립이 당시에 즉시 실현되리라고는 생각지 아니하였다. …..(중략) 민족의 의사표시를 세계에 표현할 필요를 절감하였었다. 그러하자면 우선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치 아니하면 아니 되리라고 생각하였다.”(현상윤)

그렇다고 해서 3.1운동과 민족자결주의가 아무 관련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3.1운동은 단지 민족자결주의를 기반으로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러시아 혁명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당시의 사회주의 이념이 3.1운동의 주도층에게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사회주의의 전파는 3.1운동 당시가 아닌 이후에 사회주의 노선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는 것이 올바를 것이며, 민중으로 확산되었다고 해서, 이를 사회주의이념의 영향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즉, 3.1운동은 민족 내부의 역량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일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내인론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 그리고 이로 인해 키워진 실력을 토대로 한 기회포착론으로 볼 수 있다.

내부원인론에 따르면 애국계몽운동은 애국의식과, 실력을 여러 분야에서 다각적으로 국민들에게 고양시키려 하였다고 한다.

한말의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구국운동뿐만이 아니라 언론구국운동, 실업구국운동, 국채보상운동, 신문화 · 신문학운동, 국학운동, 민족종교운동, 국외 독립군기지 창건운동 등을 전개하여 종합적으로 전 부문에서 민족독립 역량을 배양하고 강화하여 축적시켰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이 설립한 3,000여 개의 학교들에서 철저한 애국사상과 독립사상에 충만하여 언제나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에 떨쳐 일어설 수 있는 수십만 명의 장래와 민족간부들과 애국청년들을 양성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운동은 국민들에게 있어 지식적인 진보뿐만 아닌, 애국사상과 독립사상을 심어주었다. 즉,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이 고양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의병운동이 있다. 이 의병운동을 통해 민중의 실질적 애국의식이 고양 되었다. 앞의 애국계몽운동의 많은 부분을 이론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의병운동은 실제로 일본을 적으로 두어 이들과 전투를 했다는 데에서 이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의병운동의 의병장은 유생, 구군인, 농민, 상인 , 포수 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었지만 병사들은 거의 모두가 ‘농민들’ 이었다. 한말 의병운동에서 의병들은 약 2만 명이 전사했고, 1914년에 의병운동은 의병 일부가 만주, 노령으로 망명한 채 국내에서는 침묵되었지만, 의병운동에 참가했던 수많은 병사들이 다시 농민으로 돌아가 농촌에 잠복하게 되었다.

이후, 3.1운동이 발발했을 당시, 이들 농민들은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독립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고양되고 있는 민중의 의식들을 바라보며, 민족지도자들은 ‘기회포착론’이라는 전략으로 조선의 독립선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말 국권회복운동의 전술의 하나인 기회론과 기회포착론의 골자는 한마디로 말하면 먼저 독립을 쟁취할 ‘실력’을 양성하고 축적해 나가다가 국제정세 변동의 좋은 ‘기회’를 기민하게 능동적으로 포착하여 ‘작은 기회’도 ‘큰 기회’로 만들면서 국권회복운동과 독립운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해서 일본 제국주의를 강타하고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이었다.

즉, 이에 따라, 조선이라는 나라는 그 실력을 우선적으로 키워나가고 있었으며, 이들에게 주어진 기회는 바로 제 1차 세계대전이었다. 이후, 민족자결주의와 파리평화회담을 하나의 기회로 보고 이들은 자신들의 의사를 세계에 관철시키려고 하였고, 주체적으로 3.1운동을 일으키려고 했다. 당시의 민족지도자들은 ‘민족자결주의’가 조선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실력을 키워온 조선의 역량을 통해 자주성을 세계에 선포하려 하였다.

이와 같이, 3.1운동의 역량은 조선에 있어서 민족지도자, 민중들에게 그 의식이 고양되었으며, 이것이 3.1운동을 통해 자발적으로 표출했다고 하는 것이 내부원인론의 주장이다.

(2) 2·8 독립 선언

2·8 독립 선언(二·八獨立宣言)은 1919년 일본 도쿄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사건이다.

1918년 와세다대학 철학과 학생이던 이광수는 베이징에 건너가 체류 중에 제1차 세계대전의 휴전, 민족자결주의, 윌슨 강령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중국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파리 강화 회의에서 중국의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였다. 이광수도 조선 독립의 희망을 품었으며, 파리강화회의에 중국대표 주정샹, 구웨이준, 후웨이더 등이 베이징을 떠난 후 이광수는 서울로 돌아가 현상윤 그리고 최린과 독립운동을 논의하였다.

이광수는 11월 동경으로 돌아가 와세다대학의 정경과에 있던 최팔용을 만나 결의를 밝혔고, 최팔용은 백관수, 김도연, 서춘, 김철수, 최근우, 김상덕 등의 동지를 얻었다. 이광수는 원문을 쓰고 영문으로 번역을 하였다. 최팔용은 이광수가 상해에 피하여 있을 것을 권유하였고, 이광수는 이 요구를 따라 상하이로 피신하였다.

2월 8일 당일 오전에는 각국 대사관과 일본 국회의원, 조선총독부, 일본 여러 지역의 신문사에도 독립 선언문을 발송했다. 이날 오후 2시, 재일본 동경 조선 YMCA 강당에는 조선 유학생 학우회 총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회의가 개최되고 나서 최팔용에 의해 “조선 청년 독립단”을 결성하려는 ‘긴급동의’가 요청되었다

동경의 기독교청년회관(재일본도쿄조선YMCA 현 재일본한국YMCA)에 모여든 조선 재일 유학생 400 ~ 600여 명 앞에서 최팔용이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고 이광수가 기초한 2·8독립선언서를 백관수가 낭독했다. 참여한 사람은 장영규, 최팔용, 윤창석, 김철수, 백관수, 서춘, 김도연, 송계백, 변희용, 강종섭, 이봉수 등이다.

이들은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하였고,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며 민족의 궐기를 촉구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최팔용의 사회아래 대회선언과 결의를 열광 속에 가결하고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방향을 논의할 때 일본 경찰들이 들이닥쳐 해산을 명하였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이를 거부하여 큰 소란이 일어났다. 이들은 일경과 몸싸움을 벌이다 강제 해산되고 사회자 최팔용 외에 약 60명이 검거되었고, 8명의 학생들이 기소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굴복하지 않고 2월 12일 오전에 50여 명의 조선인 학생들이 청년회관에서 독립운동을 협의하다가 검거되었다.

이렇게 2월 한 달 내내 조선인 학생들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이광수에 의하여 조선과 해외에 보도되었으며, 이 사건은 다음 달 3월 1일 서울에서 이루어진 3·1 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

2019년 1월 18일, 1107호 14-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