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사는 3.1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8회에 걸쳐 특집 면을 준비한다. 이번 기획 특집에서는 먼저 3.1운동의 전반을 살펴보며, 3.1운동이 우리 민족사에 차지하고 있는 의미를 되짚어 보며, 3.1운동의 결실인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과정을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편집자 주
II. 3.1운동의 전개
(5) 3․1운동의 확산
서울에서는 2일 이후에도 크고 작은 만세 시위가 4월 초까지 연일 계속되다시피 했다. 3․1운동 다음날인 2일에도 마찬가지로 많은 인원들의 만세시위가 이어졌고, 3월 5일에는 평양에서 온 1백명의 학생을 비롯한 일반민들이 가세하여 큰 시위가 일어났다. 그 시위에서 총 인원은 1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8일 이후로부터는 각종 파업과 철시가 이어졌다. 이후 일본군의 탄압으로 인해 잠잠해졌다가 22일부터 운동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이 운동은 4월 1일 경까지 계속되었다.
경기도에서의 운동은 서울과의 연계성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자체적으로 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에 따른 희생자들도 상당수였다.
충청북도에서의 운동은 3월 19일 괴산에서의 시위를 본격적인 시작으로 하여 4월 중순경 까지 약 58회 이상 일어난다.
경기도의 운동상황과 마찬가지로 서울에서의 운동 계획과는 관련 없이 3.1운동 전개 이후 그에 따라 궐기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충청남도에서의 운동은 3월 3일 예산군을 시작으로 3월 10일 강경에서의 운동을 기점으로 본격화 되었다. 이 운동은 대부분 4월 초순까지 전개되었는데, 3월말에서 4월 초순까지의 운동은 충남 각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였다.
강원도에서의 운동은 3월 10일 철원(鐵原)에서 비교적 큰 규모의 만세 시위를 전개함으로 발단되었다. 이 시위는 당지의 기독교와 기독교 계통의 전정의숙(專精義塾), 보통학교(普通學校), 농업학교(農業學校)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운동은 23일에는 화천, 27일에는 횡성, 원주군으로 번졌으며, 28일, 29일에는 금북, 화천에서 열렬히 일어났다고 한다.
경상북도에서의 운동은 3월 8일 대구에서의 운동을 시작으로 경북 각 지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전국적으로 보았을 때 경상북도의 운동은 다소 늦게 시작한 면이 없지 않으나, 희생자 및 운동지역은 광범위 하였다.
경상남도에서의 운동은 3월 3일에 부산과 마산 등지에서 독립선언서를 일반에게 돌리고 3월 11일 부산진에서 운동이 일어남으로 전개되었다. 이 기간 중에 도내 21개 군이 모두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였고, 단회성인 운동이 아닌, 수회, 수십 회의 연속적인 운동이 일어났다. 이로부터 4월 15일경 까지 약 1개월 동안 경상남도 내에서 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전라북도에서의 운동은 3월 3일 전주, 군산, 이리 등지에서 선언서가 일반에게 배부되면서 시작되었다.
전라남도에서의 운동은 3월 3일 구례, 수천, 여수, 광양에서, 또 3월 4일 목포에서 선언서가 배부, 전파되며, 10일 광주에서 시위가 일어남으로,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황해도에서의 운동은 서울과의 사전 연락이 있었으며, 3월 2일 황주에서 천도교도가 중심이 되어 시위를 전개함으로 본격화되었다.
평안남도에서의 운동도 또한 서울과 연락되어 3월 1일 평양, 진남포 등지에서 큰 시위가 벌어졌다. 2일부터는 운동이 더욱 치열해졌으며 다른 지역과 비교해 봐도 많은 살상자가 발생하였다.
평안북도에서의 운동은 의주, 선천, 정주 등의 지역에서 서울과 사전 연락하에 3월 1일에 일어나며 뒤이어 도내 다른 곳에서도 일어난다. 이 지역에서의 운동은 일 군경과 직접적으로 충돌하거나, 일헌병 분견소,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의 적극적인 운동 형태를 띤다.
함경남도에서의 운동은 3월 초, 중순에 치열한 운동을 전개하고 그 후에는 미약한 감이 있다.
함경북도에서의 운동은 일제의 경계가 삼엄한 지역에도 불구하고 3월 10일 성진에서의 운동을 시작으로 도내에서 운동이 전개된다. 3월 중순부터 4월 상순까지가 운동의 본격적인 시기였다.
이와 같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은 비폭력적이었으며, 질서 있고, 계획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에 일본은 크게 놀랐으며, 무력적이고, 철저한 탄압을 가했다. 이에 수원 제암리, 평남 성천, 평남 사천, 황해도 수안 등의 지역에서 대량학살의 탄압이 들어갔다.
– 참여자와 피해 규모
운동의 참여 인원에 대하여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은 차이가 있다.
일본인 학자 야마베 겐타로에 의하면 운동의 참여자는 50만 명 이상이라고 추정한다. 한국의 학자 신복룡은 46만 명 정도로 파악하였다.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만세를 부른 사람의 수효는 46만 3086명 정도였다. 그런데 역사학연구소의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서해문집, 2004)와 한영우의 《다시찾는 우리역사》(경세원, 2002년)에서는 참여 인원 2백만여 명, 전국의 만세 시위 건수 1,542 회, 사망 7,509 명, 부상 15,961 명, 체포 46,948 명의 규모로 서술한다. 참여 인원에 대하여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이유는 전거로 삼은 사료에서 비롯한다. 역사학연구소나 한영우 등은 그 출처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실린 통계를 전거로 삼았다. 많은 한국의 교과용 도서에서도 대체로 이 통계를 활용한다.
그런데 3·1 운동을 진압하였던 조선총독부 쪽의 통계는 이와 크게 차이 난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조선헌병대사령부와 총독부 경무총감부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조선소요사건일람표》(朝鮮騷擾事件一覽表)를 작성하여 3월 1일에서 4월 말까지의 상황을 10일 단위로 정리하였다. 이를 합산하면 4월말까지 조선인 시위 참여자는 58만 7,641 명(50 명 이하 참여자의 경우는 제외), 검거자 26,713 명(당일 13,517명, 추가 검거 13,196 명), 시위 참가자의 사망 553 명, 부상 1,409 명이라고 집계되어 있다. 또한 일본군과 헌병, 경찰의 경우 사망 9 명, 부상 156 명으로 집계하였다. 한편, 조선헌병사령부가 발간한 《소요사건 검거건수 조사표》(騷擾事件 檢擧件數 調査表, 1919.4.21-1919.4.30)에서는 총 검거 건수를 26,713 명으로 집계하였다.
박은식의 통계는 3월에서 5월까지의 상황을 정리한 것이고 조선총독부의 것은 4월 말까지를 정리한 것이어서 단순한 비교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장렬하게 투쟁하고 과정에서 가혹한 탄압받았음을 기억하려는 독립운동 진영과 그들의 통치에 저항한 사람이 적었으며 탄압 또한 질서유지를 위한 정도였음을 강변하기 위한 통치자 측의 의도가 일정하게 반영된 수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쪽 통계를 보아도 3·1 운동은 일제 강점 이후 유래가 없는 규모의 독립 운동이었다.
– 한민족의 상징으로 된 태극기와 백의
3.1운동이 발발했을 당시에, 우리 민중들과 지도자들은 통일된 ‘흰옷’을 입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독립기념관을 가든지, 3.1운동에 관련된 다른 유적지를 가보더라도, 흰옷 입은 백성이 태극기를 휘날리는 모습으로 3.1운동이 설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태극기는 1883년 1월 27일 제정 반포됨으로써 국기로서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공문을 통해 정식으로 태극기 제정을 조선 팔도와 사도에 알린 후 태극기는 조선의 상징으로서 국내에서 작용하게 된다.
이와 같이 태극기는 조선의 상징으로써, 국내의 행사뿐만 아니라 국외의 협정 등에도 조선을 상징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전의 시대에서는 이와 같은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에 대한 중요성이 요구되지 않은데 비해, 지금 3·1운동의 시기에서는 태극기를 통해 ‘조국’이라는 하나의 집합체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흰옷을 입었다. 흰옷은 흔히들 백의민족을 상징한다고 한다. 하지만 흰 옷에 대한 부분은 전근대시대에서는 민족의 특성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었다. 결국, 이는 우리는 한 민족이라는 강한 민족주의가 이 시점에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중국과 특히 일본에서는 그처럼 다양한 색채의 의복이 발달하였는데 왜 이웃나라인 조선에는 그러지 못했는가? 입고 있는 의복의 색은 아무런 색도 지니지 않은 흰 빛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색이 가장 적은 연한 옥색이 아닌가. 늙은이나 젊은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같은 색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어찌된 연유에서일까? 이 세상에는 나라도 많고 민족도 많다 그렇지만 이처럼 기이한 현상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역사가가 아니므로 이러한 의복이 어느 시대에 생겼는지 단정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흰 옷은 언제나 상복이었다. 쓸쓸하고 조심성 많은 마음의 상징이었다. 아마 이 민족이 맛본 고통스럽고 의지할 곳 없는 역사적 경험이 이러한 의복을 입는 것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버리지 않았나 생각한다.”
위의 글은 1922년에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민예학자가 3·1운동 직후에 조선에 방문하여 조선의 민중들을 바라보며 쓴 글이다. 조선인의 ‘비애의 미’에 대한 설명이었는데, 여기서 그 민족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흰 옷’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논지와는 조금 다른 입장의 글이겠지만, 이 시기에 복장을 통해서 민족성에 대해 이전과는 달리 규정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생겨났음을 알 수 있겠다. 이러한 흰 옷을 통해서 민족의 개념이 확립되고, 태극기를 통해서 국가적 근대성이 확립된다면, 결국 각계각층의 직업과, 신분을 막론하고 모두 같이 흰옷을 입고 태극기를 휘날린 3·1운동이라는 것은 ‘근대적 민족’이라는 개념이 확립된 운동이었음을 보여 준다.
2019년 2월 8일, 1110호 14-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