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6)

교포신문사는 3.1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8회에 걸쳐 특집 면을 준비한다. 이번 기획 특집에서는 먼저 3.1운동의 전반을 살펴보며, 3.1운동이 우리 민족사에 차지하고 있는 의미를 되짚어 보며, 3.1운동의 결실인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과정을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편집자 주

 

III.  3.1운동의 의의와 영향

3·1운동은 지식인과 학생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폭넓게 참여한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독립운동사에서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었다. 그것은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체계화·조직화·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중들은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높일 수 있었으며, 이는 1920년대에 다양한 사회운동과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도 커다란 타격을 가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게 하였으며, 중국의 5·4운동과 인도 간디의 비폭력·불복종 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와 중동 지역 민족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는 물리적인 폭압만으로는 3·1운동으로 분출한 민족의 저항의지를 막을 수 없었으므로 형식적이나마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일부 완화하여 문화통치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이는 가혹한 식민통치를 은폐하고 친일파를 육성하여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3·1운동은 운동의 과정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조직체가 없었기에 지역과 계층에 따라 투쟁의 형태와 강도를 다르게 한 채 분산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민족대표는 독립청원의 방식에 주력하여 타협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광범위하게 일어난 일반 대중들의 항일투쟁을 이끌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지니지 못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전체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이끌기 위해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국내에서는 1920년대 전반기에 민중의 투쟁력을 조직화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또한 3·1운동은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을 체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계의 민족주의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걸고 주체역량보다 외세에 의존해 독립을 얻으려 했다. 그들은 서구 문명국들의 동정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비폭력’을 절대적인 전제로 내세웠고, 일본 정부에 독립의 취지를 건의하여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적절하다며 독립청원의 방식에 의존했다. 하지만 3·1운동의 경험을 통해 민족의 주체역량에 기초해야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실력양성과 무장투쟁이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체계화하였다. 그리고 왕조의 회복을 목표로 한 복벽주의(復辟主義)가 청산되고 민주공화제가 독립국가의 목표로 자리를 잡았다.

 
– 3.1운동에 대한 당시 외국의 반응

한국민의 거족적인 3·1운동에 대한 외국인들의 반응은 일반적으로 동정적이었다. 대한제국 이전부터 관련을 맺어오던 국가들은 만세운동에 대한 평가보다도 일제의 야만성을 규탄하였다.

1919년 4월 8일자로 간행된 북경의 영자신문 『페킹 데일리 뉴스』·『페킹 엔드 톈진 타임즈』 등에서는 한국의 3·1운동을 소상히 보도하고 무력 탄압을 행한 일본 군경의 비인도적 행위를 밝히면서 규탄하였다.

그리고 중국인이 경영하는 『종성보(鐘聲報)』·『유일일보(惟一日報)』도 한국 각지의 3·1독립만세운동과 이를 진압하는 일본 군경의 잔인성을 보도하였다. 중국 언론의 반응은 이처럼 호의적이었지만, 중국 관헌은 일본과의 외교관계 때문에 한국의 독립운동을 저지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관헌은 간도를 중심으로 한 만주 지역의 만세운동을 무력으로 저지, 한국인 만세운동자를 살상, 검거하였다. 이에 대해 『독립신문(獨立新聞)』은 중국인의 뜻밖의 냉담한 반응에 분노를 표시하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많은 언론인들이 3·1운동을 보도하고 일본의 잔학성을 규탄하였다. 또, 미국 의회에서도 1919년 6월 30일부터 약 3개월간에 걸쳐 한국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것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실행 여부에 대해 상원의원 스펜서(Spencer, Selden.P.)가 국무장관에게 질문하면서 비롯되었다.

7월 15일 공화당 상원의원 포인덱스터(Poindexter, M.)·노리스(Norris, G.W.) 의원 등은 국제연맹조규(國際聯盟條規)의 비준을 반대하면서, 국제연맹의 실패와 횡포의 한 예로서 한국 문제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재한미국인 선교사들이 서명한 장로교회보고서를 인용하여 일본의 식민통치제, 만세시위 상황, 일본 군경의 포학상, 각 지방의 탄압 실태를 증거로 제시하였다. 미국 의회에서의 한국 문제는 8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미국의회는 자유와 민족자결원칙을 중시하는 미국이 그 반대인 일본 정부의 포학을 지지한다고 비난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나타냈다. 그러나 미국 행정부가 외교상의 문제로 한국 문제에 냉담했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유럽을 대표하는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한국의 독립운동에 동정적이었다. 영국의 대표적 신문인 『런던 타임즈』는 한국사태에 대하여 일본 헌정회(憲政會) 총재 가토(加藤高明)의 연설을 인용, 보도하였다.

즉, 한국에서의 식민통치 결점을 들고, 한국의 자치를 찬성하며 무관 총독에서 문관으로 바꾼 것, 한국인의 정치 참여 등을 보도하였다. 그러나 이 논평은 일본의 식민지로 한국을 기정사실화하고 나서 정치 개혁에 대한 소극적인 반응이었다.

이와는 달리 1920년 초 영국 하원의원 헤이데이(Hayday)와 그룬디(Grundy)는 일본의 잔학성과 한국민을 위하여 영국정부가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반문하였다. 또 프랑스에서 발행되는 『앙탕트(Entente)』도 일본의 정책을 강경하게 비난하였다.

이러한 유럽 강대국의 한국에 대한 여론은 무르익어 영국과 프랑스에 ‘한국의 친구(Les Amis de la Coree)라는 회가 조직되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운동으로까지 전개되었으나 실질적인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일본 내에 있는 언론들은 한국 만세운동의 진상 보도를 외면하고, 일본정부의 침략 정책을 왜곡 보도하여 일본 국민의 이목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몇 개의 신문은 일제의 압력을 물리치고 진상보도에 힘써 양식있는 일본인을 놀라게 하였다. 고베(神戶)에서 발행되던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지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의 실패를 지적하였고, 동경의 『저팬 애드버타이저』지는 수원 제암리의 학살사건을 상세히 밝혔다.

이 밖에도 『반도신문』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통치가 너무 편파적이었다고 지적하였다. 3·1운동에 대한 국외의 반응은 대체로 한국민에 대하여 동정적이었으나, 그 이상의 어떤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 3.1운동의 의의 

그러나 3·1운동의 목적은 국권회복과 민족자주에 있기 때문에, 비록 일제의 무력 탄압과 세계 열강의 외면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민족사적·사상사적·경제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남기고 있다.

먼저 민족사적 의의로는 3·1운동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한국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고, 이로 인해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이민족에 대한 끈질기고 강렬한 독립투쟁정신을 고취하였을 뿐 아니라, 일제의 무단통치방법을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게 하였다.

나아가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에 새로운 자각과 힘을 주어 교육의 진흥, 신문예운동·산업운동이 활성화되어 민족 자립의 기초를 다지게 하였다. 사상사적 측면에서의 의의를 살펴 보면 자주독립사상을 들 수 있다.

독립선언서, 일본 정부에 보낸 통고문,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독립청원서 등에는 자주독립의 사상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한용운의 『조선독립의 서』에서도 천명한 바 있는 자유평등사상·민주주의사상, 애국·애족·인도주의를 곁들인 신사상의 출현을 들 수 있다.

경제사적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3·1운동 이전부터의 노동자파업운동·납세거부운동·물산장려운동·국산품애용운동 등 경제적 자립을 꾀하는 운동은 3.1운동 이후에도 계속되어 민족기업을 건설하려는 운동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와 같은 민족기업의 붐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한국경제사의 내재적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3.1운동은 망국으로 위축되었던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시켜주었다. 3.1운동을 계기로 민족의 의지를 하나로 모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독립운동을 이끌어 나갈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국내외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가운데 영향력이 가장 큰 조직은 연해주 지역의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성의 한성 정부였다.

연해주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서 결성되었던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대한국민의회로 개편되어 3.1운동 직후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이어 4월에 중국 상하이에서는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민족 운동가들이 임시 의정원을 구성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가 구성되자 이를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무장투쟁론을 내세운 대한국민의회는 간도나 연해주 지역으로 거점을 옮길 것을 주장했다. 한인이 많이 살고 독립전쟁에 유리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상하이의 임시정부는 외교 독립론을 내세우며, 국제도시인 상하이가 세계 여러 나라와 외교 활동을 벌이기에 편리하여 독립 투쟁을 도모하기에 적합한 지역이라고 주장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논의를 한 결과 통합된 정부의 위치는 상하이에 두고 정부 명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하며, 한성 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이승만을 대통령,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공화제 정부가 성립했다(1919.9.).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입법 기관인 의정원과 행정기관인 국무원, 사법기관인 법원을 두었다.

다음 호부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2019년 2월 15일, 1111호 14-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