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 한인 100년사 (4)
-일제 강점기하의 재독한인과 활동들 –

김(Beckers)영자 박사

2.3. 항일 운동가 안봉근 (1881- ?)

1881년 5월 1일 황해도 해주 태생인 안봉근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이다. 1914년부터 한국을 위해 서양에서 선교모금운동을 하는 요셉 빌헬름이라는 프랑스인 천주교 신부와 동행하면서 영어, 독일어, 일본어,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당대 매우 드문 실력가였다.
1920년 이의경 (필명 미륵) 과 함께 상해에서 배를 타고 1920년 3월 프랑스 마르세이항에 도착하여 빌헬름 (Wilhelm) 신부의 도움으로 함께 망명길에 오른다. 세 사람은 유럽 몇 개국에 들렸다가 의의경은 빌헬름신부의 소개로 문스터슈봐르짝수도원에 일단 정착을 하지만 1920년 직후의 안봉근의 독일내 소재는 알려지지 않았다.
베를린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다고 전해지지만 증거가 불분명하다. 독일에서도 안봉근은 독립운동을 하던 중 일본경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이름을 중국명 Fonken Han(한봉근)으로 바꿨으나 일본영사관의 감시는 계속 따라다녔다.
안타깝게도 안봉근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그리 많지 않다. 그의 아버지와 안중근의 아버지가 형제라는 것, 안태건의 첫 아들이고, 그 아래 두 형제 중 충근은 만주에서 요절하고 성근은 소련유학중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이 전해질 뿐이다. 안중근 가족은 총 20여명이 항일운동가였으나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는 거의 없다 (정운현, 정창영 저: 영웅의 숨겨진 가족이야기, 안중근 가 사람들 참조).
이의경과 안봉근, 그리고 프랑스 선교신부 요셉 빌헬름은 1920년 초에 마르세이항에 도착해서 함께 몇 군데 유럽 리옹(Lyon), 디종(Dijon) , 물하우스 (Mulhouse)를 거쳐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로 가는 열차를 탔다.
이의경은 빌헬름 신부의 소개로 1920년 5월 25일부터 뮌스터슈봐르짝흐(Münsterschwarzach) 베네딕트 선교수도원에 정착한다.
이미륵과 안봉근은 엘자스 로레인 (Alsace-Lorraine)지역에 있는 빌헬름 신부 거처로 같이 떠나기로 했다고 간단하게 전해지지만 안봉근의 1920부터 몇 년간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독일인 연구가인 호프만 (Frank Hoffmann) 은 안봉근이 1924년 9월 중부독일 하일브론 (Heilbron)의 평생교육대학 (Volkshochschule) 에서 중국, 일본, 한국에 대하여 슬라이드를 이용한 강의를 했다고 한다.
안봉근은 베를린에서 독일 여인과 결혼하고 3남을 남겨두고 다시 상해로 떠났다. 1920년 중반부터 1930년 초반까지 드레스덴 에트노다미터 덴 호드 (Ethnodamiter Den Hod) 박물관에서 근무를 하면서 1931년 한국의 전통문화, 한국 학교의 교육과 역사에 대해서 강의를 했다.
‘한국으로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라디오 방송용으로 25분간의 어린이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한국동화, 고전문학이나 단편소설을 독일인들에게 소개하는 등 많은 기사를 개제했다. 당시 드레스덴 민속박물관에서 근무를 하면서 봘터 스퇴즈너 (Walther Stötzner)가 제주도에서 수집한 일상생활용품 정리작업을 했다. 안봉근은 이 박물관에서 한국유물정리작업을 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중책을 수행했다. 인류학자 마르틴 하이드릭히 (Martin Heydrich)와도 학술적인 친분을 가졌다.
안봉근의 박물관 작업의 공로가 크고 그의 학문적 가치가 높았지만 박물관 자체의 경영난으로 어쩔 수 없이 직장을 그만 두어했다. 그런 이유로 베를린으로 거주지를 옮긴 듯 하다. 베를린에서 독일인 여성과 결혼을 했고 3남을 두었다. 두부공장을 시작할 즈음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것은 당연하다. 사업은 점차 자리를 잡아가면서 이제까지 살던 크로이쯔베르그 구역 하임스트라쎄 (Heimstrasse 23)에서 보다 넓은 집인 1934년 솔름스트라쎄 (Solmstrasse 50, Kreuzberg-Berlin)로 거주지를 옮겼고 베를린 상공협회에 이름이 올라갈 정도로 사업자로 승승장구하면서 얼마지나지 않아서 3번째 더 큰 주택 (Kantstrasse 132번지)으로 이사를 간다.
이 거리가 있는 샬로텐부르그 구역은 베를린의 시민들이 선호하는 지역이었다. 후에 마라톤으로 금메달을 받은 손기정과 남승룡을 위해 축하잔치를 한 집일 것이다. 그리고 또한 한인 고려유덕학우회 주소도 칸트거리 122번임도 우연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손기정의 자서전에 의하면 안봉근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에서 1위를 한 손기정과 3위를 차지한 남승룡을 자신의 두부공장에 초대하여 태극기를 걸고 격려 했으며 지역 신문사를 찾아가 손기정과 남승룡이 한국인이라고 정정을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손기정은 자기를 응원하는 김용식, 장어진, 안친생이 멀리서 보였다고 회고한다. 안봉근의 축연에 참석한 한인들은 대략 안병소, 이애내, 정석해 등이었다. 그는 조국의 존재를 알리는데 앞장서고 헌신하였는데 일경의 감시망이 지속되는 히틀러 정치를 피해 이태리로 떠나 상과대학으로 전과를 했다는 설도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해방직후 안봉근이 이탈리아에서 갑자기 사망했다는 설은 정설이 아닌 듯 하다. 해방전에 귀국해서 얼마간 활동을 했다는 설이 들리지만 이 역시 더 자세한 내용은 찾기가 어렵다.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할 부분이다.
해방전 시기에 안봉근은 가족과 작별을 하고 상해임시정부에 합세하기 위해 사업체를 접고 베를린을 떠난다. 재독 한인들 모두가 독일이 세계전쟁에서 패배할 직전에 독일땅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점도 감안해 볼만하다.

2.4. 미국 장교 신분으로 독일로 건너와 활동한 독립운동가 황기환 (?-1923)

황기환은 유학생도 아니었고 독일 장기 체류자도 아니었다. 1차세계대전을 기해 1918-19년경 잠시 미군 해병대 장교의 신분으로 베를린에서 체류했었다. 1904년 조국을 떠났던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현지에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채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군에 자원입대 한다.
미군 장교 자격으로 베를린에서 근무 하다가 1919년 파리임시 위원회 김규식 위원장이 부름에 응답하여 파리에서 임시 위원회 서기장으로 일했다.
1921년 7월 다시 미국으로 가서 이승만을 도와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3년 4월 18일 심장병으로 40세의 젊은 나이에 일찍 생을 마친다.
한참 후2008년에 뉴욕한인교회 장철우 목사 등 동포들에 의해 뉴욕 퀸스의 한 공동묘지에서 발견됐다. 황기환의 묘는 뒤늦게 발견되었으나 현재 뉴욕에서 사목하는 목사가 교인들과 함께 묘지관리를 하면서 모국 독립묘지에 안장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황기환은 얼마전에 국내에서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던 ‘미스터 션샤인’ 영화의 역사적 주인공이다.

2.5. 독일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한국학, 동양 철학자와 문인으로 활동한 이의경 (1898-1950)

황해도 해주 출생으로 본명은 이의경은 1931년부터 남독일에서 거주하면서 이미륵이라는 필명으로 작가로서 활동을 했다. 이미륵이라는 필명으로 기고 한다. 독일인이나 한국인에게 본명보다 필명으로 더 잘 알려졌다. –여기서는 이의경과 이미륵의 이름을 번갈아 사용하니 독자의 양해를 바란다.
1927년 뮌헨대학교에서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31년부터 본격적으로 독일에서 문학가로 활동했다. 1946년 자전적 소설인 “Der Yalu fliesst (압록강은 흐른다)”를 독일 문단에서 출간하면서부터 그의 작가로서의 명성은 독일을 뛰어넘어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는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이 되었다.
1898년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으며 대지주의 외아들로 유년기에는 아버지가 사촌형과 함께 한문교육을 시켰다. 6살에 이미 천자문, 사서삼경을 터득했고 중등교육은 고향에서 받았으나, 자습으로 경성의전에 입학을 했다.
3학년 때 3.1 운동에 가담해서 전단지를 배포하다가 일경에게 쫒기게 되자, 상해로 피신을 하게 된다. 안중근 가족의 도움으로 상해 임시정부 청년부에 가담해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유럽으로 유학할 준비를 하고, 1920년 3월에 빌헬름 선교신부와 안봉근의 도움을 받아 유럽으로 떠나는 선박에 올라, 5월에 마르세이 항에 도착했다. 같은 해 6월 25일에 빌헬름 신부의 알선으로 뮌스터슈봐르짝흐(Münster-schwarzach 선교수도원에 도착해서 독일땅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한다. 한달 후 이의경은 국내에서 2년 부재자형을 선고 받는다.
1920년 5월 25일부터 8개월간 뷔르쯔부르그 인근에 소재한 뮌스터슈봘짝흐 베네딕트 선교수도원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자습으로 독일어를 습득한다. 1921년 뷔르쯔부르그 의과대학에 입학해서 독일어 집중교육을 받은 후, 하이델베르그 대학을 거쳐 뮌헨대학에서 전과를 해서 1927년 동물학박사학위를 받는다. 히틀러 정권하에서 직장을 얻는 다는 것은 불가능 하였기에 이의경은 경제적으로 무척 힘든 삶을 살았기 때문에 매달 자신의 월세를 마련하는 것도 벅찼다.
다행히 뮌헨 대학교 중국학과에서 한국어, 동양철학. 동양문학 강의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주위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은 친구들에게 서예도 가르치며 근근히 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 즈음 서예를 배우던 학생의 부모인 알프레드 자일러(Alfred Seyler) 교수 집에서 이의경을 가족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때부터 생활이 안정되고 본격적으로 작가로 활동을 하지만 1950년 3월 50세의 나이로 그가 가족처럼 함께 살던 자일러 교수부인과 – 이미륵을 가족으로 받아준 자일러 교수는 이미륵보다 한달 앞서 세상을 떠났다 – 오랜 동안의 여자친구 에파 (Eva Graf)가 지켜보는 가운데 위암으로 한 많은 삶을 마친다.
이미륵의 장례식에는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던 친지들 300여명이 함께 참석하여 외로웠고 한 많았던 이방인에게 작별을 고했다. 특히 이미륵과 생전에 ‘월요독서모임’을 통하여 함께 머리를 맞대고 서예와 문학, 철학 등 동양문화를 배웠던 동서양 문화의 국경을 넘나들던 학우들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였다.
독일에서의 그의 삶은 초기에는 항일운동가로서, 후기에는 저자로서 우리에게 알려지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 했듯이, 항일운동가로서의 주요 업적으로는 1921년 재독한인유학생회 결성을 주도하여 유덕고려학우회를 만든 것과 1927년 초봄 ‘피압박민족대회’에 독일 대표 3명 중 회의에 참석하여 ‘korea-nische Problem’이란 전단지를 제작하여 잔악한 일제의 지배로 힘겨운 한국인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알린 것을 꼽을 수 있다.

1225호 20면, 2021년 7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