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 선생님과 나의 추억

신성식(전 베를린 글뤽아우프 회장)

내가 손기정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는, 손기정 선생님이 1982년 9월 베를린 SCC Sport Club Charlottenburg이 주최하는 마라톤대회의 출발신호를 쏘기 위해 초청 받아 오셨을 때이다. 손기정 선생님은 1972년 뮌헨올림픽에도 초청을 받아오셨다고 하셨다.

그때에 손기정선생님은 독일 광산에서 근무하시던 나의 형님 노수웅씨를 만났었고, 선생님께서는 형님에게 투구기념사진을 보여주며 “이 투구를 내가 1936년 마라톤우승 상으로 받아 독일올림픽위원회에 기증을 했다고 하는데 나는 받은 적도 없고 누구에게 기증하지도 않았다”고 하시면서 형님께 부탁 하셨다고 하셨다.

그때부터 형님께서는 당시의 자료를 찾으러 다니시다 한독가정의 로젠베르크씨로부터 1936년 올림픽기념 화보를 구입하여 투구가 독일올림픽위원회의 소유를 확인하고 문의를 했으나, 아무도 어떻게 기증을 받았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당시의 관계자들이 아무도 생존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몇 년 후 형님께서 그 투구가 박물관에 1936년 올림픽우승자가 기증했다는 표식판과 함께 전시 되어있는 것 발견했고 즉시 선생님께 연락하였고 1975년 9월 동아일보에 기사가 실리고 이를 통해 한국올림픽위원들과 한국 국민들이 알게 되였다.

한국올림픽위원회와 독일올림픽위원회 그리고 손기정선수는 서로 서신을 교환하였으나, 반환을 요구할 만한 증거 없었다. 정황은 알겠으나 주고 받은 사람이 생존하지 않으니 어렵다는 것이다.

어느날 형님께서 모든 자료와 손기정 선수의 투구에 대한 위임장을 나에게 주시며 “더 이상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으니 네가 좀 해야겠다”며 모든 정황을 설명 하여주셨다.

나 역시 그저 막연했고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몰랐다. 받은 서류를 보다가 당시 그리스 신문을 오려낸 기사의 복사본을 번역한 글을 발견하였다. 그리스신문사 사장이 올림픽 우승자에게 상품을 줄 수 없는 규정이 있어 개인적으로 마라톤 우승자에게 국보급 유물을 기증하여왔는데, 그리스정부와 국민들의 비판이 많아 손기정선수가 마지막으로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것을 발견하고는 “이제 시작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라고 생각하며 추구반환 일ㅇ[ 아서게 되었다.

며칠 후 투구를 전시하고 있는 베를린 희랍박물관을 찾아가 투구를 기증한 손기정선수의 부탁으로 관장을 만나고 싶다고 하니, 근무자가 뜬금없는 투구기증자라는 말에 그것도 동양사람인지라, 어이가 없어하며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전화를 하더니 관장실로 안내하였다.

관장실로 들어서니 그 역시 궁금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자리에 앉기를 청하며 내가 어디서 왜 왔는지 신기해했다. 그가 알고 싶어하는 것들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흥미로워 하였다. 마지막으로 내가 찾아 온 이유는 손기정선수께서 본인도 모르게 기증된 것이기 때문에 반환을 요구 한다고 하니, 깜짝 놀라서 손을 저으며 안 된다고 하면서, “이 투구는 박물관 소유로, 전시만 할 수 있으며, 아주 오랜되고 이 세상에 유일한 투구이다”라며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정도의 반응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천연스럽게 “여기 투구들이 많이 있는데 그거 하나 쯤 없어도 표가 나겠느냐” 말하니 그는 어이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만나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니 그 관장의 말이 자기는 결정권이 없고 독일 올림픽위원에 있다고 하였다. 나는 나도 그것을 알고 있다며 하고 사무실에서 나와 전시된 투구를 보고 나왔다.

한국에 손기정 선수의 투구가 알려지고 나서 한국에 오시는 분들이 보고 싶어 하여 그때마다 박물관에 가서 보여주고 설명을 하고 투구 앞에 둘러서있으면, 처음 몇 번은 그냥 나를 아는 체하였으나 어느 때부터인지 나를 감시하는 듯 했다.

그렇게 시간은 지나고 1976년 형님께서 한국에 물품을 구입차 가셔서 구입처 사람들과 저녁식사 중에 텔레비전방송에 북한에 관한 뉴스가 나오는 것을 보다가, 꼭 그렇지 않다고 말씀을 하셨고, 누가 이를 신고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북한을 찬양했다는 반공법위반으로 구속이 되셨다. 그때 형님께서 동아일보 유럽지국장을 하셨고 베를린 쿠담 64 번지에서 그때는 유럽에서 가장 큰 한국상회를 하셨다. 형님이 안계서도 투구를 돌려받을 계획은 버릴 수 없어 진행했다.

그러던 차에 손기정선생님께서 오셨다. 선생님과 동행하며 통역을 하고 좀 더 자세한 말씀을 들었다. 마라톤신호를 베를린시장 리차르트 바이제커씨와 함께 쏘시고 두 분이서 대화를 하시고 시장님이 자기는 한국인의 국민성을 존경하신다며 자기가 독일기독교 평신도 회장 자격으로 김대중씨가 옥중에 있을 때 한국을 방문해서 면회를 신청했으나 전두한 정권 당시 거절하여 못하였으나 만나본 지인들의 만나고 많은 의견들 들어 그래도 위안이 되였다고 하셨다.

행사가 끝나고 선생님께서는 1936년 마라톤 코스를 돌아보시고 싶다고 하시어 주최측에서 승용차와 기사를 보내왔다. 마라톤경기로 인하여 도로가 막힌 곳이 많았으나 차에 행사차량이란 스티커가 붙여있어 교통경찰이 편의를 봐주었다. 한 경찰은 우리 차에 와서 “손기정 선수가 타고있느냐” 물으며 “자기가 어렸을 때 손기정선수가 뛰어 갈 때 길가에서 박수치며 응원을 했다”며 자기 손자를 위한 사인을 원해서 선생님께서는 양복 속주머니에서 당시 마라톤 모습이 있는 사진에 사인을 해주시니 그 경찰은 무척 좋아하였다.

서울 중구 만리동 손기정 체육공원.

당시 마라톤 코스를 지나가면서 그때의 일들 생각하시며 나에 당시 베를린 올림픽 참가에 관한 많은 일회들을 들려주셨다.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은 권투경기의 전 종목에 출전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일본인을 벌을 받지 않고 실컷 두들겨 팰 수가 있었던 것은 권투선수 선발 시합이어서 전 종목에 한국인이 우승을 해서 그렇다고 하셨다. 나는 당시 화보를 보고 궁금했던, “왜 운동화를 신고 뛰지 않고 다비를 신으셨냐”고 물었다. 대답은 운동장비는 개인이 부담해야 했고 본인은 돈이 없어 다비를 신었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올림픽경기에 오실 때 서울에 국일관 요리사들이 힘내라며 소고기장조림과 마늘종 고추장을 주었는데, 일본선수들이 “조센징 마늘냄새 난다”며 무척 멸시를 해서 먹지 못했다는 말씀을 하시며, 투구는 틀림없이 선수단장이 자기도 모르게 독일 올림위원회에 기증했을 것이라고 하셨다. 손기정선생님은 그 당시의 일들과 지나온 삶들을 편히 나에게 들려 주셨다. 마라톤코스를 둘러보시고 호텔까지 모셔다 드리고, 다음날은 내가 모시로 가기로 하였다.

다음날 아침 SCC 담당 밀데씨(Herr Milde)로부터 전화가 왔다. 저녁에 자기 집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셨다. 호텔에 가서 선생님의 일정을 대해 문의하니, 선생님은 독일 가정에 초대를 받으셨다며, 그 과정을 설명해주셨다. 선생님께서는 마라톤 경기가 끝나고 시내구경 나왔다가 철물상(Haushaltwaren)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일하던 꼬마가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하고, 급히 뛰어 가더니, 잠시 후에 선생님 경기 사진을 가져와 사인을 부탁해, 선생님은 기꺼이 사진에 서명을 해주셨는데, 서명을 부탁한 사람은 뮌헨 올림픽에 선생님이 왔을 때도 선생님을 찿아왔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먼저 그 분 집에 같다가 저녁에 밀데씨 댁으로 가기로 했다.

밀데씨 댁에는 가족 외에도 체육계에 몇몇 인사들도 있어서 좋았고, 선생님의 투구와 바람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모두들 할 수 있는 데까지 도와준다고 하며 꼭 되돌려 받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다음 날 독일 올림픽클럽(Olympische Sport Club, OSC)에 전화로 선생님과 같이 방문 하고 싶다고 했다. 그들은 환영한다며 마침 저녁에 작은 모임이 있는데, 함께 하시면 아주 좋겠다고 하였다. 클럽에 10여명 있었고 손기정 선수님 이시라고 소개하자 모두들 일어나 박수를 치고, 서로 자기소개를 하였다. 그 중에는 1936년 올림픽 메달리스트도 몇 있고 올림위원회 회원도 있었다. 모두들 그때의 추억들을 나누고 손기정 선수의 투구의 사실과 애환을 설명하자, 자기들도 몰랐던 일이라며 놀라워하고, 선생님에게 많은 지원과 꼭 반환을 받기를 기원했다. 그분들과 헤여지면서 나와 선생님의 연락처를 남겨주고 호텔로 돌아왔다. 선생님에게는 감회가 깊은 만남이었고, 나에게는 나의 목적인 투구반환에 몇 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어 매우 좋았다.

선생님을 공항에서 배웅을 하고 돌아오면서 이제 어떻게 계속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여전히 잊어버릴 만하면 한국에서 손님들을 데리고 박물관을 찾아갔고, 관장에게 한국에서 딱 한번만 전시를 하고 싶어 하니,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해도, 관장은 “맨손으로 만져도 안된다” 손사래를 쳤고, 그러면 똑같은 복제품을 만들어 준다고 했지만 그것도 절대로 안된다고 했다. 나는 이미 이러한 관정의 완강한 태도를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끝없이 귀찮게 해야된다는 생각이었다.

어느날 OSC 에서 연락이 왔다. 회원들이 일본, 한국, 중국을 방문을 하는데, 한국에 관한 안내와 설명회를 해주기를 부탁했다. 나는 기꺼이 승낙하고, 장소는 한국식당으로 정하고 총영사관에서 영사기와 관광영화를 빌려와 준비하였다. 설명회 당일 예약한 한식당에서에서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여주면서 그 분들이 알고 싶은 것들을 설명해주고, 3국 방문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오면, 다시 만나기로 하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분들은 한국의 활기찬 생활과 서울의 모습은 자기들이 상상했던 이상으로 현대식이고 좋은 여행이었으며, 일반인들의 친절한 대우는 무척 감동적이었다고 칭찬을 아기지 않았다. 그 중에 한분이 나한테 투구를 반환 해주고 싶지만 현재는 가치 있는 명분이 없어 어렵지만, 방법이 생길 때가 올 때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용기를 주었다.

이후 그분들과 자주 만났고, 투구반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들도 많았고 그런 만큼 내주머니도 자주 열렸다.

1981년 8월 한국 MBC 방송국 카메라팀이 베를린에 와, 투구를 촬영하고, 이와 관련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해서, 다 함께 박물관으로 가고 있는데, 일행 중 한 사람이 전화를 받더니 “모두 취하고 철수해야 한다”고 했다. 왜 그런가 물어보니 “지금 바덴바덴에서 차기 올림픽 개최지를 결정하는 회의를 하는데, 나고야 와 서울이 경선을 하고 있고, 독일은 일본과 동맹관계였었으니 투구에 관한 뉴스가 나가면 서울이 불리할 수 있으니 중지하고 즉시 돌아오라는 지시다”라며 모두들 철수하였다.

나는 정말 하늘이 준 기회라며 기뻤다.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다면, 투구는 반환 된다는 확신이 생겼고, 투표결과가 뉴스에 나오기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마침내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윈회 워원장이 1988년 올림픽 개최지는 “Seoul”이라고 발표하는 모습이 TV에서 중계되자, 나는 한동안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손기정 선생님이 베를린올림픽 마라툰 우승의 부상으로 받은 투구가 반환되리라는 확신이 있었으나, 아무에게도 이를 말하지 않았다. 그동안 많은 한국사람들과 기관에서 “독일에서 안 된다는데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무시했기에, 나는 그냥 그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드디어 내가 오랜 시간동안 바랬던 결과가 나왔다.

1986년 8월 18일 베를린올림픽 개최 50주년을 기념하여 독일올림픽위원회에서 마련한 기념행사에서 투구를 손기정 선생에게 헌정하는 형식으로 반환 받게 되었다.

* 손기정선생의 그리스 투구 보물 904호로 지정

50년 만에 주인의 손에 돌아온 그리스 투구는 비록 외국의 유물이기는 하지만 2천 6백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고,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에 우리 민족의 긍지를 높여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의 부상품이라는 역사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문화재청은 1987년 서구 유물로는 처음으로 보물(904호)로 지정하였다. 이후 손기정 선생은 ‘이 투구는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이라는 뜻을 밝히고 1994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될 수 있도록 국가에 이 투구를 기증하였다.(편집자 주)

2019년 9월 27일, 1140호 14-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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