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음식문화를 생각하며

2편: 김치국밥과 라면

류 현옥

나의 유년시절은 작은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다. 치마저고리에 단발머리 시골 소녀다. 반세기를 훌쩍 넘긴 예전의 모습을 보면 마치 옛날 무성영화 속의 한 장면과 다름 아니다. 책을 보자기에 싸서 허리에 둘러매고, 도시락을 들고는 십리 길을 종종 걸음으로 학교를 다녔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서 사립문을 들어서며 엄마를 부르는데 부산에 사는 삼촌이 카메라를 들고 있다가 찍은 사진이다. 삼촌은 당시 총각으로 사진에 취미가 있던 신식 청년이었지 싶다. 60년 전의 일이니 이제 사라져가는 대한민국의 옛 세대의 흔적이다.

냇물이 흐르는 논둑을 걸어가면 읍내로 연결되는 신작로가 나온다.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먼지를 구름처럼 뒤로 남기며 이 신작로를 미군용차들이 지나다녔다.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에는 밤마다 불빛이 환한 미군기지가 있어 그곳으로 연결되는 군사도로였던가 보다. 동네 꼬맹이들과 먼지 이는 신작로를 피하여 들길을 걸었다.

시간에 대한 감각도 없었고 손목시계를 찬 아이도 없었지만 노닥거리며 걸어서 도착한 학교에 지각한 일은 없다. 스피커를 통해 요란한 싸이렌 소리가 울리면 책상 밑으로 숨는 피난연습도 하던 때이니 전쟁 중이었나 보다. 우리 집은 산등성이를 따라 붙어 앉은 초가집 동네였다. 나는 하늘과 뒷산과 들판을 바라보며 자랐다. 학교가 있는 김해 읍내는 대도회였다.

입학식 날 처음 본 읍내 한복판에 자리한 갓 지은 붉은 벽돌의 3층 벽돌건물은 엄청 커보였다. 입학은 사회로 나아하는 첫 출발이었다. 중학교까지 십여 년을 걸어 다닌 등교길이 나이가 들어서야 4km라는 걸 알게 되었다. 중학생이 되고서는 길을 걸으며 영어단어를 외웠다. 간호학과에 가고자 다른 도시로 가기 전까지 걸어 다닌 논둑길은 정이 들어서 지금까지도 가슴과 머리에 남았다.

그러나 더 넓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서양사의 연대를 외우며 걷던 길은 사라지고, 황금벌판과 논둑길은 자취를 감추고 먼 바다를 향해 졸졸 노래하던 냇물마저 사라졌다. 그곳엔 이제 현대식 아파트 숲이 들어섰다. 세계 대전으로 지구 위를 피로 물들인 유럽의 역사에 관한 독서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하여 시작한 독서는 명작 소설로 이어졌다. 영어를 쓰는 외국에 대한 상상을 하며 꿈속에 젖었던 시절로 가물가물 돌아간다.

내가 고향마을을 떠날 때까지 신작로는 흙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오토바이가 툴툴툴 소음을 내며 달리고, 버스는 먼지구름을 한 뭉텅이 남기고 지나가는 길이다. 버스를 탈 돈도 없었지만 동내아이들과 어울려 걸어 다니는 재미로 힘든 줄도 몰랐다.

어느 여름날 벼가 자라고 있는 들의 한복판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만났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벌판, 미끄러운 논둑길을 죽을힘을 다하여 뛰었다. 온몸이 흠뻑 젖은 채 집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내가 젖은 옷을 벗는 동안 책보를 풀었다. 빗물에 젖은 책장들이 한데 붙어있는 책갈피 사이 중간 중간에 신문지를 끼워 따듯한 방바닥에 깔았다. 그리 해놓고는 어느 사이에 부엌에 들어가 김치국밥을 끓였다.

마르고 있는 책과 공책이 깔린 방바닥,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을 둘러쓰고 앉아 김이 풀풀 오르는 뜨거운 김치 국에 빠졌다. 마른멸치 몇 마리와 김치를 썰어 넣고 식은 밥 한 덩어리를 끓인 것이지만, 김치의 매콤시큼한 맛이 온몸을 데워주었다.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 눈을 잠시만 붙이고 몸을 풀어라.” 어머니의 너그러움 말씀이 떨어지기도 전에 눈이 감겼다. 낮잠은 금지된 행위임에도 어머니는 지시하였고, 뱃속으로 들어간 김치국밥의 열기가 안방 아랫목의 따스함과 합체되어서 온몸이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어머니는 당신 자신에게도 그랬지만 아이들의 낮잠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유독 이 장면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고, 어머니가 걱정하던 감기도 걸리지 않았다. 행복했던 유년의 추억으로 남았다.

어머니의 지엄한 훈육은 특히 나에게 더 엄격했다. 낮잠을 자면 밤에 안자고 이불 밑에 서 호롱불을 켜놓고 책을 읽는 것을 막는 조치였다. 생각하면 콧등이 시큰해지는 걱정 없던 어린 날의 기억 속을 김치국밥의 맛이 채우고 있다. 그 뿐인가. 그칠 줄 모르는 빗소리를 들으며 든 깊은 단잠은 평생을 두고 아쉽다. 고국을 떠나온 후 불면증이 생겨서 아직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한동안 자취를 한 적이 있었다. 방 한 칸에 작은 부엌이 붙어있었다. 어머니가 싸준 반찬을 내놓은 봉창문 아래 작은 김치 단지를 두고 있었다. 그것으로 항상 마음이 든든했다. 쌀과 김치만 있으면 해결되는 식생활이었다. 이 시절 나는 자주 김치국밥으로 끼니를 때웠다. 라면*이라는 인스턴트 음식이 등장하여 김치국밥자리를 대신했다. 그 즈음 MSG라는 화학조미료가 된장과 간장 사이로 비집고 들어섰다. 쉽게 끓여서 먹을 수 있었던 김치국밥을 대치한 라면은 김치국밥보다 더 빠르게 식탁위에 오른 식품이었다.

선지고개 너머 사시는 작은 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자주 오던 시절, 할아버지는 사립문을 들어서며, “질부야, 계란 풀어 넣은 김치국밥 한 그릇만 먹고 갈려고 왔다!” 하셨는데 어머니는 마루에 올라앉는 작은 할아버지께 큰절을 한번 하고는 곧 부엌으로 들어가 불을 지폈다.

어머니는 친정아버지와 시아버지가 모두 돌아가시고 남은 작은 할아버지를 정성껏 모셨다. 작은 할아버지는 생쌀을 넣고 끓여 국밥에 쌀이 씹히는 것을 좋아했고 마지막에 풀어 넣은 계란의 부드러운 맛을 즐겼다.

어느 날 오랜만에 부산의 이모가 오면서 라면 몇 봉지를 선물로 가져왔다. 그날 저녁식사는 라면으로 하자며 물을 끓이고 있는 데 작은할아버지가 읍내에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며 사립문을 밀고 들어섰다. 할아버지는 이모와 정중하게 인사를 나눈 후에 언제나 다름없이, “질부야 김치국밥 끓여다우.” 하시며 자리에 앉았다.

“작은 아버님, 마침 동생이 가져온 라면을 끓이고 있는 데, 같이 한 사발 드이소.”

어머니가 라면 봉지를 내보였다.

“라면이라? 왜놈 국수 아닌겨?”

“그렇다 캅니다. 일이 쉽고 맛도 먹을 만하다카는 데, 맛도 볼 겸 한 사발 드이소.”

작은 할아버지는 이모의 눈치를 보는 듯 몇 번 눈을 껌뻑거린 후,

“달싹 들큰한 왜놈 음식 맛 안 봐도 뻔하다.” 하시면서 곧 일어날 채비를 했다.

“아이고 작은 아버님 라면이 곧 다 끓어가니 솥이 비면 김치국밥 끓이지요.”

작은 할아버지는 평발을 치고 앉았던 두 다리를 바꾸어 앉으며 긴 담뱃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이놈의 세상이 뒷걸음질을 하는 기여. 우리 음식 다 두고 왜놈 국수를 수입하여 아이들을 먹이니, 망조여, 망쪼.” 했다. 라면이 다 끓었다며 이모가 국사발을 챙겼다. “모두 오세요. 국수가 퍼지면 맛없어! 뜨거울 때 먹어야 돼요.”

다시 한 번 일어날 기색을 하던 작은 할아버지가 웬 일인지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내도, 라면 반 사발만 주 봐라. 맛이나 보자.”

작은 할아버지는 젓가락으로 국수를 집어 두어 번 입속으로 넣고 후루룩 소리 내어 잡수신 후에 “옥아, 니 묵어라. 어디 닝닝해서 먹겠나.” 하시며 내 앞으로 밀어냈다.

어머니는 다시 일어나 김치국밥을 끓이기 위해 부엌으로 나갔다. 라면국물은 김치국밥의 국물맛을 흉내 내고 있지만 작은 할아버지의 혀끝은 왜놈 음식이라고 거절하는 것 같았다.

작은할아버지에게는 작은 봉지에 든 가루를 풀어 넣어 불과 몇 분 만에 끓여 내는 인스턴트 국수라는 것이 또한 극복할 수 없는 배신이었다. 김치국밥자리를 빼앗은 라면의 출범은 자연식에서 공장식으로 질적 저하의 시작이었다.

온갖 영양소가 든 잘 익은 김치를 썰어 넣고 끓인 국을 화학조미료로 입맛을 내게 한 라면은 자취생과 고향을 떠나 혼자 사는 사람들의 선호로 인하여 급속도로 전파되었고 가정집 부엌까지 점령했다.

나의 두 딸은 김치국밥 맛을 모르는 한국인 2세다. 국내에서 자란 그 또래들은 이미 라면 세대로 전향했다. 얄팍한 왜나라 닝닝한 라면 맛에 이미 중독이 된 세대는 김치국밥의 깊은 맛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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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면의 역사; 라면은 중국에서 전시 비상식량으로 쓴 것으로 유래된다. 중일전쟁을 하면서 일본이 배워왔다는 설이 있다. 현재의 라면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만계 일본인 안도 모모후쿠가 발명하였다고 한다. 최초의 즉석라면은 1958년 산시쇼쿠산에서 생산한 치킨라면이다. 국내에는 1963년 삼양라면이 처음으로 출시하였다. 그 후로 정부의 혼분식 장려정책으로 8개 제품이 경쟁하다가 1969년에는 삼양과 농심만이 살아남았다.

2020년 4월 3일, 1165호 14-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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