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카파도키아

황만섭

약 300만 년 전, 아나톨리아(지금의 터키)의 에르지에스에서 화산이 폭발했다. 이태리 폼페이 화산의 열 배에 가까운 위력이었다. 200m 이상의 화산재가 폭발하면서 그 일대를 덮었고 그 재는 멀리 앙카라까지 날아갔다. 화산재는 바다 물과 섞이면서 응고가 되었고, 그 위로 용암이 흘러내렸다. 뒤를 이어 찾아왔던 빙하기가 끝날 무렵에 닥친 대홍수로 인해 거대한 호수가 생겨나게 되었고, 그 홍수는 엄청난 빙하의 무게를 감당하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흐르면서 협곡을 만들어냈다.

협곡의 바위들은 긴 세월 동안 풍화작용을 거치면서 기이한 모양의 바위산들이 되었고, 바위산은 버섯 모양과 동물 모양 등 다양하게 용암의 온도에 따라 하얀색, 붉은색, 노란색 등으로 작용하면서 기이한 암벽들로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한다. 새롭게 생겨난 암벽들이 부드럽다는 것을 알아챈 당시의 사람들은 바위에 구멍을 파서 주거 공간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유난히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을 지내기는 굴속의 온기와 습기가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산이 폭발했던 곳이라서 토양까지 비옥해 농사 짓기에 최적이어서 사람들은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현지인으로부터 상공업에 필요한 편의와 권리를 허가 받아 활발하게 상거래를 펼쳤고, 아나톨리아 사람들은 그 대가로 페르시아 인들로부터 문물을 제공받았다. 그 당시 페르시아인들의 최대의 관심은 명마에 있었다. 페르시아인들의 명마사랑은 왕 비문에 좋은 말을 생산해내는 도시’라는 뜻인 ‘카트파투카(Katpatuka)’라는 문구를 새길 정도였다. 언제부터인가 ‘명마의 도시’라는 뜻이 담긴 ‘카파도키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카파도키아의 기암괴석들은 애니메이션 <스머프>의 배경이 되었고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기암괴석으로 솟는 해를 바라보는 열기구 관광상품은 성수기 하루 동안에 관광수입이 3억 원을 넘을 정도로 호황을 누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스머프들이 살았던 모자를 씌워놓은 듯한 버섯 같은 수십만 개의 기암괴석들이 솟아있는 카파도키아의 계곡을 따라 아침 해가 떠오를 때면 그 위로 펼쳐지는 벌룬의 향연을 창조주가 즐겼다는 말이 생겨났다.

유별나게 눈길을 끄는 곳은 ‘깊은 우물’이라는 뜻을 지닌 지하도시인 데린쿠유(Derinkuyu)이다. 지하도시를 거대한 묘지로 인식한다면 어둡고 축축한 지하도시쯤으로 상상하기가 쉽다. 그러나 여기는 전혀 다르다. 데린쿠유는 터키 중부 네브셰히르 주 카파도키아 지역 일대에 산재해 있는 200여 개의 지하도시 중 하나다. 2~3만 명까지 수용이 가능한 지하도시는 8층까지 있고 깊이는 85미터가 된다. 현재는 지하 4층까지 약 10% 정도가 관광객에게 개방되고 있다.

로마에 있는 지하 공동묘지 카타쿰바(Catacumba)와는 완전히 그 목적이 다르다. 카타쿰바는 종교의 박해가 시작되자 기독교인들이 종교활동을 위해서 지하 공동묘지로 숨어들었던 피난처이지만, 카파도키아의 지하도시는 오직 생존을 위해서 숨어살았던 생활의 터전이다. 땅의 역사와 민족의 역사가 다른 아나톨리아는 무수한 침략과 약탈의 중심지였다.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피난처가 필요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구가 늘어났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더 깊고 더 복잡한 미로를 만들어갔다. 적의 침입에 대비해 둥근 바퀴모양의 돌덩이를 통로마다 설치했고 독특한 기호로 길들을 표시해 침입자들이 헤매도록 만들었다. 아주 거대한 규모로 형성된 거미줄처럼 연결된 지하 대피소는 200여 개에 이르는 지하도시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한 곳이 정복되면 5~8km 이내에 있는 다른 곳으로 탈출이 가능하도록 했다. 도시의 구조는 비상시에 사람이 들어가면 두 달 동안의 생활이 가능하다.

오스만제국이 이곳을 점령했을 때는 이 지하도시가 쓸모가 없었다. 이제 그들 자신이 정복자였기 때문에 도망가거나 숨을 필요가 없었다. 1963년 한 농부가 잃어버린 닭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하기 전까지는 지하도시는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옛날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다 아는 장소였지만, 아는 사람들이 다 죽게 되자 이제 그곳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기록이 없으면 역사는 그렇게 잊혀진다. 그래서 ‘역사는 기록이고 역사는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역사는 기록을 통해서만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야 소피아 사원 인근에 있는 이스탄불의 고고학 박물관(데린쿠유)에 들어가면 이상하게 730km나 떨어진 카파도키아가 떠오른다. 카파도키아는 이스탄불에서 쉬지 않고 12시간을 달려야 갈 수 있는 먼 거리에 있는 지역이다. 박물관에 들어가 본관의 어두운 조명에 눈이 익숙해지면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간다. 유난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 동영상을 촬영하는 곳이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석관이 있는 곳이다.

그 중 이소스(Issus) 전투(기원전 333)에서 페르시아 대군을 격퇴시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 18명의 사람들과 6마리의 말이 치열한 격전을 치르고 있는 장면이다. 석관 맨 왼쪽에 사자탈을 머리에 쓰고 말을 탄 사람이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 앞발을 힘껏 들어 올린 말의 등 위에서 창을 높이 치켜든 그의 모습을 보노라면 금방이라도 승리를 쟁취할 듯한 기세가 하늘을 찌른다.

알렉산드로스도 대왕은 기원전 333년에 단번에 페르시아를 제압하고 카파도키아까지 진격했지만, 끝내 정복에는 실패한다. 카파도키아에 있는 지하도시 때문이었다. 지하도시는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지만, 고고학자들은 인류 최초로 철기무기를 사용했던 히타이트 사람들일 거라고 추측한다. 이 지역을 소아시아 또는 아시리아라고 부르는 곳이다. 특히 실크 로드가 지나는 중요한 길목이기도 하다. 히타이트(Hittite)는 고대 아나톨리아 지역에 존재했었지만(기원전 1600~ 1178년) 비교적 최근에야 알려진 제국이다.

현재 터키의 보이즈칼레가 히타이트이고 수도는 하투샤다. 하투샤는 고원지대로 철 성분이 많은 토양이었고, 철을 녹일 정도로 강한 바람이 황야에서 고원지대로 불어와 풀무역할을 해주었다. 이들은 자연을 지혜롭게 이용해 인류최초로 철기제련기술을 발전시켜 무기를 만들었고, 신무기개발로 무장한 히타이트 사람들은 그 당시 청동 무기를 사용했던 이집트와 기원전 1274년에 카데시에서 한판 승부를 벌였다. 고대사에 나오는 최초의 세계 대전인 셈이다.

한판 승부로 끝날 것 같았던 전쟁은 무려 16년이나 걸렸다. 히타이트 무와탈리 2세와 이집트 람세스 2세 때 시작한 이 전쟁은 오랜 세월이 걸리면서 양쪽은 지칠 대로 지쳤다. 이 전쟁은 히타이트의 하투실리 3세가 즉위하면서 평화조약을 맺고나서야 전쟁을 끝마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조약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카데시 조약(Kadesh Treaty)’이다. 카데시조약문의 원본은 이스탄불의 고고학 박물관에 있고, 사본은 유엔 본부 1층에 진열되어 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이집트어로 된 카데시조약문은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 벽에 새겨져 있다.

참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사전, 나무위키 참조

* 나는 아직 카파도키아와 이스탄불을 여행하지 못했다. 계획하는 여행마다 이상하게도 이 두 곳이 빠지곤 했다. 그때마다 “뭐 다음에 또 오지”라며 아쉬움을 달랬다. 이렇게 언젠가는 꼭 가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두 곳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혹 준비 없이 엉겹결에 다녀온 분들이 있어 그분들에게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띄운다.

1194호 22면, 2020년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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