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연재] 해로 (Kultursensible Altenhilfe HeRo e.V.)

28회: <해로>의 꽃, 자원봉사자

“저도 얼른 남자친구가 생겨서 키스해보고 싶어요.”

모태 솔로 자원봉사자 Y 양의 수줍은 고백이다.

Y 양은 독일에서 대학을 다니기 위해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독일로 왔다. 그리고 유학 초기, 독일어를 배우는 어학원생 신분으로 입시 스트레스가 많았을 텐데도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고 비영리 단체인 <해로>를 찾아왔다. 자원봉사자 교육을 시작할 무렵 Y 양은 19세로 최연소 교육생이었다. 봉사자 교육은 모든 연령과 세대를 초월하여 누구나 받을 수 있다.

봉사자 교육을 이수한 후 자원봉사자 모임 때마다 어학 시험에 대한 고충을 쏟아내던 Y 양은 얼마 후 시험을 통과하여 지금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학기 중에도 꼬박꼬박 시간을 내어 한 달에 두 번 혼자 계신 할머니를 찾아뵙는다.

사실 유학생들은 시험 등 학사일정에 따라 일상이 불규칙하고 무엇보다 학업을 위해 다른 도시로 떠나버리는 경우가 잦아서 꾸준히 봉사 활동을 지속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Y 양이 더욱더 고맙고 기특하다.

Y 양과 친해진 계기는 ‘이사’ 때문이었다. 대학에 합격한 Y 양이 기숙사를 구했는데 사는 집에서 나오는 날짜와 기숙사 입주 날짜 사이에 5일간 간격이 있었다. 닷새를 더 머무르려면 집세를 한 달 치 더 내야 된다는 집주인 말에 그 돈을 아끼기 위해 창고를 대여하여 짐을 보관시키고 잠은 친구 집에서 잘 거라고 했다.

짐을 옮기는 것을 도와주기로 하고 가보니 이삿짐이 상자 5개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기숙사로 가려면 내가 사는 동네를 통과하여야 했다. 그래서 짐을 그냥 우리 집으로 가지고 와 며칠 두었다가 새집으로 갖다주었다. 그러자 이사 비용과 창고 비용을 한꺼번에 절약하게 된 Y 양이 한턱 쏘겠다면서 나를 식당에 초대하겠단다.

함께 환자 방문을 끝낸 우리는 Y 양이 추천하는 인도네시아 식당을 찾아갔다.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고 멀리 찾아간 그 식당은 그 또래에게는 꽤 유명한 집이라는데 내 눈에는 그냥 허름한 분식집이어서 이미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나 스스로에 혼자 놀라며 식당을 들어섰다. 식사 중에 Y 양은 양로원 봉사를 다니는 엄마를 어릴 적부터 따라다니며 자랐다고 했다. 무남독녀인데 유학을 나와버려 한국에 계신 엄마 아빠에게 죄송하며 이렇게 한국 할머니들을 방문하는 것이 단조로운 유학생의 일상에 변화도 주고 향수도 달래 주어 좋다고 했다.

연애에 대한 로망을 조잘 조잘 얘기하는 Y 양에게 얼른 남자친구가 생기길 바란다고 덕담을 해주고 나오니 밖은 이미 춥고 어두워졌는데 얇게 입고 나온 Y 양이 바들바들 떨고 있다. 한참 멋 부리고 싶은 나이이니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혼자 보낼 수가 없어 기숙사까지 내 차로 데려다주었다. 밥값도 내고 차도 태워주었으니 대접을 받았는지 해주었는지 모호해져 버렸지만 젊은 세대인 Y 양과의 대화는 늘 신선하고 재미있어 기분이 좋다.

자원봉사자 교육을 통해 처음 만난 Y 양은 특기할만한 것이 없이 평범하였다. 굳이 꼽자면 연예인 못지않은 예쁜 외모를 가졌다는 정도. 사실 자원봉사자 교육이라는 것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봉사는 무슨 특별한 기술이나 기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원봉사자 교육을 받기 위해 무슨 자격이나 조건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봉사하기 위해 교육을 받으라는 것은 봉사 활동 중에 심신이 지쳐버리는 일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 역효과를 일으킨다면 너무 안타까울 것이다. 그래서 독일 사회법은 일상생활 도우미나 호스피스 봉사자들이 일정 교육을 이수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은퇴한 할아버지, 자식을 다 출가시킨 할머니, 주부, 직장인, 유학생, 갓 이주해온 사람 또는 독일에서 반평생을 보낸 사람 등등 다양하다. 전혀 다른 삶을 살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교육을 통해 각자 자신이 모아둔 삶의 경험을 조금씩 서로에게 보여주다가 오히려 스스로의 재능을 발견하기도 한다.

또 교육을 통해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다가 불현듯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는 기회를 얻기도 한다. 자신과 자신이 딛고 있는 곳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해로 자원봉사자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다. 남을 돕기 위해선 먼저 자기 자신이 건강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교육 중에는 독일의 의료 체계나 환자와 관련된 지식적인 내용도 배우게 된다. 거기에 정기 모임을 통해 자원봉사자들끼리 친교를 나누는 일은 덤이다.

‘자원봉사’는 말 그대로 스스로 원하여 봉사하는 것이므로 각자 할 수 있는 정도로만 봉사에 참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 스스로 아는 것은 중요하다. 자신의 일상을 쪼개어 모르는 분이지만 도움이 필요하신 어르신을 기꺼이 돕겠다고 찾아와 봉사 활동에 나서는 자원봉사자들은 <해로>의 중심에 피어있는 꽃이다. 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하는 작은 움직임이 모여 큰 변화를 이루어내고 있다.

봉사 활동을 통해 돌려받는 보람은 기쁨을 수반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덕을 쌓는 일,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늘에 재화를 모아두는 일이기도 하다.


이정미/ 해로 호스피스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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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호 16면, 2021년 5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