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30년 (6)
동서독: 분단의 고착과 냉전의 심화 ③

617일 동독 시민봉기

1953년 5월 28일 사회주의통일당은 중앙위는 무든 부분에 있어 생산량을 10% 증가시키는 결의 안을 통과 이를 각 현장에 시달하였다. 그러나 동독 국민들은 이러한 경직된 정책에 반발하자 6월 11일 중산층과 농민에 대한 부담을 다소 경감해 주기로 결의하고, 지난 몇 달 전에 취한 몇 가지 시책을 철회하였다. 그러나 일단 인상된 생산량기준은 철회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러한 생산량 인상과 지속적인 정치적 압박에 대한 동독민의 불만은 결국 시민봉기로 터져나왔다.

1953년 6월 16일 베를린 대건설현장 두 곳에서 건설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하고 다음날 그들은 노동조건의 개선, 자유선거, 정부의 교체 등을 요구하면서 정부청사로 향해 대중적 항의시위에 들어갔다. 1953년 6월 17일에는 대중적 항의시위가 동독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소련군은 보병과 포병을 이끌고 이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시위에 참가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동독 6월 17일 봉기는 공산 정권에 대항한 최초의 시민 봉기로 비록 소련과 동독 당국의 진압으로 완전한 실패로 끝났으며 공산주의 자체에 대항한 것이 아니라 열악한 처우에 항의하는 성격을 띤 봉기였다는 분석도 많으나 ‘인민’을 위한다는 공산 정권은 실상 국민을 기만하고 탄압하는 전체주의 정권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낸 사건이었다.

동독의 6.17 봉기는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등 공산당 1당체제와 소련의 개입에 대한 동유럽 전역을 강타한 시민봉기의 시발점이 되었다.

2차 베를린 위기: 베를린 최후 통첩

제2차 베를린 위기는 1955년 제네바 회의의 결렬이후 현상유지를 원하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발생되었던 사건으로써 유럽의 긴장을 야기했던 사건이었으며 결국 베를린 장벽 건설로 독일 분단의 확정과 동서긴장의 심화로 이어졌다.

1958년부터 ‘독일 문제’를 둘러싸고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미국은 ‘견고한 억제 전략’을 채택, 서독군을 서방의 ‘방패’로 삼는다는 새로운 과제를 부여했고 이러한 서방의 정책에 소련의 흐루시쵸프가 1958년 11월 베를린 최후통첩을 내걸었다.

소련은 독일 문제 해결을 위해 서베를린과 동베를린 통합과 동독 소속을 주장했다. 소련은 서베를린 시민의 재산권과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 통합 베를린을 자치권을 가진 자유도시로 설정할 것이며 동서독 모두 이 자유도시에 대해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고 밝혔다. 소련은 향후 6개월간 서베를린에 진주한 당사국 군대를 철수시키도록 요구하였으며, 이 기간 중 모든 당사자들이 국제적 긴장 완화를 위해 베를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소련과 동독이 협약을 통해 준비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조치에는 동독이 자신의 영토 내에 있는 모든 지역, 즉 서베를린까지 자신의 주권하에 두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서방 승전 3개국은 소련의 이 선언에 대해 서로 상이한 입장을 보이다가 1958년 연말에 가서야 이 최후통첩 거부를 선언하게 된다.

이후 1959년 베를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4개국 외상회담 등이 개최되었으나 결국 ‘세 가지 본질적 문제'(서베를린의 연합군 주둔권, 연합군의 서베를린에의 자유로운 접근권, 서베를린의 생존력)로 그 해결책이 제시되엇고, 이는 베를린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서베를린에만 국한된 문제로 이는 소련이 동베를린 내부에서 행하는 어떠한 행동에 대해서도 서방국은 개입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베를린장벽 설치: 동서 냉전의 상징

1961년 8월 12일 밤 동독은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들의 엄호 하에 동-서 베를린을 연결하는 13개의 주요 도로와 80여 개의 거리에 철조망이 설치하였다. 8월 13일 일요일 아침, 느긋하게 단잠에서 깨어난 베를린 시민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하였다. 베를린은 탱크와 중무장한 경비병들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는 가운데 도시가 반쪽이 난 것이다.

독일 문제에 있어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 내려졌다는 사실이 곧 분명해졌다. 동서독의 완전한 분리가 서방 연합국과 서독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며, 독일 민족의 역사가 임시적으로가 아니라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서로 완전히 다른 형태를 가진 두 개의 국가에서 펼쳐지리라는 것이 분명해진 순간이었다.

동독의 베를린 장벽 건설의 원인은 우선적으로 동독인들의 서독으로의 탈출 저지에 그 목적이 있었다. 1949년 동독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해 평균 20만 명의 동부 독일인들이 베를린을 통해 서부 독일로 넘어가기 시작했고,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직전까지 모두 250만 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탈출했다. 특히 이들 중에는 숙련 노동자와 전문직 종사자들의 비율이 높아서 동독 정부로서는 체제의 안전까지 흔들리는 상황이었으며, 더욱 사태를 악화시킨 것은 한창 극단으로 치닫고 있던 동서 냉전의 분위기였다. 베를린을 자유 도시로 지정하자는 소련 측의 제안을 서방측이 거부하자, 1961년 6월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베를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핵무기 사용도 불사 하겠다”고 공언하여 전쟁에 대한 공포는 고조되었고,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탈출러시는 가속화 되었다. 그 해 7월, 한 달 동안에만 3만 명이 넘는 동독 시민들이 서독으로 넘어갔고 결국 동독 정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서방국들도 서베를린의 안전에만 관심을 국한시켰고, 이는 동베를린에서의 어떠한 행동에도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내비친 것도 그 한 원인이 되었다.

베를린 장벽은 최초에는 45km 길이의 철조망이 들어섰지만, 차차 콘크리트와 벽돌로 된 높이 2m, 폭 2m의 장벽으로 대치되어, 150Km의 차단벽은 서 베를린을 고립시켰고 독일 분단과 동서냉전의 상징이 된 베를린 장벽은 28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2020년 7월 10일, 1178호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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