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속의 한국 문화재 (11)
라이프치히그라시민속박물관 한국문화재 ③

그라시 박물관의 한국 컬렉션

쟁어(H. Sänger)의 컬렉션

라이프치히 민속박물관의 한국 소장품 중 가장 규모가 크며(약 1,250건의 유물) 가장 의문점이 많은 것이 바로 쟁어의 컬렉션이다. 박물관은 이를 1902년에 구입하였다. 쟁어는 처음에 소장유물이 분산구매 되도록 시도하였으나, 다른 박물관들은 그의 소장품을 구입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문화재를 확대하길 바라던 신흥시민의 노력으로 라이프치히 그라시 민속박물관은 쟁어의 유물을 일괄수집하게 되었다.

쟁어의 소장품들은 특별전을 통해서 이미 라이프치히의 시민들에게 공개된 바 있었으며 이 특별전을 통해 전체 컬렉션을 구입할 수 있는 돈에 대한 라이프치히 시민들의 모금운동이 시작되어 자금이 마련되었다.

이 컬렉션에 포함된 상당수의 물건들은 그 당시의 제한적인 사용 계층이나 성격, 그리고 동반하는 문서에 의거하여 왕실 또는 왕실에 가까운 가문의 소유물들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들이 팔린 상황이나 연루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오늘날까지도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컬렉션을 판매한 사람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그가 19세기에서 20세기 어간에 동아시아 물품을 함부르크로 수입하는 사업을 했었다는 점이다. 쟁어가 라이프치히 박물관에 쓴 편지 중 하나에 의하면 그가 아시아 전역의 민속과 미술품들을 취급하는 판매상들을 통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박물관에 제시하기 전, 짧은 시간 동안에 자신의 컬렉션을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19세기에서 20세기에 접어드는 시기는 한국이 엄청난 변화를 겪은 시기였다. 조선 왕조의 지배력은 눈에 보이게 약해져 가고 있었다. 이전 지배층의 권력과 영향력은 무너지고 있었고 일본 제국의 공격적인 영향력은 점점 더 강해져가고 있었다.

한국 문화는 변화를 겪는 중이었으며 이러한 변화는 먼저 상류층에 영향을 미쳤다. 예전 문화의 많은 부분들이 구식으로 내몰리며 “근대적”인 서양 또는 일본의 문화적 가치가 대신 자리 잡았다. 이런 격변의 시기에 쟁어의 판매상들은 불과 몇 년 전이었다면 아무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던 물건들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쟁어의 수집품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 세 분류의 물품들은 각기 다른 출처에서 수집된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그룹에 있는 400여건의 유물들은 주로 한국의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물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공예품에서부터 판매용 물품들이 있으며 19세기 말의 종교의례 용품도 포함되어 있다. 다양한 종류의 공구, 살림 물품, 도자기 그릇, 직물, 그리고 물건의 저장·운반을 위한 통이나 함 등이 있다. 몇몇의 가게에 있는 물건 전체를 의도적으로 구입하거나 장인의 공구 전체를 한 번에 구입한 정황을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물건들은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 집안일을 돕던 하인들을 통해 시장이나 공방에서 큰 어려움 없이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그러나 약 540여건의 귀금속 소장품들은 전혀 다른 면모를 보인다. 이러한 공예품들은 소 수의 숙련된 예술 장인들이 생산한 물건들로 옥, 호박 또는 귀한 금속을 재료로 하여 만든 것들이었다. 재료는 둘째치더라도 라이프치히 컬렉션에 있는 귀금속의 양이나 질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한국의 평범한 귀금속 가게에서 구매할 수 있는 물건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

이 컬렉션에 모인 많은 물건의 상당수는 관료의 모자 장식, 여인네들의 몸 또는 머리 장신구, 장도 또는 선추 등이다. 옥으로 만든 몇몇 물품들은 조선의 지체 높은 수집가와 조정 관료들을 위해서 중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궁중 장신구들이 판매된 정황은 1895~96년 경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에 의해서 암살된 후 고종이 처했던 이례적인 상황에 맞추어 해석될 수 있다. 왕은 세자와 함께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해야만 했다. 이 시기에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왕실이나 조정의 높은 관료들이 자신들이 소장한 물품을 판매하여 자금을 모아야 했을 상황은 손쉽게 유추할 수 있다.

쟁어 수집품 중 세 번째 그룹에 속하는 200~300여건의 유물들은 대부분 역시 궁중에 귀속된 물품들인 것으로 보인다. 서류의 다양한 곳에 표시된 바에 따르면 특정한 물품들, 주로 복식이나 무기의 경우, 왕의 소유였거나 왕실 재산의 일부였음을 알려준다.

현재 이런 출처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를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실제로 이런 물품들이 왕실 가족이나 가장 높은 지배계층에게만 사용이 허용되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무기, 깃발, 그리고 갑주는 대부분 궁궐을 지키던 군사들의 물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군대는 19세기 말 군대의 근대화 과정에서 모두 해산되었다.

쟁어 이후 한국유물 수장은 1958년에 북한으로부터 대량으로 들어온 것이 전부이고, 그 이후는 간헐적으로 수집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호에서 살펴보도록 한다.

1185호 30면, 2020년 9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