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그려낸 변덕스러운 길, 그 위의 전시장

노석임

요즘 베를린의 길은 매일이 다른 얼굴을 한 전시장 같습니다.

어떤 날은 유리처럼 매끄럽게 반짝이는 빙판길이었다가, 또 어떤 날은 밟기조차 미안할 정도로 소복하게 흰 눈이 쌓인 순백의 길입니다. 55년 가까이 이 도시의 사계를 보아왔지만, 베를린의 겨울길은 여전히 낯설고도 경이롭습니다.

얼마 전에는 반쯤 녹은 얼음이 마치 사골국의 기름처럼 미끈거려 발걸음을 무겁게 하더니, 오늘은 어제 녹은 눈이 밤새 얼어붙어 강아지마저 미끄러지는 기묘한 얼음길이 되었습니다.

결국 네 발로도 버거워하는 강아지를 품에 꼭 안고 산책을 마쳤습니다. 품 안의 온기를 느끼며 생각합니다.

내일은 또 날씨가 어떤 길을 빚어낼지, 그리고 나는 그 길 위에서 어떤 풍경을 마주하게 될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불조심대신 길 조심을 배우는 계절의 지혜

이 미끄러운 길 위에 서면 아득한 옛 기억이 소환됩니다. 국민학교 시절, 고사리 같은 손으로 머리를 맞대고 ‘자나 깨나 불조심’이라는 표어를 고민하며 포스터를 그리던 때가 떠오릅니다.

하지만 50평생을 넘어 세월을 베를린에서 보낸 지금의 저에게는, 한국의 지인이 보내준 ‘조심조심 또 조심’이라는 짧은 문구가 그 어떤 명언보다 절실하게 와 닿습니다.

이제는 불조심이 아니라 ‘길 조심’이 일상이 된 것이지요. 주변에서 들려오는 팔이 부러지고 얼굴에 멍이 들었다는 소식들에 가슴을 쓸어내리곤 합니다.

얼마 전 빙판길에 넘어져 안경이 부러지는 사고가 있었지만, 그만하길 다행이라며 위안 삼는 요즘입니다.

젊은 시절, 환자들의 걸음을 돌보던 간호사였던 제가 이제는 자신의 발걸음을 이토록 정성스럽게 살피게 된 것을 보며 세월의 흐름을 다시금 실감합니다.

추억과 희망이 머무는 길, 그리고 쉼표

이 미끄러운 겨울길 너머에는 수많은 계절의 기억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봄이면 민들레 꽃이 노랗게 피어나 발치에 머물던 길, 이웃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며 삶의 안부를 묻던 정겨운 길, 그리고 ‘이 길 중간에 작은 커피집 하나 있으면 참 좋겠다’며 소박한 소망을 품고 걷던 길들입니다.

길가에 멀찍이 떨어져 놓인 벤치들을 보며 문득 생각에 잠깁니다.

지금은 찬 바람과 빙판을 피해 바삐 지나치지만, 머지않아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날이 오겠지요. 그때는 저 의자에 쉬엄쉬엄 앉아 깊은 숨을 고르며,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을 느긋하게 바라보고 싶습니다.

인생이라는 커다란 작품의 한 페이지

저에게 길은 단순히 발을 내딛는 바닥이 아닙니다. 1970년대 독일 땅을 처음 밟았던 그 설레던 길부터, 오늘날 베를린의 차가운 빙판길까지…

길은 저의 지나온 과거와 머물러 있는 현재,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미래를 하나로 연결해 주는 풍부한 매력을 지닌 예술 작품입니다.

오늘도 저는 빙판 위를 조심스레 걸으며, 인생이라는 커다란 작품의 한 페이지를 정성껏 채워갑니다. 비록 걸음은 느려졌을지라도, 그만큼 길 위의 풍경은 더 깊고 진하게 눈에 들어옵니다.교포신문의 독자 여러분도 이 겨울, 각자의 길 위에서 안전하고 평안하시기를 빌어봅니다.

1447호 15면, 2026년 2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