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한반도 평화체제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그 목표가 달라진다. 어떤 때는 열전에서 승리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어떤 때는 냉전을 관리하고 그 뒤뜰에서 경쟁 우위를 점하는 것이 목표가 되기도 했다. 근자에는 대북 압박과 억제를 병행하며 북한을 시장경제 행위자로 유도하여 화해 협력을 강제하는 것이 평화체제의 목표가 된 시절도 있었다.
안타깝게도 북한을 시장으로 바라보고 이익을 나누어 평화체제를 확장시키는 전략은 그러나 우리 내부의 분열과 북한의 군사적 야욕 탓에 실패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북한의 잦은 도발에 맞추어 강화되어 온 대북 제재 체제가 워낙 강력했던 탓에 북한의 시장화와 자유화는 더 먼 길이 되고 말았다.
현재는 어떠한가? 북한은 군사력에서의 절대 열세를 극복하고 사실상의 핵 국가임을 자처하며 핵 전쟁 위협에 근거한 대남•대미 억제력을 갖추었다고 공언하고 있다.
나아가 북한이 두 국가 체제 운운하며 통일과 민족 담론을 폐기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다가올 평화체제의 상이 익숙하지 않다. 앞선 시기의 평화가 항상 통일과 씨줄, 날줄의 관계로 얽혀 있었다면 이젠 북한의 두 국가론 탓에 통일이 평화와 분리된 목표로 비춰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유엔 총회에서 이 대통령은 새로운 평화체제의 상에 대한 답을 평화공존 3대 청사진이라는 이름으로 제시했다. 포용적 평화공존, 안정적 평화공존, 책임 있는 평화공존이 그것이다.
3대 청사진은 무엇보다도 남과 북의 평화공존이 통일보다 우선이라는 대전제에서 출발한다. 윤석열 정부 시기 재개된 주적 공방과 드론 공방의 아찔했던 대립을 치유하고 다시 통일로 가는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평화공존이라는 치유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지혜이다.
대통령이 제안한 포용적 평화공존은 상호 존중과 인정의 원칙을 내포하고 있다.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무시하고 흡수의 야망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야만의 시대를 접겠다는 문명적 의지의 표시이다. 안정적 평화공존은 우리의 평화가 지속 가능한 평화 즉 불가역적인 평화 그래서 싸울 필요 없는 평화여야 함을 의미한다.
안정적 평화를 위해서는 합의 불가능한 최종 목표를 앞세우기보다는 작더라도 달성 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하나하나 작은 것이라도 합의해 나가 성과를 축적할 수 있는 실천적 지혜가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우발적이든 의도적이든 남북 모두 확전의 사다리를 오르지 못하게 하고 핵 사용의 문턱을 높여 재앙으로 가는 길을 원천봉쇄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책임 있는 평화공존은 전쟁과 분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세계, 이를 위한 동북아 평화 모델을 만드는 데서 각자의 책임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책임 있는 평화공존의 가장 핵심적인 과제는 한반도의 오래된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일이다. 한반도 평화체제는 오랜 기간 남북은 물론 미국, 중국 등 관련국들도 그 필요성에 대해 함께 공감하고, 논의해 온 핵심 과제이다.
다행히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으로 변화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 우리는 멈춰 있던 북미 대화가 조속히 재개되고 한반도 전쟁 종식과 평화체제 전환을 위한 당사자 간 대화로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 한반도 전쟁 종식과 평화체제 전환을 위한 4자 회담을 성공시키는 것은 그래서 우리에게는 책임의 영역인 것이다.
한편 한반도 평화공존을 위한 열쇠는 한미동맹의 강건함에 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앞서서 미국의 대북 협상을 반대해 온 역사가 재현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북미 대화와 남북 대화, 그리고 한미 협상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상호 상승 작용을 통해 평화를 공고화시켜가는 것일진대, 항상 남북 대화가 앞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동맹에 대한 불신일 뿐이다.
북미 대화를 한국 패싱으로 간주하고 반대하기보다는, 대화의 부재가 가져올 긴장과 갈등의 위험을 경계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대화가 안보의 50%라는 말이 있다. 전쟁 중에도 외교는 있어야 한다고들 한다. 57개의 핵탄두를 확보한 북한과 아무런 연락 채널도 없고, 200만 대군이 대치하고 있는 휴전선을 북한이 일방적으로 국경화하는 과정에 어떤 접촉도 없으며, 불과 1년 전까지 쌍방 드론이 날아다닌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미국이 북한과 대화를 시작한다면 ‘환영’ 외에 다른 대안이 있는가? 이를 위해 음으로 양으로 발품을 팔아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페이스메이커요, 북한의 야심을 다독여 평화의 장을 세우는 역할이 피스메이커일진대, 한국과 미국이 역할 분담하는 것을 문제 삼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향후 시작될 북미 대화의 가장 시급한 주제는 북한의 핵 고도화 중단이다. 전략적 인내 운운하며 하노이 노딜 당시 20개에 불과했던 핵무기가 60여 개에 달하도록 방치하고, 지금도 연간 7~10개 이상 증산되고 있는 핵무기에 눈감는 것은 과오이다.
나날이 고도화되고 있는 북한의 핵 전력을 우선 중단시키는 것은 남북 간의 부질없는 드잡이를 훌쩍 뛰어넘는 우선 과제임은 분명하다. 그것은 대북 자강력과 억제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 평화공존의 입구를 여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에 실패했던 지난 시기 미국 정부들에 비하면 지금의 트럼프 대통령이 보이고 있는 적극성은 고무적이다.
공과를 따지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페이스 메이커라도 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은 좌고우면하기보다는 스퍼트에 나설 때이다.
1478호 19면, 2026년 10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