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문화사업단의 문화이야기

고대 로마사 속의 여성들 (3)

현존하는 역사적 기록에서 여성에 대한 기록은 매우 소수이다.
문화사업단서는 ‘역사 속의 여성’의 일환으로 고대 로마사 속에 나타나는 여성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공화정을 탄생시키고, 지켜낸 로마 여성 : 루크레티아와 코르넬리아

정절의 상징 루크레티아(Lucretia)

루크레티아는 정숙한 로마 여인이다. 겁탈당하고 자살하는 이야기는 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서 기원전 510년 왕권통치의 종식과 로마 공화정의 설립을 이끌었던 일대 사건이었다.

지난호에서 설펴본 바와 같이 로물루스는 로마를 창건한다. 이후 7명의 왕들이 즉위하였는데(로마 왕위은 계승은 세습이 아니라 원로원에서 선출하는 형식을 띠었다), 제 7대 왕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Tarquinus Superbus) 가 통치하던 시절, 로마가 이웃 국가 아르데이아를 포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루크레티아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 왕의 아들가운데 하나인 섹스투스는 루크레티아의 근면성실함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외모에도 마음을 빼앗겼다. 그녕의 남편 콜라티누스가 아르데이아 전장으로 되돌아간 며칠 뒤 섹투스는 루크레티아의 침실로 침입하여, 반항할 경우 그녀와 하인들을 죽이는 것은 물론 남편에게도 보복하겠다고 협박해서 그녀를 겁탈했다. 그리고 섹스투스는 그 자리를 떠난다.

다음 날 루크레티아는 아버지와 남편, 남편의 친구 부르투스에게 이 사실을 모두 털어놓고는 가슴에 비수를 꽂아 자결하였다. 이 사건으로 분노한 부르투스는 귀족층을 규합, 왕과 그 일가를 로마에서 쫓아내고 로마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후 섹스투스는 처형되고 전제군주제를 대신해 두 명의 집정관이 이끄는 로마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훗날 루크레티아는 로마의 근면함과 정숙함의 상징으로 추앙되었으며, 시인과 화가들에 의해 예술작품으로 널리 표현되었다.

한편 후대 사가(史家)는 루크레티아 사건에 대한 상이한 묘사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리비우스(BC 64~AD 12)의 <로마 건국사>는 루크레티아의 죽음 이후 벌어진 남성들의 결의, 분투, 공화정의 성립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오비디우스(BC 43~AD 17 즈음)의 <로마의 축제일>은 루크레티아의 얼굴, 맵시, 당시의 모습을 자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리비우스가 정사(正史)를 쓰는 사가의 입장에서 그 사건의 결과에 주목한 반면, 오비디우스는 자신의 문학작품을 단장해주는 장식물로 여긴 듯 하다. 여기서 우리는 기록의 중요성과 위험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된다.

현모양처의 상징: 코르넬리아(Cornelia)

코르넬리아 스키피오니스 아프리카나(Cornelia Scipionis Africana, 기원전 190년경 – 기원전 100년)는 로마 공화정의 인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영웅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둘째 딸이다. 고귀한 성품으로 고대 로마 여성의 완벽한 표상으로 여겨진다.

코르넬리아는 아버지 스키피오를 도와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 결혼했다. 두사람은 나이 차가 많이 나지만 서로 사랑했고 12명의 아이를 가지게 되지만 성인으로 자란 것은 두 아들,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그리고 그들의 누나인 셈프로니아뿐이었다.

기원전 154년 남편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죽었을 때 코르넬리아는 아직 어린 나이였고 현숙했기 때문에 많은 구혼자가 나타났는데 그중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도 있었다. 그러나 코르넬리아는 아이들을 잘 양육하기 위해 모든 구혼을 뿌리치고 과부로 남았다.

그녀는 큰 딸 셈프로니아를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에게 시집보냈고 두 아들을 아주 훌륭하게 양육했으며 두 아들이 개혁문제로 보수적인 원로원의 귀족가문과 마찰을 일으킬 때도 자신이 귀족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아들들의 훌륭한 지지자로 행동했다.

두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이후 그녀는 로마를 떠나 미세눔의 빌라로 은퇴했지만 거기서도 항상 손님을 맞이했다.

그녀가 죽자 로마는 그녀를 명예롭게 여겼고 동상을 세워 기념했다.

그녀의 아이들이 어렸을 때의 일화이다.

어느날 코르넬리아의 집에서 명사 부인들의 정기 모임이 있었는데 여기에 모인 부인들은 코르넬리아가 애써 준비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한 부인이 자신의 손을 내보이며 끼고 있던 반지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보석이 박힌 그 반지는 언뜻 보기에도 값비싸 보였다.

다른 부인들도 모두 반지에 관심을 보이며 아름답다고 칭찬하더니 곧 제각기 자신들의 몸에 지니고 있던 반지, 목걸이, 귀고리, 팔찌 등을 하나씩 내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독 집주인 코르넬리아만은 남의 보석들을 구경할 뿐 자신의 보석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른 부인들이 가만히 앉아 있는 코르넬리아에게 말했다.

˝부인, 어서 부인의 보석도 보여 주세요. 구경 좀 합시다.˝ 부인들은 자꾸만 그녀를 재촉했다.

처음엔 이를 사양하던 코르넬리아도 결국 성화에 못 이겨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부인들은 코르넬리아가 가지고 나올 멋진 보석에 대해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잠시 후 코르넬리아는 양손에 두 아들의 손목을 꼭 잡고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부인들을 둘러보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이 아이들이 나의 가장 귀한 보석입니다.˝

이렇듯 그라쿠스 형제의 뒤에는 어머니 코르넬리아가 있었다. 젊어서 남편을 잃었지만 당시 관례와 달리 재혼을 거부하고 아들 교육에 전념했다. 여기엔 “자식은 어머니가 관리하는 밥상머리 대화로도 자란다”는 말을 기억하면서 자식교육을 중시했던 코르넬리아의 철학이 담겨 있다

1323호 23면, 2023년 7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