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은 이미륵 선생 도독 100주년, 타계 70 주년의 해

이미륵선생 타계 70주년을 맞아-독일에 한국을 심은 이미륵(李彌勒)

그가 잠든 지 70년이 지났지만, 독일인들은 여전히 그의 묘소를 찾고 그의 책을 읽는다. 1946년, 전후 독일 문학계에 돌풍을 일으키며 등장한 미륵은 독일어로 한국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 <압록강은 흐른다>가 출간되자마자 초판이 매진될 정도로 반응은 뜨거웠다. 평론가들의 서평이 100편 넘게 신문에 실렸다. 독일인들은 지금도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만큼 이 책을 아낀다.

한국인으로서 자신의 자전 소설을 독일어로 발표하여 그 해의 ‘독일 최우수 소설’을 거머쥔 사람, 바로 이미륵이다. 그는 한국인이면서 독일어로 작품을 발표하여 한국을 독일 문단에 돋보이게 소개한 최초이며 유일한 인물이다.

한편 지난해인 2019년 5월 28일 그의 무덤이 있는 그래펠핑 시 시청 인근 쿠르트 후버교수 거리에 이미륵박사 기념동판이 설치되었다. 이 기념동판은 재외문화재재단과 한국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가 이미륵 박사가 활동했던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그래펠핑시의 후원으로 기념동판을 설치한 것이다.

이미륵의 일생

이미륵은 1899년 3월 8일 황해도 해주시 남영정 205번지에서 당시 천석꾼이었던 이동빈(전주 이씨)과 이성녀(청주 이씨)사이의 1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미륵은 아명이고 본명은 의경이다. 미륵이라는 아명은 그의 모친이 38세때 아들을 낳기 위해 미륵 보살을 찾아 백일 기도를 드린 끝에 얻었다고 하여 얻게 되었다.

어린 시절 통감, 사략, 맹자, 중용 등 한학을 공부하고, 신식학교를 다닌 이미륵은 1910년 11세의 나이로 17세인 최문호와 혼인하였고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으며, 1917년 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 대학 전신인 경성의전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경성의전 3학년 때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일경의 추적에 못 이겨 끝내는 밀선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 땅으로 도망쳤다. 그후 약 6개월간 여권을 얻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임시 정부의 일을 돌보기도 하였으며 중국 여권을 얻은 후 독일로 망명을 갔다. 마르세이유에서 우연히 한국을 잘 아는 빌헬름(분도회 전도사)을 만나 그와 함께 독일의 뮌스터 슈바르차하라는 수도원에 도착(1920년 5월 26일), 8개월간 그곳에 머무르면서 독일어 공부에 열중했다.

다음 해 1월부터는 뷔르츠브르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의학 공부를 하다가 1923년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겼다. 그러나 병으로 휴학하고 1925년부터 뮌헨대학에서 동물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1926년에는 외국인 학생회장도 지내고, 1927년에는 늑막염으로 스위스의 루가노 요양소에 3개월간 입원했으며 1938년 7월 28일에 뮌헨대학에서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어렸을 때도 예민하여 그리 건강치 못했던 미륵은 이국 만리에서 고생하면서 공부하다보니 병에서 별로 해방되는 날이 없었다. 그는 공부가 끝나고도 전공분야에 종사하지 않고 창작에 몰두하여 한국을 배경으로 글을 썼다. 전 박물관장 김재원 박사와 만나 향수를 달래면서, 학술논문 번역, 신문·잡지에 발표하는 원고료 및 서도 지도 등으로 생활을 유지했다.

1931년부터 그는 자일러 미술교수 집에 기거하면서 자신의 작가적 소질을 더욱 길렀다. 그 후 <한국의 어느 골목의 밤>, <열녀문>, <한국과 한국인>, <수암과 미륵>, <주인과 하인>을 발표했다. 1946년에는 그가 그 동안 써온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발표하여 일약 유명해졌으며, 그가 거주하던 뮌헨 교외의 그래펠핑지역에 ‘월요문인회’라는 문인단체를 조직했다. 정기적으로 분할토론회와 시사토론회를 가짐으로써 많은 지식인들, 특히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그러면서 그의 활동 범위는 점차로 확대되었고, 그의 학문적인 지식이나 문학적인 소질 역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전후에 뮌헨의 파란만장한 문화생활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인물’로 간주되었다. 창작과 함께 뮌헨 대학에서 한학과 한국 문학을 강의하던 이미륵은 위암으로 1950년 3월 20일 51세의 나이에 그리워하던 조국 땅을 보지 못하고 서거하고 말았다.

독일에서 찬사와 사랑을 받았던 한국인 이미륵

그가 잠든 지 64년이 지났지만, 독일인들은 여전히 그의 묘소를 찾고 그의 책을 읽는다. 1946년, 전후 독일 문학계에 돌풍을 일으키며 등장한 한국인 이미륵은 독일어로 한국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고, 독일인이 읽어도 아름다운 문체와 감동적인 이야기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독일 학자들의 눈에도 그의 문장은 탁월했기에, 외국인이 독일어로 쓴 소설이라고 믿기 어려워했다.

독일 본대학교 한국학과 교수인 후베 박사는 과거 KBS와 인터뷰에서 “외국인이 이러한 업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한독 문화교류에 큰 상징이 될 만한 분이다. 그의 문장들은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고 흐름이 매끄럽다. 단어 선택도 아주 적당하고, 단순하지 않고 재미있다. 내가 한국말로 소설을 쓴다면 죽을 때까지 노력해도 그렇게 쓰지 못할 것이다. 감탄할 수밖에 없다”고 극찬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조국은 평생을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그의 혹독한 외로움과 죽음을 오랜 시간 동안 알지 못했다.

1946년에 <압록강은 흐른다, Der Yalu fließt>를 출간했을 때 초판이 매진될 정도의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독일 소설가’로 이름을 알렸다. 외국인이 독일어로 쓴 낯선 나라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평론가들의 서평이 100편 넘게 신문에 실렸다. 한 잡지는 ‘올해의 가장 훌륭한 책’으로 <압록강은 흐른다>를 꼽았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문학성을 인정받았고, 그가 죽은 뒤에도 BBC 등 유럽 방송들은 이미륵의 이야기를 방영했다. 당시 책을 펴낸 피퍼출판사는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책만 출판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피퍼출판사의 사장은 자신의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압록강이 흐른다>는 내가 발간한 책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책 중 하나였습니다.’

이미륵의 문장을 타고 독일에 흐르는 압록강

<압록강은 흐른다>에는 어릴 적 황해도 고향의 토속적인 풍경과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녹아 있다. 꿀을 훔쳐 먹은 일, 벽장 깊숙이 숨겨놓은 비상약을 먹고 실신한 일, 이웃 아이들과 달밤에 벌이는 싸움박질…. 선비인 아버지가 선생을 모셔와서 연 서당에서 천자문을 떼고, 신식 학교에 가서 자연법칙과 링컨을 배우는 급변기의 교육을 받은 이미륵. 논어와 맹자를 배우다가 링컨의 전기를 두고 조선 선비인 아버지와 주고받는 대화는 독일인의 눈에도 무척이나 재미있었을 것이다.

“에이브러햄 링컨, 에이브러햄 링컨, 이건 사람일 테지?”

아버지가 권하는 술 석 잔을 삼키고 취한 아들은 아버지와 주거니 받거니 농을 하고, 못 말리는 척 미소 짓는 어머니가 함께 만들어내는 한밤의 술자리 풍경은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의 가장이 된 그는 어머니의 권유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지만, 그의 운명은 3·1 만세운동에 가담하면서 급변한다. 3·1운동 직후 일본 경찰을 피해서 고향으로 도망쳐 온 아들에게 어머니는 단호히 말한다.

“너는 겁쟁이가 아니다. 나는 너를 무척 믿고 있단다. 용기를 내라. 너는 쉽사리 국경을 넘을 것이고, 또 결국엔 유럽에 갈 것이다. 비록 우리가 다시 못 만나는 한이 있더라도 슬퍼마라…. 너는 나의 생활에 많고도 많은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자, 내 아들아. 이젠 너 혼자 가거라.”

청년 이미륵은 아내와 어머니, 1남1녀를 남겨둔 채 압록강을 건넌다.

“오랜 옛날부터 우리 고국을 이 무한한 만주 벌판과 분리시키고 있는 국경의 강은 쉬지 않고 흐르고 흘렀다. 이쪽은 모든 것이 크고 어둡고 진지했으나, 저쪽은 모든 것이 작고 맑게 보였다.”

<압록강은 흐른다> 전반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이 배어 있다.

“그 집 정원에는 꽈리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 빨간 열매가 햇빛에 빛났다. 우리 집 뒷마당에 서 그렇게도 많이 보았고, 또 어렸을 때 즐겨 갖고 놀았던 그 식물을 나는 얼마나 좋아했던가! 마치 고향의 일부분이 내 앞에 실제로 와 있는 것 같았다.” <압록강은 흐른다> (전혜린 옮김. 범우사)

독일에서 혹독한 외로움을 견디며 치열하게 살던 미륵은 고향에서 온 첫 소식을 받는다. 어머니의 부고였다. 글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유럽으로 떠나는 동안의 여정에 대해서도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압록강을 건너면서 겪는 숨막히는 상황까지도 이미륵의 성격처럼 잔잔하게 서술한다. 그리운 어머니에 대한 문장은 가슴을 울린다. 그러나 아이들과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끝내 나오지 않는다. 독자들이 오랜 시간 동안 의문을 갖는 지점이기도 하다.

독일인들이 이미륵을 사랑한 이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전국의 국민들은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 속에서 정신적 공황을 겪을 시기였고, 나치 정권이 자신들의 사상에 어긋나는 서적들을 모조리 불태운 뒤였기에 독일 국민들은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문학작품에 목이 말랐다. 그때 이미륵의 작품은 그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자 위안이 되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청년의 여정에 동질감을 느끼면서 동양의 나라 한국의 독특한 문화와 서정적인 세계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동양의 정서가 물씬 풍겨나는 미지의 나라 한국의 이야기는 마치 환상 동화처럼 읽히기도 했다.

이미륵은 독일어로 작품이나 논문을 발표하여 한국을 독일에 소개한 최초의 한국 작가이자 교수였다. 1948년부터는 뮌헨대학 동양학부에서 한학 및 한국학을 가르쳤다. 독일의 대표적인 동양학자 볼프강 바우어(Wolfgang Leander Bauer)가 그의 제자다. 훌륭한 작가이자 선생이었던 그를 독일인들은 ‘완벽한 인간’이라 부르기도 한다.

완전한 작가이자 뜨거운 인간애를 실천한 사람

2차대전 당시 반나치 비밀지하조직인 ‘백장미’라는 저항단체가 있었다. 1943년 2월 17일 뮌헨대 학생이던 한스 숄과 소피 숄 남매는 뮌헨대학교 광장에서 백장미의 반나치 유인물을 뿌렸다. 결국 남매는 2월 22일에 처형됐다. 그때 뮌헨대 총장이던 후버 교수도 함께 처형됐다.

이미륵 연구에 일생을 바친 정규화 박사는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백장미 사건으로 투옥, 사형당한 숄 남매를 이미륵 박사가 면회한 사실은 아직까지는 확인이 되지 않았지만, 이 사건과 관련해 투옥된 뮌헨대 총장 쿠르트 후버 박사를 면회 가서 식료품을 전하고 가족들을 찾아가서 남매의 교육문제를 상의하고 위로하신 건 사실입니다.”(이미륵 박사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당시 반나치 운동을 한 경우에는 그들의 가족과 접촉하는 것조차 감시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1999년에 방영된 수요기획에 출연한 후버 교수의 딸 바이스는 뮌헨대 백장미 기념관의 팸플릿에 후버 교수를 소개하는 글을 이미륵이 썼다는 증언을 했다. 백장미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2006년 <쇼피 숄의 마지막 날들>(마크 로테문트 감독)이라는 영화에도 등장한다.

영화의 한 장면. 형장에 도착한 한스는 단두대에 머리를 올려놓기 전에 감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친다.

“자유여, 영원하라!”

나치 독재정권이 악명을 떨치던 암흑의 시대에 독일 전 지역에 전단지를 뿌리며 독재국가에 저항했던 이들을 이미륵은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륵, 그는 뜨거운 인간애를 실천한 사람이었고, 완전한 작가이자 한 인간이었다.

조국에 이미륵을 알린 사람들

그는 독립된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채 1950년 3월 20일에 숨을 거두었다. 향년 51세.

고병익 박사(서울대 역사학과)가 이미륵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훗날 정규화 박사(성신여대 독문과)가 작가 이미륵을 평생 동안 연구하게 된 계기는 뮌헨대학교 근처에 있는 고서점 주인 로테 뵐플레 여사 덕분이었다. 뵐플레 여사는 동양인을 만나면 “덕행과 글재주가 훌륭해서 이곳 사람들이 존경하는 한국인 이미륵이라는 이가 있는데, 그를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1999년 뮌헨 괴테포럼에서 열린 이미륵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뵐플레 여사는 “영혼으로 말하는 사람, 그는 모든 이들의 모범이었다”고 그를 추억했다.

따뜻한 인간 이미륵을 추억하는 이들은 많다. <이미륵 평전>(정규화, 박균 공저)에서 이미륵의 친구 게오르크 가브리쳅스키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되던 1943년 집이 폭격을 받아 화염에 휩싸였을 때, 집을 떠나려는 순간 이 박사가 집앞에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이 박사는 친구의 생사가 불안해 폭격을 무릅쓰고 자전거를 타고 친구의 집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나의 유일무이한 친구이자 진정한 귀족이다”라고 회고한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저자 전혜린은 1959년 뮌헨에서 이미륵을 발굴해 그의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한국에 소개했다. 전혜린이 35년 늦게 태어났지만, 두 사람 다 이북이 고향이고 독일 뮌헨대에서 공부했다. 고병익 박사는 처음으로 고국에 이미륵을 알렸고, 전혜린은 처음으로 그의 책을 번역했다. 이후 정규화 박사는 평생을 바쳐 이미륵의 인생을 연구하고 그동안 수집한 이미륵 관련 자료 전체를 1994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했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한 생을 이국에서 불꽃처럼 살다 간 이미륵의 일생을 잔잔하게 흐르는 압록강처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2020년 3월 20일, 1163호 14-15면